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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정치의 겉과 속 - 한국 정치는 왜 늘 복마전인가?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9년 3월
평점 :
절판
-나는 이 책에 대한 리뷰를 내가 386세대에 대해 느끼고 있는 비판적 관점과 함께 접근하려 한다-
나는 강준만의 글을 참 좋아한다. 아니, 그를 존경한다는 표현이 더 적합할 것 같다. [인물과 사상]은 일명 '강준만 식 글쓰기'라는 신조어까지 나올 정도로 90년대 당시 지식인들 사이에서 커다란 파장과 논란을 불러 일으켰지만, 내가 접했던 그의 첫 번째 책은 [인물과 사상]이 아닌 [한국 현대사 산책]이었다.
[한국 현대사 산책]은 나에게 있어 그 어떤 교과서나 스승보다 더욱 많은 가르침을 주었다. 지금껏 단편적으로만 알고 있던 격동의 현대사에 일어났던 굵직굵직한 사건들을 연대순으로 체계적으로 정립하게 해 주었던 것과 동시에, 반공이데올로기 속에서 음지에서 목소리를 죽일 수밖에 없었던, 진실은 곧 반역이었던 그 암울한 시대의 수많은 '진실'을 알게 되었다.
조국의 변태적인 취향 덕분에 영원히 모를 수도 있었던 우리 사회의 어두운 면을 알 수 있게 해주었던 것이 이 책을 나에게 최고의 스승으로 만들어 준 이유였다면, 책 곳곳에 나와 있는 수많은 인용 저서들은 강준만이란 인물에 대해 존경심을 품게 해주기에 충분했다. 70~80년대 반독재 투쟁에 정신적인 버팀목이 되어 준 사람이 리영희라면, 2000년대에 대학을 들어간 우리 세대에게 386세대의 리영희 같은 존재는 강준만이 아닐까 생각한다. (영향력의 종류에는 차이가 있겠지만 진중권이나 우석훈, 장하준 같은 이들 역시 거기에 포함될 것이다)
[현대정치의 겉과 속]은 강준만의 최근작이다. 이 책에서 그는 한국의 현대 정치에 대해 살펴본다. 왜 그가 지금 이 시점에서 한국의 '정치'에 대해 이야기하는가.
20대들은 지금을 조급해한다. 이명박은 20대에게 쥐새끼, 독재자, 쓰레기로 통한다. 촛불집회에서 공권력을 사용한 진압은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인권탄압이며, 대운하, 아니 4대강 살리기와 민영화는 민주주의를 심각하게 위협하는 독재 행위이다. 지금의 20대는 명박산성이며 미국산 쇠고기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왜? 민주주의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위에 나열한 예는 절대적인 시각으로서 민주주의의 위협으로 볼 수 있는 부분도 분명히 있지만 지나치게 상황을 극단으로 몰고 가서 비약하는 20대들의 상대적인 시각이 개입된 부분도 존재한다. 그러나 이게 뭐 어쨌다는 것인가? 어느 것이 옳고 그르다고 할 수 있는가? 뒤에서도 이야기하겠지만 문제는 20대들의 민주주의를 향한 조급함이 아닌 과거의 독재정권에 비교하며 지금 20대들의 사회를 향한 목소리를 사회적 자폐아들의 마지막 발악이라고 생각하는 일부 기성세대와 386세대들의 시각처럼 시대착오적이고 역겨운 생각인 것이다.
우리가 현 정부의 행동에 화낼 수 있는 원동력이 '민주주의의 성숙'이라고 가정했을 때 우리가 지금 이렇게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을 느끼고 목소리를 낼 수 있기까지 그들이 이 사회에 끼쳤던 역할을 무시할 순 없겠지만, 최소한 민주주의가 성숙화 되는 과정에서(정확히 말하면 지난 10년 간) 기성세대, 특히 386세대들이 사회에 끼쳤던 해악은 결과적으로 봤을 때 권위주의 정부의 권력남용을 비난할 정도로 이타적이고 올바른 것은 결코 아니었다.
우리에게 민주주의는 과거처럼 '치명적'인 것이 아니었다. 타는 가슴속의 목마름의 기억으로, 떨리는 손, 떨리는 가슴, 치 떨리는 노여움으로 신 새벽 뒷골목에서, 남몰래 '민주주의여 만세'라고 속삭이는 가슴시린 짝사랑의 대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우리는 민주주의와 지난 10년 동안 소리 소문 없이 절름발이 사랑을 나눴다. 아니 사랑을 일방적으로 받았다.
