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수아비춤
조정래 지음 / 문학의문학 / 2010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소설은 너무나 실망스럽다.
(노파심에 먼저 말해두고 싶은 건,  
내가 이 소설에 실망한 이유는
소설이 전해주는 메시지 자체에 대한 반감 때문은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이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바에 대해선 절대 공감한다.
"재벌 권력 타파, 시민운동 활성화"라는 말에
반대를 할 사람이 우리나라에 과연 얼마나 존재할까?
재벌 그룹 당사자들을 제외하곤 자신들이 우파,
나아가 극우라고 자처하는 이들까지도 이 주장에 대한 반대는
대놓고 나 돌대가리요, 하고 커밍아웃하는 꼴이기 때문에
겉으로라도 결코 대놓고 반대를 하지는 못할 것이며, 그러지도 않는다.
(우리나라의 자칭 우파들이 아무리 수준이 낮다고 해도 그정도까지 바보는 아니다.)
 

그렇기에 이 소설은 실망스럽다.
바로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고,
그 명확한 메시지를 소설적 기법으로 전달하고자
노력한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조금 심하게 얘기를 하자면,
조정래라는 작가의 네임밸류가 없었다면
애초에 이 책은 이렇게 주목받지도,
이렇게 때깔 좋게 출간되지도 못했을 것이다.
 

 

조정래의 책 중 가장 인상 깊게 읽었던 [한강]이 [태백산맥] [아리랑]과 더불어
한국 문학사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이유는 작가적 역량이라는
문학적 잣대만으로는 논할 수 없는 '역사'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는 한국 근현대사의 역사라는 문자 자체의 의미 뿐만이 아니라,
 엄청난 분량의 장편 소설을 연재하면서도 처음부터 끝까지
수백 명의 등장인물 속에서 겹치는 인물 특징이 하나도 없이
캐릭터 고유의 아이덴티티를 쭉 유지하는
작품 자체의 '연속성, 일관성'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래서일까. 장편 소설이긴 하나 한 권에 그치는
이 작품에서 작가가 보여주는 모습은 실망스럽기 그지 없다.
(나는 이 책이 한 권 짜리가 아니라 최소 5권 정도의 책이었다면
약간은 결과물이 달라졌을 수도 있었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

조정래는 재벌 권력에 대해 할 말이 너무 많았고,
그 말들을 마음 속에 있는 울분과 맺힘을 주체하지 못한 나머지
자신의 생각을 소설 속 인물이나 사건의 전개를 통해서가 아니라
황당하게도 사설에서나 볼 수 있는 서술형의 문체로 소설 내에서 설파한다.
 

이로 인해 소설의 흐름은 뚝뚝 끊길 수밖에 없으며,
작가가 (인물이나 사건을 통해서가 아닌)자신이 직접적으로 토해내고 있는
메시지 자체도 너무나 식상하고 고리타분한 이야기 뿐이다.
소설의 형식을 파괴하면서까지 그가 두 눈을 마주보고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이
고작 '국민들은 노예이니라.' '재벌들은 정신을 못차렸노라' '시민단체를 후원하자'
같은 것들이니 어째 김 빠지는 일이고, 작가에 대한 기대감에 비해 맥이 풀리는 느낌이다.

뿐만 아니라, 조정래 소설의 최고 강점이라고 생각하는
역동적인 캐릭터를 이 소설에서는 도통 찾아볼 수가 없다.
(10권이 넘어가는 장편소설이기에 가능한 일이었겠지만)
언제나 내게 조정래의 소설이 흥미롭게 다가왔던 이유는  
결코 우리 사회의 어느 한 곳만 집중적으로 조명하는 것이 아닌,
우리 사회의 폭넓은 군상들을 다양한 등장인물을 통해서 바라보았다는 점 때문이었는데,
소위 상위 1%라고 불리우는 대기업 회장과 임원들만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이 소설에서는 전작들에서는 느낄 수 있었던 생동감이 결여되어 있다.
(한 권 짜리 소설에서 어떻게 열 권 짜리 소설만이 보여줄 수 있는 모습을 기대하겠나만은
이는 단순히 분량의 문제나 등장인물의 많고 적음의 문제가 아니다.
많지 않은 등장인물로도 충분히 다양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그들의 세계'를 보여주는 데 몰두한 나머지 이도 저도 아닌 것이 되어버렸다)

 

결정적으로 너무나 실망스러워서 입이 벌어졌던 건
작가의 단순 비교와 해결 방안이다.

작가가 이 소설 속에서 주장하는 최고의 투쟁방법은 '불매 운동'이다.
작품을 읽어보면 주장을 넘어서서 아예 하나의 신앙처럼 신성시함을 느낄 수 있다.
지금껏 불매 운동에 굴복하지 아니한 기업들은 없고, 불매 운동은 최고의 방법이란다.
하지만, 사회는, 특히 자본주의 사회는 그렇게 간단한 매커니즘으로 돌아가지는 않는다.
불매를 하게 되면 악덕 재벌 기업들에게 직접적인 피해가 갈 것이다...?
이건 이제 막 사회를 바라보기 시작한 중,고등학생이나 철없는 20대나 할만한 생각이다.
제품 불매를 통해 가장 직접적인 타격을 받는 사람들은 이 책에 나오는
기업 회장이나 임원이 아니라 대기업 밑에 종속되어 있는 하청기업, 즉 우리들이다.
무조건 불매 운동을 하면 재벌 구조를 타파할 수 있을까...? 


...... 그냥 웃자. 
 

