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주드 -상
토머스 하디 지음 / 영풍문고 / 1997년 10월
평점 :
절판


타이타닉을 보고 나 또한 여주인공 윈슬렛에게 반해 그녀의 출연작을 찾아 비디오 가게를 헤메다가 그녀가 출연한 <주드>라는 비디오를 발견했다.당장 빌려보고 싶었지만 '원작:토마스 하디'란 말을 보고는 우선은 서점으로 갔다(원작은 영화보기 전 꼭 읽는것이 습관이다).토머스 하디.중학교때 테스를 읽고 별로라고 생각했던 터라 썩 내키진 않았지만 오직 윈슬렛이 보고 싶었기에,구석에 잘 보이지도 않게 꽂혀있는 <비운의 주드>를 샀다. 사실 이런 경우 너무 진부한 표현이긴 하지만,'도저히 책을 놓을 수가 없었다' 두권을 정신없이 읽는 동안 내가 뭘 읽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을 만큼...

가난한 시골청년 주드는 학문에의 동경을 가득 안고 대학의 도시 크리스트민스터로 떠난다.그러나 주드의 기대와는 달리 도시는 이미 허울뿐인 권위와 위선으로 가득 차 이 시대엔 이미 어리석은 믿음이 되어버린 주드를 외면한다.주드의 사촌 여동생 수는 그의 열정과 절망을 함께 나누고,둘은 사랑에 빠지지만 주드의 소심함과 사회의 굳어진 편견-그들은 사촌지간이다-에 실망한 수는 동료 교사 필로트슨과 결혼해버린다.그러나 원래 주드보다도 훨씬 적극적이고 자신에게 솔직한 천성의 수는 남편과의 안정된 생활속에서도 주드를 잊지 못해 다시 주드에게로 돌아간다.이 때가 그들의 유일했던 행복한 짧은 시간이었다.둘은 다른 지방으로 떠나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 하지만 ,너무 높은 편견의 벽에 부딪히고 만다.

내용을-이제 읽으실 분들을 위하여- 더 이야기하지 않겠다.읽고 나서 참 많은 감동을 받았고 많은 생각을 했다.그리고 100여년을 뛰어넘는 날카로운 하디의 혜안에 감탄하고 또 동의했다.작은 한 개인과 보이지 않는 은근한 다수의 편견의 대립을 사랑이라는 흔한 소재로 더할나위 없이 진실하게 투영해낸 이 작품에, 나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만점을 주고 싶다.지금은 21C -정보혁명은 벌써 옛날얘기이고,학자들은 평등한 사회의 도래와 제도붕괴를 예언한다.하지만 아주 오래전부터 있어온 인습의 벽은 결코 쉽게 사라지지 않고,'개인'의 평등이란 다른 무엇보다도 이루어지기 힘들다는 것은 하디는 알고 있었던 것일까?-난 결국 영화 <주드>를 보지 않았다.혹시나 원작을 제대로 옮기지 못했으면 어쩌지 하는 쓸데없는 노파심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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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키호테의 탈출 - 열화당미술문고 601
모리스 앙리 / 열화당 / 198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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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요새의 지식인들에겐 자기도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풍자가 일반화된 모양이다.자기의 이름 앙리Henri를 영어식 헨리Henry로 읽히기를 바랬다는 저자 역시 무의미한 풍자속에 파묻혀 스스로 만족하며 인생을 보낸 수많은 그러한 지식인들 중에 하나이리라.

그가 그린 그림들이 풍자하는 메세지는 지독히 기분나쁘게 그의 머릿속에서 스케치되어 태연히 독자에게 동의를 요구한다.우선 그 풍자의 대상이 불쾌감을 준다. 자기를 친 자동차의 창문에 자기 다리를 잘라 던져 깨뜨리고 죽어버리는 <복수>나,남편이 다시 살아나게 되어 눈물을 흘리는 유령여인,식인종 솥안에 들어가 자기의 국물 맛을 보는 탐험가,십자가를 지기가 힘든 나머지 짐꾼을 부르는 예수 등.....그의 풍자에는 반대의견이 허용되지 않은채 꽉 막혀 그것에 동의하지 않는 독자조차 풍자의 대상으로 몰아버리고 계속하여 저자 자신은 아는 사람만 파악할 수 있는 지적인 풍자들을 계속해 나간다.

풍자는 옛날부터 토론이나 고도 화술의 가지 중 하나로-곧 학문으로서- 대접받아 왔다.우리가 동화로 읽는 이솝 이야기도 사실은 그시대엔 풍자로서 만들어진 것이다.엣날처럼 말잘하고 잘 받아치는 사람이 지식인으로 흔히 여겨졌던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이미 그것은 학문의 하나였고 권위있는 경구들은 그후 수세기에 걸쳐 위대한 작가들이 인용함으로서 여전히 예술 장르 여기저기에 그 영향을 떨치고 있다.

그렇게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풍자들은 의미없는 독설이 아니었다.그들의 풍자에는 다음이 있었다.불만을 말한후에는 그 대안책을 제시해야 하는 것처럼 풍자도 마찬가지이고,그대로 끝나버린다면 그것은 우스운 넋두리에 불과하다. 아쉽게도 대대로 이어질 경구가 되보려 이 책을 썼을 작가의 노력은 쓸데없는 자기 자랑하기로 끝나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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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을 훔친 사람들
프랑수아 봉 지음, 프랑수아 플라스 그림 / 예문 / 199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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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에는 왜 시인을 위대하다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상식을 무시하는 관념들, 그저 몇 줄 되지도 않는 짧은 시 몇 편으로 세월을 거슬러 영원히 칭송받는 그들을 지독히 질투했다. '저런 건 나도 쓸수 있어'라고 마음속으로 되뇌이고 또 상처받으면서. 그런 시를 이해하게 되고 조금씩 가슴으로 받아들이게 된 건 고등학교 때, 랭보의 시를 처음 접하고 나서였다. '열 일곱 나이엔, 진지하지 않은 법!'이라는 대담한 문구를 읊으며 차디찬 거리를 헤메였을 그의 영혼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게 되면서. 꽤나 책도 많이 읽고 글을 써서 상도 많이 받으며 스스로를 문학적이라 자부하고 있던 나는--나의 미숙한 몽상이 얼마난 순수한 아름다음과는 멀리 있었던 것인지--깨닫고 몹시 부끄러웠다. 그날 밤은 그의 시집을 꼬옥 손에 쥔? 채 랭보에게 용서를 빌었던 기억이 난다.

그 뒤로 많은 시인들이 나와 친구가 되었다. 빅토르 위고의 진지한 고민을 함께 사색했고, 푸쉬킨과 아폴리네르의 그저 한없이 흘러가는 펜놀림에 동화되어 나의 기운마져 같이 흘려보냈다. 그리고 셰익스피어의 소네트를 하나씩 외워가며, 거대하지만 좀처럼 느낄수는 없게 대기에 녹아들어 우리를 감싸고 있는 그들의 순수한 영혼을 조금은 붙잡아 볼 수 있었다. 문학은 학문이 되어 대학에서도 '해석'을 하며 학위를 주지만,시가 그대로 예술로써 남아있는 것은 그것이 영혼과 같은 의미의 단어이기 때문이 아닐까? 시인들은 그 영혼을 종이위에 불러 내었고, 그 후로도 수백 년간 그 향기는 변함없이 진하다. 이제는 우리가 그 향기를 가꾸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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