우리의 기도는 절대로 응답받을 수 없고,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비참한 순환에는 끝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에 하나 하늘이 우리를 가엾게 여겨 우리가 그리던 왕자나 공주를 만나게 해준다면, 그 만남을 단순한 우연의 일치로 치부해버릴 수 있을까? 한 번만이라도 논리에서 벗어나서 그 만남이 우리의 낭만적 운명의 징표라고 해석할 수는 없을까?

대화는 두서없이 이어져나가면서 서로의 성격을 흘끔거릴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구불구불한 산악 도로에서 잠깐씩 경치를 구경하는 것과 비슷했다.

어떤 사람을 두고 자신의 필생의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은 다 살아보고 나서야 가능한 일이다[따라서 불가능하다고 보아야 한다].

나는 회의적 태도로 운명의 문제를 생각할 능력을 잃어버렸다. 우리 둘 다 그때까지 미신적인 사람들은 아니었지만, 클로이와 나는 우리가 직관적으로 느끼던 것, 즉우리가 서로에게로 운명지어졌다는 것을 확인해주는 무수한 사실들―비록 사소한 것일지라도―을 손에 쥐게 되었다.

우리 두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하늘의 거대한 정신이 우리 궤도를 미묘하게 조정하여 우리를 어느 날 파리발 런던행 비행기에서 만나게 해준 것 같았다. 우리의 사랑이 우리에게 현실이 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현실이 되지 못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이야기들, 누군가 비행기를 놓치거나 전화번호를 잃어버리는 바람에 쓰이지 못했던 로맨스들을 무시해버릴 수 있었다. 우리는 역사가들처럼 확고하게 실제로 일어난 일의 편을 들었다.

그래도 우리는 만났다. 이 계산은 우리에게 이성적 주장들을 납득시키기는커녕, 우리가 서로 사랑하게 된 것에 대한 신비적 해석을 뒷받침해주었을 뿐이다. 어떤 사건이 일어날 가능성이 엄청나게 작은데도 결국 일어났다면, 운명론적 설명에 호소를 한다고 해도 용서받을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불안에서 벗어나려고 운명이라는 것을 만들어낸다. 인생에 있는 그나마 얼마 안 되는 의미도 우리가 만들어낸 것일 뿐이며, 두루마리 같은 것은 없으며[따라서 우리를 기다리는 미리 정해진 숙명은 없다], 우리가 비행기에서 누구를 만나고 만나지 못하는 것에는 우리가 부여하는 의미 외에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 생기는 불안―간단히 말해서 아무도 우리의 이야기를 기록해두지 않았고, 우리의 사랑을 보장해주지도 않았다는 불안에서 벗어나려고.

나의 실수는 사랑하게 될 운명을 어떤 주어진 사람을 사랑할 운명과 혼동한 것이다. 사랑이 아니라 클로이가 필연이라고 생각하는 오류였다. 그러나 내가 이렇게 우리의 사랑 이야기의 발단을 운명론적으로 해석했다는 것은 적어도 한 가지 사실은 증명해준다―내가 클로이를 사랑했다는 것. 우리가 만나고 못 만나는 것은 결국 우연일 뿐이라고, 989.727분의 1의 확률일 뿐이라고 느끼게 되는 순간은 동시에 그녀와 함께하는 삶의 절대적 필연성을 느끼지 않게 되는 순간, 즉 그녀에 대한 사랑이 끝나는 순간이기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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