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리와 초콜릿 공장 (양장) - 로알드 달 베스트
로알드 달 지음, 퀸틴 블레이크 그림, 지혜연 옮김 / 시공주니어 / 2004년 2월
평점 :
품절


영국의 동화작가 로알드 달이 지은 <찰리와 초콜릿 공장>은 재미난 동화다.


초라하고 을씨년스러운 찰리네 판잣집 풍경과 죽도 못 먹은 것 같은 빼빼 마른 소년 찰리, 아흔이 넘어 ‘마른 자두처럼 쭈글쭈글해져’ 스물 네 시간 침대 신세를 지고 있는 조 할아버지 조세핀 할머니 조지 외할아버지 조지아나 외할머니, 이들을 부양하는 치약공장 노동자인 아버지 버켓 씨에 대한 묘사는 18세기 산업혁명 시대에 런던의 슬럼가를 연상케 한다. 그리고 가난 속에 위태롭게 둥지를 튼 어느 가정의 고단한 일상 속으로 읽는 이들을 데려간다.  우울한 동화적 판타지를 잘 그려내는 팀 버튼 감독이 눈독을 들일만 내용이다.


네 명의 할머니, 할아버지는 영양실조 직전의 손자 찰리에게 영양가 있는 초콜릿을 듬뿍 먹여보는 것이 유일한 소망이고, 찰리 역시 멀건 양배추국 대신 달콤한 초콜릿을 실컷 먹어보는 게 소원이다. 그러나 찰리는 일년에 딱 한번 오직 생일날에만 초콜릿을 맛볼 수 있다.


고통스러운 인생이 바닥을 칠 때, 그 비명이 우주에 메아리처럼 울리는 법, 그때서야 구세주가 기회라는 옷을 걸치고 나타난다. 가장 원하던 실체로 말이다. 추운 겨울이 찾아왔는데 찰리네 아빠는 실직을 하고 생활은 더욱 곤궁해져서 하루 세끼 먹는 것도 힘들어진다. 그러나 찰리네 가족에게도 희망이 찾아온다. 평생 동안 초콜릿을 공짜로 맘껏 먹을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 유난히 허기가 심하던 어느 날, 찰리가 운 좋게도 ‘제과업계의 귀재’ 윌리 웡카 사장이 전 세계에 보낸 5장의 황금초대장 중의 한 장을 손에 쥐게 된다.


상상력의 제조공장이라 할 수 있는 웡카 사장의 초콜릿 공장안으로 다섯 명의 꼬마와 그의 부모들이 들어간다. 초콜릿을 섞는 폭포, 사탕으로 만든 미나리아재비 정원을 지나 초콜릿 강을 건너 진귀한 신제품들을 구경한다.

그 와중에 중도하차하는 아이들이 생기는데, 하루종일 껌씹는 아이, 버릇없이 떼쓰는 아이, 텔레비전만 보는 아이, 식탐 많은 아이 등 찰리를 제외한 네 명의 꼬마가 윌리 웡카 씨의 장난스런 마법에 걸려 벌을 받는다.


영국과 미국에서는 이 동화가 어린이들의 필독서라는데, 이 대목 때문에 부모들이 앞 다투어 책을 사주는 것 같다. 그러나 이 책을 읽고 더욱더 초콜릿과 친해져 사달라고 조를 것이 뻔한 자녀들의 역습에는 어떻게 대처할지 의문이다.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과자 1순위 초콜릿을 더욱 맛있게 더욱 달콤하게 때로는 신비롭기까지 훌륭하게 그려냈는데, 어찌 초콜릿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으랴. 어른인 나도 책을 읽다 말고 슈퍼마켓으로 달려가 평소 입에도 안대는 초콜릿 하나를 큼직한 놈으로다가 사왔는데 말이다.


더욱 인상적인 것은 빼빼마른 찰리가 안쓰러운 웡카 사장이 초콜릿 강에서 진한 초콜릿 한 사발을 떠서 몸에 좋을 거라며 쭈욱 들이키라고 하는 장면이다. 중독성마저 있는 초콜릿이 졸지에 보약으로 둔갑한 것이다. 웡카 사장이 초콜릿을 많이 먹으면 이가 썩을 거라는 말 한마디 해주었더라면 지금의 부모들이 훨씬 덜 시달렸을 텐데 아쉽다.


그러나 정말 아쉬운 것은 동화 속에 버젓이 드러난 제국주의적 시각이다. 조 할아버지가 매일 들려주는 이야기 중의 한 대목. 윌리 웡카 사장의 놀라운 초콜릿 제조 솜씨를 부각하기 위해 선정된 우화는 ‘어리석은 인도 왕자’ 이야기다. 웡카 사장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초콜릿 으로 지은 궁전을 아까워하던 인도 왕자가 초콜릿 호수에 빠져 허우적거렸다는 것. 하고많은 나라 중에 하필이면 인도 왕자인가? 인도는 왕정국가도 아닌데 말이다. 바람둥이 찰스 황태자가 있는 자국 왕족을 거론하기 껄끄러운 일이라면, 이웃에 수두룩하게 입헌군주제를 유지하는 나라 중의 하나를 선택할 수 있을 텐데..


