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경제 상식사전
양재봉 지음 / 길벗 / 2010년 1월
평점 :
절판


정말 쓸모없는 책.. 인터넷 글 짜집기 수준이다. 이딴 책이 13,000원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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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못 다한 인터넷 이야기 - 대한민국과 전세계의 인터넷 이야기 A에서 Z까지
김태규 지음 / 성안당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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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주제가 너무 가볍고
인용하는 예시도 한없이 한정적이다.

가령 국내의 포털 사이트를 예로 들어서 설명할 땐
네이버만을 주구장창 거론하고
해외의 검색 사이트를 예로 들어서 설명할 땐
구글만을 주구장창 거론한다.
국내 UCC 사이트를 언급할 땐 국내에서는 판도라TV만 주구장창 설명한다.

그나마 네이버를 바라보는 저자의 시각에는
비판적인 부분이 약간은 존재하지만
판도라TV를 거론할 땐 그야말로 닥치고 찬양이다.
이쯤 되면 뭔가 암묵적 거래가 있는 듯 보인다. 


판도라TV와 유튜브의 서비스 수준의 차이가
거대 벤처 캐피탈의 투자금의 유무이기 때문이라는 건
백번 이해한다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거의 테러 수준의
프리롤 광고를 옹호하는 듯한 뉘앙스는 이해하기 힘들다.
뿐만 아니라 해외 인기 서비스가 한국에서 실패한 원인을
한국인의 인종적 동질성으로 설명하려는 대목에선
그만 실소가 터져 나온다...

이정도 수준의 책은 인터넷에 널려 있다.
이 책의 메리트가 도대체 뭔지 알 수 없다.
책 표지의 저자 소개도 나름 센스있게 재밌게 표현하려 했던 것 같지만
오글오글 거릴 뿐이다. 예전에 정신 못차리고 놀았지만 이젠 정신차려서
옥스포드 경영대를 '우등'으로 졸업했네 뭐네 하는 구절에서는
도대체 뭘 어쩌라는 건가? 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그냥 금융 쪽을 전담하는 분이면 거기에만 충실했음 한다.
금융 관련 일을 하는 사람이 이야기하는 IT라서
업계 종사자들과는 달리 타성에 젖지 않는 새로운 시각을
볼 수 있으리라는 기대도 내심 있었는데 이건 도대체 뭔지 모르겠다.

참 깊이 없는 책..
그러나 한편으로는 나름 긍정적으로 보았던 것은
이 정도 수준의 책도 출판사를 통해 발행되는 걸 보면
우리나라의 출판업계의 장벽이 매우 낮아진 것 같아서
출판업계의 대중화에 대한 희망적인 면모를 본 것 같아 뿌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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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수아비춤
조정래 지음 / 문학의문학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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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소설은 너무나 실망스럽다.
(노파심에 먼저 말해두고 싶은 건,  
내가 이 소설에 실망한 이유는
소설이 전해주는 메시지 자체에 대한 반감 때문은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이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바에 대해선 절대 공감한다.
"재벌 권력 타파, 시민운동 활성화"라는 말에
반대를 할 사람이 우리나라에 과연 얼마나 존재할까?
재벌 그룹 당사자들을 제외하곤 자신들이 우파,
나아가 극우라고 자처하는 이들까지도 이 주장에 대한 반대는
대놓고 나 돌대가리요, 하고 커밍아웃하는 꼴이기 때문에
겉으로라도 결코 대놓고 반대를 하지는 못할 것이며, 그러지도 않는다.
(우리나라의 자칭 우파들이 아무리 수준이 낮다고 해도 그정도까지 바보는 아니다.)
 

그렇기에 이 소설은 실망스럽다.
바로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고,
그 명확한 메시지를 소설적 기법으로 전달하고자
노력한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조금 심하게 얘기를 하자면,
조정래라는 작가의 네임밸류가 없었다면
애초에 이 책은 이렇게 주목받지도,
이렇게 때깔 좋게 출간되지도 못했을 것이다.
 