또한 한국의 시민 단체들을 선진국의 시민 단체들과 비교하는 대목은
사실 조금 부끄럽고 낯 뜨거운 부분이다.
'아 우리가 이 정도밖에 안 됐다니'하는 참회와 성찰의 부끄러움이 아니라,
어째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대작가님께서 이같은 단순한 비교를 통해서
일차원적인 결론을 이끌어내고 있을까 하는 점이었으며,
이러한 의미 없는 단순 비교에도 불구하고 '아.. 이건 조정래님이 쓰셨으니까'
하면서 고개를 끄덕일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얼굴이 화끈 거렸다.
외국의 시민 단체와 우리나라의 시민 단체의 숫자를 단순 비교하며 비판하는 것은
그 사항에 얼키고 설킨 수많은 다른 부분들을
깡그리 무시하는 환원적 입장이 아닐 수가 없으며,
무조건적으로 시민 단체를 늘려야 한다는 발상은
각 나라의 특수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주장이다.

시민단체를 늘리고 불매운동을 하면 선진국이 되고 삼성 공화국이 무너지는가?
정말 낮은 수준의 문제 의식과 해결 방안이 아닌가.
이것이 정말 [아리랑]과 [태백산맥] [한강]과 같은 역작을 집필한
조정래 작가의 문제 의식과 주장이 맞는 건지 의심이 들 정도이다.

시민단체는 물론 성숙한 민주주의로 나아가는 데 중요한 디딤돌이고,
불매운동 역시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비자들의 의사를 표현하는
효과적인 방법 중 하나이지만 결코 이것이 민주주의의 만병통치약은 아니다.

아니 애초에 사회에서 만병통치약이란 개념은 있을 수가 없다.
당연하지 않은가? 둘만 이야기해도 생각하는 게 다른 것이 인간일 진데
어떻게 5천 만 사람의 고민과 고통과 현실을 타파할 수 있는 것이 있을 수 있을까?
사실 이러한 생각은 조금만 차분하게 생각해보면
누구나 알 수 있는 너무나 기본적인 것들이기 때문에,
나는 작가가 정말 진심으로 이러한 만병통치약 개념을 소설에 쓴 건지,
아니면 단순히 소설 속 메시지를 좀 더 명료하게 제시하기 위해서
일부러 하나의 장치로서 사용을 한 건지 아직도 모르겠다. 

이 정도 수준을 바탕으로 독자를 향해 노예 운운하니
어찌 낯 뜨거운 일이 아닐 수 있을까.
 

 

이 책은 한마디로 너무 고리타분하다.
조정래가 소설 속에서 그리고 있는 '그들의 모습'은
이미 인터넷과 같은 매체들을 통해 많은 정보를 알고 있는
대중들이 놀랄만한 충격적인 모습들도 아니고,
피를 토해가며 웅변하고 있는 작품 속의 메시지 자체도 새롭지 못하다.
이미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을 대작가가 이야기한다고 해서
권위가 부여된다거나 특별해지는 것은 아니다.

조금 더 대단한 것을 기대하고,
조금 더 새로운 것을 기대하고,
조금 더 훌륭한 것을 기대했던 이유는 역시 작가의 이름 때문이다.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한 나를 탓해야 할 지어다.

그는 이 책을 통해, 자신의 글을 통해
이 글을 읽고 있는 대중들이 자발적으로 움직이기를 원했겠지만,
이런 허술한 방식으로 일어날만큼 대중들이 단순하지는 않다.
조정래는 이 소설 속에서 국민들이 노예라고 줄기차게 말하고 있지만,
그 노예들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을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귀차니즘과 돈과 권력, 출세라는
목적보다 더 위에 놓여질 어떤 '가치'가 지금은 전무하기 때문이다.

전지적 작가 시점을 소설 속 등장인물을 향해서가 아닌
글을 읽고 있는 독자들을 향해 있었던 것.
그것이 이 소설이 고리타분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한 가지 알아둬야 할 건, 항상 선거 때만 되면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는
국개론에 대해서는 넷상에서 격렬한 찬반 양론이 일어남에도 불구하고,
조정래가 이 소설에서 말하는 국민 노예론에 대해서는 최소한 아직까지는
(오히려 국개론 보다도 주장하는 근거가 더욱 더 뻔하고 설득력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논란도 벌어지지 않는 이유는 조정래라는 이름이 가진 무게감 때문이다.
덧붙여, 이런 신랄한 비판 아니 비난 역시도 너무나도 고리타분한 문제 제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암묵적 동조도 이번 뿐일지도 모른다.
계속해서 작가의 위치와 네임밸류를 앞세워 자신의 주장을 빈약한 근거를 바탕으로
일방적으로 주입시키고, 독자 위에 전지적인 신으로 군림하고자 한다면
대중들은 그 이름의 가치와 무게감에도 불구하고 외면할 것이다.

이 세상에 어떤 누가 타인을 향해 계급적인 분류를 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단 말인가.
그런 건방지고 오만한 태도는 행여 남보다 더 의식의 깨어있음이나 생각의 깊이가
넓고 깊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버려야 하는 역겨운 우월의식이자 일종의 지적 폭력이다.
작품 내내 재벌의 절대 권력을 지양하고 비판하는 작가 자신 조차도
'언어'를 통해 노예 운운하며 타자에게 일방적인 권력을 휘두르는 걸 보면
인간이란 알다가도 모를 동물인 것만은 확실하다. 

그저 이러한 대작가가 아직도 이렇게 우리 사회에
많은 관심을 가져주고 있으니 무조건 고맙고 감사하다, 라고 생각하기에는,
이 정도 수준의 소설에도 불구하고 대작가이기 때문에 무조건 신봉하고
찬양 일색의 반응을 보일만큼 우리는 그렇게 어리석지 않으며,
이 정도 수준의 소설에 아무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닥치고 찬양을 보내 주기에는 우리 문학계의 수준이
아직까지는 그렇게 절망적이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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