내가 미처 너(민주주의)라는 존재를 의식적으로 자각하기 전부터, 너는 언제나 내 옆에서 일방적인 사랑을 주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우리는 너를 특별한 존재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2008년 네가 떠나가고 모든 것이 바뀌어버린(것 같이 느껴지는) 세상을 향해 우리는 시끄럽게 네게 돌아오라고 소리를 지르고 있다.
분명 20대의 현재 '독재 타도'라는 구호는 조금 멀리 떨어져서 바라보면 괴리감이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386세대는 혀를 끌끌 차며 우리들을 본다. 니들이 독재를 아냐면서. 20대를 '적'으로 놓고 현실에서는 착취할 대로 착취해놓고, 이럴 때만 그들은 여전히 낭만주의에 빠져 자신들의 반 독재투쟁을 무용담처럼 늘어놓는다.
물론 모든 386세대가 이런 건 결코 아니다. 내가 여기서 말하는 386세대는 학교 다닐 때 나름대로 '운동' 좀 했다고 거들먹거리고, 그 시절 당신의 모습을 자랑스레 늘어놓으면서 정작 자신은 자신이 그렇게 싫어하는 독재정권 덕택에 지금은 어디 가서 내밀기도 쪽팔리는 F학점으로도 대기업 간부직 자리에 있는, 지금 20대를 그저 취업에만 눈이 먼 사회적 자폐아로 취급하면서 정작 지들 자식들은 사교육에 유학으로 몰아넣는, 20대들이 '민주주의' 얘기만 할라치면 취업에 학점에 토익에 눈깔 돌아간 애들이 민주주의가 뭔지는 아냐면서 "그 때 우리는 니들과 달랐다"는 낭만주의에 빠져 허덕이는 일부 한심하기 짝이 없는 386세대들이다.
최소한 내가 아는 지식인 중에 유시민과 강준만은 저들 부류는 아니다. 유시민과 강준만이 비록 저들과 같은 '80년대 향수'를 간직하고 있을지는 모를지언정 권위주의 군부 독재 정부가 자신들에게 행했던 착취와 탄압을 사회 경제적인 측면에서 현 20대에게 그대로 행하고 있는 모순적이고 위선적인 부류는 아니라는 것이다. 이 둘은 최소한 '글'이라는 수단을 통해서 그들의 지식을 대중에게 제공하고 있다는 점에서 기성세대, 386세대의 역설적인 모습과는 분명 다른 길을 걷는다. 유시민의 [후불제 민주주의와] 강준만의 바로 이 책이 그들이 현재 아랫세대를 바라보는 시각의 적절한 예가 될 것이다.
강준만은 이 책에서 '우리'가 잃어버렸다고 생각하고 있는 '민주주의'를 조급한 시점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밖에서 봤을 때 한국의 시위, 파업은 놀랄 일이 아니다. 우리 또한 이런 일들을 겪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민주주의는 항상 실망스럽고 불완전하다는 것에 한국인들은 익숙하지 않은 듯하다"라는 기 소르망의 말을 빌어서 우리의 조급함에 경종을 울린다.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는 따지고 보면 이제 22살이다. 그런 우리나라가 이제는 백여 년이 넘는 유럽과 미국의 민주주의를 부러워한다. 사실 민주주의라는 것이 나이만 많다고 성숙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나이가 많아서 성숙하는 것이라면 왜 그렇게 프랑스와 북유럽의 선진국들에서는 아직까지도 파업이 일어나고 미국은 왜 이토록 끝없이 '민주주의의 가치'가 논란이 되겠는가?
물론 민주주의가 성숙하는 과정에서 시간이 하나의 지표가 될 수는 있을 것이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민주주의에 반하는 '문제점'이 자연스레 제기되고, 서로간의 갈등으로 인해 성숙되는 민주주의의 가치에서 시간이란 무시할 수 없는 요소임이 분명한 것이 사실이긴 하지만,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시간, 그것이 민주주의의 만병통치약이자 절대적인 기준은 아니라는 말이다.
워낙에 한국 현대사가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심한 굴곡을 겪었기에 한국인들의 체감 상 우리의 민주주의는 오래된 것 같은데 변한 것도 없고 벌써 위기가 찾아오는가. 라고 느끼는 게 아닌가 싶다.