 

조정래의 책 중 가장 인상 깊게 읽었던 [한강]이 [태백산맥] [아리랑]과 더불어
한국 문학사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이유는 작가적 역량이라는
문학적 잣대만으로는 논할 수 없는 '역사'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는 한국 근현대사의 역사라는 문자 자체의 의미 뿐만이 아니라,
 엄청난 분량의 장편 소설을 연재하면서도 처음부터 끝까지
수백 명의 등장인물 속에서 겹치는 인물 특징이 하나도 없이
캐릭터 고유의 아이덴티티를 쭉 유지하는
작품 자체의 '연속성, 일관성'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래서일까. 장편 소설이긴 하나 한 권에 그치는
이 작품에서 작가가 보여주는 모습은 실망스럽기 그지 없다.
(나는 이 책이 한 권 짜리가 아니라 최소 5권 정도의 책이었다면
약간은 결과물이 달라졌을 수도 있었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

조정래는 재벌 권력에 대해 할 말이 너무 많았고,
그 말들을 마음 속에 있는 울분과 맺힘을 주체하지 못한 나머지
자신의 생각을 소설 속 인물이나 사건의 전개를 통해서가 아니라
황당하게도 사설에서나 볼 수 있는 서술형의 문체로 소설 내에서 설파한다.
 

이로 인해 소설의 흐름은 뚝뚝 끊길 수밖에 없으며,
작가가 (인물이나 사건을 통해서가 아닌)자신이 직접적으로 토해내고 있는
메시지 자체도 너무나 식상하고 고리타분한 이야기 뿐이다.
소설의 형식을 파괴하면서까지 그가 두 눈을 마주보고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이
고작 '국민들은 노예이니라.' '재벌들은 정신을 못차렸노라' '시민단체를 후원하자'
같은 것들이니 어째 김 빠지는 일이고, 작가에 대한 기대감에 비해 맥이 풀리는 느낌이다.

뿐만 아니라, 조정래 소설의 최고 강점이라고 생각하는
역동적인 캐릭터를 이 소설에서는 도통 찾아볼 수가 없다.
(10권이 넘어가는 장편소설이기에 가능한 일이었겠지만)
언제나 내게 조정래의 소설이 흥미롭게 다가왔던 이유는  
결코 우리 사회의 어느 한 곳만 집중적으로 조명하는 것이 아닌,
우리 사회의 폭넓은 군상들을 다양한 등장인물을 통해서 바라보았다는 점 때문이었는데,
소위 상위 1%라고 불리우는 대기업 회장과 임원들만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이 소설에서는 전작들에서는 느낄 수 있었던 생동감이 결여되어 있다.
(한 권 짜리 소설에서 어떻게 열 권 짜리 소설만이 보여줄 수 있는 모습을 기대하겠나만은
이는 단순히 분량의 문제나 등장인물의 많고 적음의 문제가 아니다.
많지 않은 등장인물로도 충분히 다양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그들의 세계'를 보여주는 데 몰두한 나머지 이도 저도 아닌 것이 되어버렸다)

 

결정적으로 너무나 실망스러워서 입이 벌어졌던 건
작가의 단순 비교와 해결 방안이다.

작가가 이 소설 속에서 주장하는 최고의 투쟁방법은 '불매 운동'이다.
작품을 읽어보면 주장을 넘어서서 아예 하나의 신앙처럼 신성시함을 느낄 수 있다.
지금껏 불매 운동에 굴복하지 아니한 기업들은 없고, 불매 운동은 최고의 방법이란다.
하지만, 사회는, 특히 자본주의 사회는 그렇게 간단한 매커니즘으로 돌아가지는 않는다.
불매를 하게 되면 악덕 재벌 기업들에게 직접적인 피해가 갈 것이다...?
이건 이제 막 사회를 바라보기 시작한 중,고등학생이나 철없는 20대나 할만한 생각이다.
제품 불매를 통해 가장 직접적인 타격을 받는 사람들은 이 책에 나오는
기업 회장이나 임원이 아니라 대기업 밑에 종속되어 있는 하청기업, 즉 우리들이다.
무조건 불매 운동을 하면 재벌 구조를 타파할 수 있을까...? 


...... 그냥 웃자. 
 

또한 한국의 시민 단체들을 선진국의 시민 단체들과 비교하는 대목은
사실 조금 부끄럽고 낯 뜨거운 부분이다.
'아 우리가 이 정도밖에 안 됐다니'하는 참회와 성찰의 부끄러움이 아니라,
어째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대작가님께서 이같은 단순한 비교를 통해서
일차원적인 결론을 이끌어내고 있을까 하는 점이었으며,
이러한 의미 없는 단순 비교에도 불구하고 '아.. 이건 조정래님이 쓰셨으니까'
하면서 고개를 끄덕일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얼굴이 화끈 거렸다.
외국의 시민 단체와 우리나라의 시민 단체의 숫자를 단순 비교하며 비판하는 것은
그 사항에 얼키고 설킨 수많은 다른 부분들을
깡그리 무시하는 환원적 입장이 아닐 수가 없으며,
무조건적으로 시민 단체를 늘려야 한다는 발상은
각 나라의 특수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주장이다.

