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차 애호가의 보물상자
제임스 노우드 프랫 지음, 문기영 옮김 / 글항아리 / 2016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취하지는 않지만 어떤 황홀경을 가져다주는" 음료, 바로 차 이야기입니다.

뛰어난 와인 비평가로 명성을 떨치던 제임스 노우드 프랫은 항상 술에 취해 있어야 하는 생활을 감당할 수 없어 '차'에 의지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차의 역사와 다양한 차의 세계를 탐구하는 이 책 <홍차 애호가의 보물상자>는 그가 어떻게 와인 애호가에서 '차 애호가'로 변모하게 되었는지를 조근조근 들려주는 일종의 고백서라 볼 수도 있습니다.

 

프랫이 차에 처음 관심을 가지게 되었던 1980년대 초 미국은 차의 '혼수상태'에 빠져 있었다고 합니다. 좋은 차가 미국에 들어오지도 않았고, 미국인들은 커피나 청량음료만을 마실 뿐 차를 제대로 알고 즐길 줄 아는 사람들도 거의 없었다는 겁니다.(야마시타 카즈미의 <천재 유교수의 생활> 중 한 에피소드가 떠오르는 대목입니다. 미국의 카페에선 제대로 우린 홍차를 내놓지 않기 때문에 차라리 애플사이다를 마신다는 고집 센 영국인이 등장하죠.)

차에 관한 지식을 얻기도 당연히 어려웠을 겁니다.(1930년대에 윌리엄 유커스가 출간한 방대한 차 소개서 <차에 관한 모든 것>이 있긴 했으나, 당시엔 절판되어 1천 달러 이상의 고가에 거래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프랫은 자신의 호기심을 충족시킬 겸 차에 대한 공부를 하며 이 책의 초판인 "Tea Lover's Treasury"를 1982년에 출간하게 된 듯합니다. 그 뒤 2000년에 개정판인 "The New Tea Lover's Treasury"를 출간했고, 2011년 출간 30주년을 맞아 재개정판이자 결정판인 "The Ultimate Tea Lover's Treasury"를 출간했습니다. 글항아리에서 문기영 씨의 번역으로 나온 <홍차 애호가의 보물상자>는 바로 이 결정판의 번역본입니다.

 

책은 크게 차의 역사, 차의 종류, 차 마시는 법을 소개하는 3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1부(총 460페이지 중 약 280페이지)는 차의 기원부터 어떻게 하여 차나무가 전 지구로 퍼져 나가 전 세계인이 찻잎을 우린 음료를 마시게 되었는지 그 역사를 살피고 있습니다. 프랫 자신은 차의 역사를 '로맨스(Romance)'라는 단어로 표현하고 있는데, 차를 둘러싼 그 숱한 전설과 모험과 이야기들을 떠올려 보면 퍽 적절한 표현이라 하겠습니다.(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차 밀수에 관련된 이야기들과 미국인들이 '차를 끊게 된' 과정, 그리고 그로부터 200년 뒤 미국에서 다시 시작된 '차 르네상스'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특히나 최근 미국의 차 음료 시장에 대해 소개한 1부 4장은 기존의 어떤 책에서도 보지 못한 내용이었기에 무척 흥미진진했습니다.) 

2부에서는 차 생산지 별로 모든 종류의 차들을 소개합니다. 중국/일본/타이완/인도/실론뿐 아니라 인도네시아, 아프리카부터 오세아니아까지 새로운 차 생산지들을 소개하고, 차 블렌딩에 얽힌 흥미로운 이야기들도 들려주고 있습니다. 인도보다 먼저 차나무를 심었던 인도네시아의 차 산업(자와 섬의 차 즉 '데 자와'를 늘상 마시면서도, 인도네시아가 중요한 차 생산지라는 사실은 자주 잊곤 하죠.)과 러시아, 남미의 차 생산에 대한 이야기들이 재미있었습니다. 3부에서는 차를 가장 맛있게 즐길 수 있는 방법을 압축적으로 안내합니다.