동쪽으로 벨기에 네덜란드 덴마크가 있고, 북쪽으로는 스웨덴, 노르웨이가 있고 남쪽으론 스페인이 있다. 같은 유럽이라 빗대기 뭐하면 멀리 동양에 일본이 있다. 그런데도 왜 하필이면 인도인가. 영국인에게 인도는 여전히 자국의 시인 한 명보다도 못한 나라인가 보다.


인도왕자 이야기는 애교로 봐주기로 하자. 작품 처음부터 끝날 때까지 등장하는 ‘움파룸파 사람들’에 비하면 조족지혈이니까.

직원을 가장한 산업 스파이가 진귀한 신제품의 기술을 자꾸 빼나가자 윌리 웡카 사장은 직원을 모두 해고한다. 한동안 문을 닫았다가 다시 가동하기 시작하는데, 외부인은 공장 출입금지다.


웡카 사장이 고용한 노동자는 움파룸파 부족 사람들이다. 열대 밀림에서 코알라 마냥 영양가 없는 유칼립투스 이파리를 뜯어 먹으며 굶주림에 시달리던 그들을 맛있는 카카오를 실컷 주기로 하고 데려왔다는 것. 그들은 키가 허리에도 못 미치게 작고 사슴가죽이나 나뭇잎으로 옷을 입기를 고집하며 초콜릿 강의 노를 젓거나 심부름을 하고 기계를 돌리고 심지어 신제품 개발할 때는 실험용으로 쓰인다. 그러나 그들은 웡카 사장이 보장하는 안정된 생활 속에서 달콤한 초콜릿을 보수로 받으며 대체로 만족하며 산다.  


팀 버튼의 영화에서는 이들이 더 끔찍하게 나온다. 움파룸파 족은 수백 수천 명이 모두 똑같은 얼굴이기 때문이다. 아시아, 아프리카, 혹은 남미 원주민을 연상케 하는 움파룸파 족에게 개성이나 인격이란 없는 것이다. 웡카 씨의 수족이 되어 마치 뇌가 없는 것처럼 기계처럼 움직이고, 실험도구로 쓰이며, 때로는 흥을 돋우는 예술단이 된다.


초콜릿은 치아건강만 위협하는 게 아니라 세계평화도 위협하는 과자다. 초콜릿 원료 중에 어느 한 가지라도 유럽에서 나오는 게 있는가. 유럽에서는 포장지만 뜯을 뿐 초콜릿의 주원료인 카카오 열매는 아프리카에서, 설탕의 재료인 사탕수수는 아시아와 남미에서 재배한다. 식민지로 부리던 시절엔 원주민의 노동력을 착취하며 빼앗아 왔고, 현재는 아주 싼 가격에 사온다. 원주민들은 이 같은 환금작물을 심느라 정작 자신들이 먹고 살아야 할 곡식, 즉 식량을 재배할 여력이 없다.


선진국 국민의 기호에 따라 생존에 위협을 받는 일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폭발적인 선진국민의 휴대폰 수요를 충당하기 위해 아프리카에서는 전쟁이 일어난다. 콜탄은 휴대폰 배터리를 만드는데 꼭 필요한 광물이다. 정치가 불안한 아프리카 여러 나라에서 콜탄 광산을 두고 벌어지는 군벌들 간의 총질로 무고한 양민이 희생되는가 하면, 야생 동물의 서식지가 파괴되기도 한다.


마지막 장면은 판타지 동화의 결말답게 해피앤딩이다. 웡카 씨는 초콜릿 공장의 후계자로 찰리를 점찍고, 어느 방향이든 이동이 자유로운 유리 엘리베이터에 가족을 모두 태워 공장으로 데려온다. 가족 모두가 경제적으로 신분이 상승하는 판타지가 실현된다.


웡카 씨의 후계 작업 재미있다. 공장이 문을 닫아서는 안 되는 여러 가지 이유 중에 ‘움파룸파 족 을 위해서’도 있다. 그렇다면 웡카 사장은 움파룸파 족에게 공장을 물려줄 생각은 왜 하지 않는 것일까? 생판 모르는 낯선 꼬마보다 헌신적으로 회사를 살린 움파룸파 족이 심정적으로 더 가깝지 않은가. 그러나 서양인에게 유색인종은 무뇌적 존재일 뿐이다. 찰리의 초콜릿에서는 너무나 불건전한 제국주의 냄새가 난다.


어릴 적 한창 빠져 읽던 동화책 한 권이 있었다. 연녹색 눈동자 세라 크루가 나오는 <소공녀>. 세라 크루의 아버지 크루 대위는 다이아몬드 광산에 투자했다가 쫄딱 망하고 죽어 어린 세라는 하루아침에 구박덩어리가 된다. 고난에 찬 일상을 잘 이겨나가다가 어느 날 공상이 현실이 되는 이야기. 밤에도 이 책을 꼭 껴안고 잠이 들었다. 꿈에서라도 세라 크루를 만나는 게 소원이었다. 어린 세라처럼 어렸던 나는 군인이 왜 광산업을 하는지 의문을 갖지 못했다.


지금 <찰리와 초콜릿 공장>을 읽는 아이들도 움파룸파 족의 존재에 대해서 의아해하지 않을 것이다. 연녹색 눈동자 소녀 세라의 환상 세계가 더 매력적인 것처럼, 마법으로 만든 진귀한 초콜릿에 더 정신이 빼앗겨 있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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