시민단체를 늘리고 불매운동을 하면 선진국이 되고 삼성 공화국이 무너지는가?
정말 낮은 수준의 문제 의식과 해결 방안이 아닌가.
이것이 정말 [아리랑]과 [태백산맥] [한강]과 같은 역작을 집필한
조정래 작가의 문제 의식과 주장이 맞는 건지 의심이 들 정도이다.

시민단체는 물론 성숙한 민주주의로 나아가는 데 중요한 디딤돌이고,
불매운동 역시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비자들의 의사를 표현하는
효과적인 방법 중 하나이지만 결코 이것이 민주주의의 만병통치약은 아니다.

아니 애초에 사회에서 만병통치약이란 개념은 있을 수가 없다.
당연하지 않은가? 둘만 이야기해도 생각하는 게 다른 것이 인간일 진데
어떻게 5천 만 사람의 고민과 고통과 현실을 타파할 수 있는 것이 있을 수 있을까?
사실 이러한 생각은 조금만 차분하게 생각해보면
누구나 알 수 있는 너무나 기본적인 것들이기 때문에,
나는 작가가 정말 진심으로 이러한 만병통치약 개념을 소설에 쓴 건지,
아니면 단순히 소설 속 메시지를 좀 더 명료하게 제시하기 위해서
일부러 하나의 장치로서 사용을 한 건지 아직도 모르겠다. 

이 정도 수준을 바탕으로 독자를 향해 노예 운운하니
어찌 낯 뜨거운 일이 아닐 수 있을까.
 

 

이 책은 한마디로 너무 고리타분하다.
조정래가 소설 속에서 그리고 있는 '그들의 모습'은
이미 인터넷과 같은 매체들을 통해 많은 정보를 알고 있는
대중들이 놀랄만한 충격적인 모습들도 아니고,
피를 토해가며 웅변하고 있는 작품 속의 메시지 자체도 새롭지 못하다.
이미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을 대작가가 이야기한다고 해서
권위가 부여된다거나 특별해지는 것은 아니다.

조금 더 대단한 것을 기대하고,
조금 더 새로운 것을 기대하고,
조금 더 훌륭한 것을 기대했던 이유는 역시 작가의 이름 때문이다.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한 나를 탓해야 할 지어다.

그는 이 책을 통해, 자신의 글을 통해
이 글을 읽고 있는 대중들이 자발적으로 움직이기를 원했겠지만,
이런 허술한 방식으로 일어날만큼 대중들이 단순하지는 않다.
조정래는 이 소설 속에서 국민들이 노예라고 줄기차게 말하고 있지만,
그 노예들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을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귀차니즘과 돈과 권력, 출세라는
목적보다 더 위에 놓여질 어떤 '가치'가 지금은 전무하기 때문이다.

전지적 작가 시점을 소설 속 등장인물을 향해서가 아닌
글을 읽고 있는 독자들을 향해 있었던 것.
그것이 이 소설이 고리타분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한 가지 알아둬야 할 건, 항상 선거 때만 되면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는
국개론에 대해서는 넷상에서 격렬한 찬반 양론이 일어남에도 불구하고,
조정래가 이 소설에서 말하는 국민 노예론에 대해서는 최소한 아직까지는
(오히려 국개론 보다도 주장하는 근거가 더욱 더 뻔하고 설득력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논란도 벌어지지 않는 이유는 조정래라는 이름이 가진 무게감 때문이다.
덧붙여, 이런 신랄한 비판 아니 비난 역시도 너무나도 고리타분한 문제 제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암묵적 동조도 이번 뿐일지도 모른다.
계속해서 작가의 위치와 네임밸류를 앞세워 자신의 주장을 빈약한 근거를 바탕으로
일방적으로 주입시키고, 독자 위에 전지적인 신으로 군림하고자 한다면
대중들은 그 이름의 가치와 무게감에도 불구하고 외면할 것이다.

이 세상에 어떤 누가 타인을 향해 계급적인 분류를 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단 말인가.
그런 건방지고 오만한 태도는 행여 남보다 더 의식의 깨어있음이나 생각의 깊이가
넓고 깊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버려야 하는 역겨운 우월의식이자 일종의 지적 폭력이다.
작품 내내 재벌의 절대 권력을 지양하고 비판하는 작가 자신 조차도
'언어'를 통해 노예 운운하며 타자에게 일방적인 권력을 휘두르는 걸 보면
인간이란 알다가도 모를 동물인 것만은 확실하다. 