 

국내에 이미 소개된 (홍)차 관련 책 몇 권과 비교해 보자면, 다루는 내용 면에서는 이소부치 다케시의 <홍차의 세계사, 그림으로 읽다>가 이 책과 가장 유사한 책이 아닐까 싶습니다.(같은 글항아리 출판사에서 나왔고, 책 크기도 똑같습니다.) <홍차의 세계사...>는 차 전반보다는 '홍차'에 방점이 찍혀서 차의 역사를 훑어보고 있고, 순서 또한 저자의 관심사에 따라 연대와는 상관없이 배열되어 있는 반면, <홍차 애호가의 보물상자>는 전체적인 구성이 좀 더 정돈되어 있으며 차 전반의 역사를 연대기순으로 차근차근 짚어 나간다는 차이가 있지만요.

차의 역사를 집중적으로 다룬 또 다른 책으로는 베아트리스 호헤네거의 <차의 세계사>와 비교할 수 있을 텐데, 호헤네거의 책이 좀 더 학술적이고 객관적인 관점에서 서술되어 있다면, 프랫의 책은 정서적이고 주관적인 시선이 꽤 많이 반영되어 있어서 약간 더 수월하게 읽을 수 있는 듯합니다.(글의 행간에서 풍겨 나오는 프랫의 독특한 유머 감각도 책을 흥미롭게 읽게 하는 요소 중 하나입니다.)

역자인 문기영 씨의 책 <홍차수업>과 비교해 보자면, 거칠게 말해 <홍차수업>은 이 책의 2부와 3부를 (홍차 중심으로) 집중적으로 더욱 파고들어 연구하고 소개한 책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프랫의 책이 '역사'에 방점을 찍었다면, <홍차수업>은 '실용'에 방점이 찍혀 있다고 할까요.

 

<홍차수업>도 그렇지만, <홍차 애호가의 보물상자>도 찾아보기가 무척 유용합니다. 특히 이 책은 찾아보기를 인명/지명/차 이름/제호 및 작품명/기타(브랜드명 포함)로 구분해 놓고 있어서, 사전처럼 관심 가는 항목의 페이지를 그때그때 찾아 읽어 볼 수 있습니다.(다만, 부정확한 오류가 간혹 눈에 띄고, 조지 오웰을 비롯해 빠진 이름들이 있다는 사실은 약간 아쉽습니다.)

 

아쉬운 점 몇 가지를 더 이야기하자면, 인용문의 정확한 출처가 없다는 것과 참고문헌이 없다는 점, 그리고 교열 오류가 상당수 있다는 점입니다. 이 책은 학술서가 아니니 출처를 표시한 주석이나 참고문헌 목록이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겠지만(아마도 원서에도 없었을 듯하지만), 책을 읽으면서 관심이 생긴 부분들을 더 찾아 보려고 자료들을 찾아 헤매다 보니 아쉬움이 커지더군요.

교열 오류를 보면, 오타와 띄어쓰기 오류뿐만 아니라, 서식스/서섹스, 브루크 본드/브룩 본드, 차에 관한 모든 것/차에 대한 모든 것 등 통일되지 않은 표기들이 있고, 이 책의 제목이 '홍차 애호가의 보물창고'(253쪽)로 나오기도 합니다. 결정적으로 235쪽과 236쪽 사이에는 문장이 빠진 부분도 있습니다.

"손님들을 자신이 소유한 해발 1800미터 고원의 차밭에 (데려가서는 멀리 발아래로 보이는 열대우림이 모두 자신의 다원인) 양 으스댔다." (출판사에 문의하니, 괄호 속의 문장이 빠졌다고 답해 주셨습니다.)

 

한 가지 더, 기존에 번역된 책들의 제목을 번역본 제목 대신 직역하여 소개한 점도 아쉽습니다. 예를 들어, 오카쿠라 덴신의 <차 이야기>는 <차에 관한 책>으로, 세라 로즈의 <초목전쟁>은 <모든 중국차에 대하여>로, 헨리 홉하우스의 <역사를 바꾼 씨앗 5가지>는 <변화의 씨앗: 인류를 바꾼 5가지 식물>로 번역되어 있는데, 중쇄가 나올 때 이 부분도 수정될 수 있다면 좋을 듯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