그저 이러한 대작가가 아직도 이렇게 우리 사회에
많은 관심을 가져주고 있으니 무조건 고맙고 감사하다, 라고 생각하기에는,
이 정도 수준의 소설에도 불구하고 대작가이기 때문에 무조건 신봉하고
찬양 일색의 반응을 보일만큼 우리는 그렇게 어리석지 않으며,
이 정도 수준의 소설에 아무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닥치고 찬양을 보내 주기에는 우리 문학계의 수준이
아직까지는 그렇게 절망적이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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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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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라는 네임 밸류가 없었다면 태어날 수 없었던 소설. 그래서 감사하고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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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5
조지 오웰 지음, 김기혁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2월
평점 :
절판


 

 

'고전'을 언급하는 것만큼 무의미한 일이 또 있을까.

 
고전의 의미는 '작품성'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고전의 진짜 속뜻은 절대 다수의 사람들이 '생각의 합의'를 본 작품이다.
비록 그 사람들 중에서 나의 의견은 포함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큰 상관은 없다.
나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나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영향력 있는 사람들의 말이기 때문에
고작 나의 의견 따위는 고전에 대한 어떠한 영향력도 끼칠 수 없기에.
뭐 그런 것들을 우리는 흔히들 '고전'이나 '명작'이라는 고상한 단어로 품위있게 표현한다.

 
그래서 나는 '고전'이니 '명작'이니 꼽히는 책들에 대한 언급은 별로 하고 싶지 않다.
'나는 조금 생각이 다른데...' 라고 말해봤자 소리없는 공염불에 불과할 뿐이고,
'이 책을 읽었다'라고 말하는 순간 여지껏 그걸 이제야 읽었어? 라는 말만 돌아올 뿐이다.
 

하지만 이 책, 조지 오웰의 [1984]는 조금 예외다.
물론, 여전히 '이 유명한 고전을 지금 읽다니...'와 같은
소에는 솔직히 얼굴이 좀 후끈거리긴 하겠지만,
그럼에도 내가 이 책을 언급하고 싶은 이유는,
'고전'이니 '명작'이니 하는 바운더리에 묶여 있는 통에
많은 사람들이 그저 이 작품을 의무감으로 접하거나,
혹은 '고전' '명작'이 풍기고 있는 아우라 덕택에
괜히 작품에 대한 거리감 때문에 접하기를 꺼려하는 사람들이 안타깝기 때문이다.

 
그렇다. 정말 안타깝다.
이 작품은 '고전'이기에 더욱 평가절하당하는 소설이다.
'고전'이 갖추어야 할 필수 조건이 '작품의 나이'인 덕택에
이 소설이 한참 지난 과거의 이야기를 하겠지라는 지레 짐작으로 인해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의 삶과 괴리감이 느껴지는 듯 보이는 것도 안타깝고,
50년도 더 된 과거의 작품이 여전히 사회를 반영하고 있는 거울이라는 점도 안타깝다.
비록 우리는 이제 빅 브라더의 존재를 '자각'할 능력은 일부 갖추고 있지만,
여전히 우리 위에서 빅 브라더로 군림하려고 하는 이들의 존재마저 없앨 수는 없다.

 
여전히 빅 브라더를 꿈꾸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국가......
이것이 이 작품이 고전으로 존재해선 안 되는 진짜 이유다.   

 

이 소설에 대한 찬사의 대부분은 소설의 '메시지'에 치중되어 있지만,
소설이라는 이야기적인 재미의 측면으로 봤을 때도 충분히 훌륭한 작품이다.
물론 여느 소설들과는 달리 '메시지'와 '이야기'는 서로를 따로 생각할 수 없을만큼
절묘하게 어우러져서 이야기의 재미니, 메시지니 구분하는 게 별 의미없는 짓이긴 하지만
이 소설은 결코 메시지에 잠식 당해 이야기를 놓쳐버리는 아마추어리즘은 느낄 수 없다.
(사실 이건 좀 말이 안 되는 이야기다.. 조지 오웰에게 아마추어리즘을 논하다니..-_-;)

 
특히나 이 작품은 숨통을 조여오는 상황 전개가 일품이다.
 

내용을 임의적으로 나눠 본다면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1부는 윈스턴의 직장등 주인공을 중심으로한 주변의 상황 묘사가 주를 이룬다.
조지 오웰이 구축해놓은 '빅 브라더의 세계'는 굉장히 치밀해서
조금은 경직된 설명조의 문체가 주를 이루고 있음에도 지루해할 틈을 주지 않는다.
(이것은 비단 조지 오웰의 글빨이 뛰어나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우린 윈스턴이 처한 그 상황이 무엇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그것이 미디어를 통해 접한 간접 경험이든, 혹은 그 시대를 몸소 체험한 직접 경험이든.)
 

2부는 빅 브라더의 세계에서조차도 억압할 수 없는 '사랑''혁명 단체'에 관한 이야기다.
인간의 감정 그 자체를 통제하려 한 당은 과거의 실패를 교훈삼아
실제로 (무산계급을 제외한)당원들의 정신을 지배하는 데 성공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도 인간인 이상 그 획일적인 세계에서도 '사랑'이란 감정은 피어났고,
그 무시무시한 철권 통치의 세계에서도 혁명을 꿈꾸는 이들은 존재했다.
줄리아를 만나며 중년의 윈스턴은 처음으로 사랑의 감정을 느끼고,
오브라이언이 수장으로 있는 '형제단'을 통해 윈스턴은 사회의 혁명을 꿈꾼다.
(물론 이 소설은 사랑이야기가 나온다고 해서 구질구질한 연애담으로 이어지는
통속적인 소설은 결코 아니다. 기억하라. 작가는 조지오웰이고, 소설은 [1984]임을..)   

 

3부는 혁명 음모를 꾸민 사상죄로 구속된 윈스턴의 모습을 그린다.
이 소설의 하이라이트이자 이 소설에서 가장 보기 힘겨운 부분이다.
이전까지의 내용만으로도 이 소설은 충분히 훌륭하지만,
[1984]가 아직까지도 명저로 남아있는 이유는
바로 이 3부에 해당하는 내용이 있었기 때문이리라.
특히나 후반부에 나오는 윈스턴과 오브라이언의 대화가 전해주는 임팩트는 상당하다.
사상죄라는 이데올로기로 시작해서 인간 본연의 존재에 대한 철학적 물음으로 끝을 맺는
이 부분을 읽고 가슴 떨림을 경험하지 않을 사람이 과연 있을까.
그리고... 소설의 마지막 문장은 그 어떤 소설보다도 강렬한 여운을 주며 끝을 맺는다.
 
 

고전은 많은 이들이 감동했고 공감했기 때문에 고전으로 존재할 수 있다.
고전은 많은 이들이 감동하지 못하고 공감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고전으로 존재할 수 있다.

 
기가 막힌 아이러니... 

 
이미 수많은 인사들에 의해 고전의 반열에 오른 뒤에는
고작 나 하나 따위가 그 작품에 대해 그들과 같은 느낌을 전혀 받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그 작품이 가지고 있는 철옹성같은 업적에 대해 흠집 하나 낼 수 없는 게 사실이다.
그래서 우리는 고전 앞에서 솔직해지지 못한다. 아니 솔직해 질 수 없다.
나의 개인적인 의견은 고전을 평가함에 있어서 일말의 영향력도 끼치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그것 하나도 공감하지 못하는' 무식한 지성에 대해 조소와 멸시를 받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고전을 더더욱 꺼리게 된다.
하지만 고전에 관한 이러한 패러독스의 공식에 해당하지 않는
몇 안 되는 돌연변이 중 하나를 꼽으라고 한다면 나는 주저없이 이 작품을 꼽고 싶다.

 
그 이유는, 거의 박물관의 유품처럼 딱딱해져버린 이미지가
연상되는 고전이란 범주에 이 작품을 넣어 버리기에는
작품이 가지고 있는 '재미'라는 생명력이 아직까지도 생생하기 때문이고,
고전이란 경계에 갖혀서 이 작품에 대한 더 이상의 새로운 해석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기에는 우리 사회가 아직까지도 덜 진보되었기 때문이며,
빅 브라더를 꿈꾸는 자들이 여전히 건재한 이 사회에서 우리가
이 작품을 고전이란 이름 아래 박제시키는 건 너무나 어리석은 일이기 때문이다.

 
'고전'이란 이름으로 이 작품의 확장된 재해석과 감상을 막는 이들이야말로
어쩌면 빅 브라더의 또 다른 이름일지도 모른다........ 는 엉뚱한 상상을
나는 이 책을 읽은 늦여름의 어느날 밤에 문득 생각했다.

 

열심히 읽고 
뜨겁게 느끼고
치열하게 생각하자.

  

이 작품이 벌써 고전이 되어버리기에는
아직까지 우리 가슴은 너무나 뜨겁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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