강준만은 이 책에서 민주주의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한국 정치에 대해 조용하게 살펴본다. 그리고 그는 결코 우리의 단점(이라고 흔히 일컬어지는 문제)들에 대해 '단정'짓지 않는다. 가령 그는, "지도자 추종주의는 한국의 장점과 동시에 단점이다. 유능하고 강력한 지도자를 만나면 무서운 힘을 발휘할 수 있지만, 그로 인한 부족용도 크다. 국민 각자가 자기 몫을 할 생각은 안 하고 지도자에게 의존하려는 심리가 강해지기 때문이다. 이것이 지도자를 필요 이상으로 극찬하거나 매도하는 양극단의 성향이 드러나는 이유"라고 말을 한다.
그는 여기서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를 몇몇 특성으로 규정했는데, 그 중 하나인 '홍수 민주주의'에 대한 정의를 살펴보면 강준만의 이런 시각은 더욱 확연히 드러난다. 티핑포인트에 대한 개념을 설명하면서 "한국의 민주주의는 변화의 기운이 잠재된 채로 수면 하에 머무르지만 그 기운이 쌓이고 쌓여 어느 순간에 도달하면 일시에 폭발해 겉으로 분출하게 된"다고 말하면서,
"홍수 민주주의는 마지막 남은 카드인 셈이다. 그 부작용을 염려하기엔 그간 숨 죽이고 지내온 세월이 너무 길다. 아니 너무 길어 부작용이 있을 것 같지도 않다. 과연 어디에서부터 홍수가 터질 것인가?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때가 무르익은 것은 분명하다. 두고 보라. 반드시 홍수는 어디에선가 터지고야 말 것이다. 시간은 티핑포인트를 향해 질주하고 있다." 라고 한다.
그는 여기서 한국의 민주주의 발전을 '자연성'에 맞겨 두는듯한 뉘앙스를 풍긴다. 시간은 티핑포인트를 향해 질주하고 있고, 그 곳에서 홍수는 반드시 터질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우리가 두 손 놓고 있으면 언젠가는 홍수가 터져서 민주주의는 발전하게 될 것이니 가만 있으면 된다.' 라고 해석하는 것은 정말로 어리석은 생각이다.
우리가 티핑포인트를 향해 '질주'하고 있는 원동력에는 민주주의라는 녀석에 대한 끝없는 자각과 회의감, 모순의 발견, 그리고 그에 따른 우리의 직접적인 '행동들'에 있는 것이다. 촛불 집회와 같은 우리네들의 의견 표출은 홍수에 다다르게 하는 커다란 물줄기가 되고, 우리가 정치에 대해 느끼는 혐오감과 무관심을 뛰어넘어 (강준만이 지적하는 '반감의 쏠림'에 불과하다 하더라고) 투표장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티핑포인트를 향해 질주하는 속도에 박차를 가해주는 것이다.
강준만은 이 책에서 현 20대의 바이블 [88만원 세대]에서 우석훈이 말한 것처럼 '짱돌'을 집어 들고 연대파업 하라는 직접적인 선동의 길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민주주의는 한판 승부가 아니라며, 우리의 조급함을 질타한다. 대신 그는 민주주의 개념의 거시적인 측면에서 우리의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하면서 그렇게 천천히 그러나 갑자기 바뀔 수 있는 민주주의의 성숙에 대한 가능성을 제시한다. 누구의 시각이 맞는 것 인가. 이에 대한 '정답'은 결코 없다.
'한판 승부'라는 급진성은 곧 혁명이라는 '급진적 개혁의 극단적 수단'을 통해 표출된 바 있다. 프랑스와 러시아에서 말이다. 둘 다 결과적으로는 실패로 끝났지만 둘 다 세계를 바꾸어놓았다. 프랑스 혁명이 없었다면 지금 현재 전세계의 민주주의는 어쩌면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고, 만약에 존재한다고 해도 그저 형식적인 틀에 지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러시아 혁명에 대한 시각은 지금까지도 여러 견해들이 분분하지만 나는 러시아 혁명을 통한 '사회주의의 현실화'가 없었다면 현재 자본주의는 벌써 몰락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흔히 자본주의의 황금기라고 일컬어지는 전후시대~1960년대까지의 풍요로움이 발생하고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은 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 국가들의 혁신적인 '복지정책'을 참고하지 않았더라면 결코 있을 수 없는 것이었다.
이에 비해 '천천히 이루어지는 민주주의'의 사례는 역사 속에서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그러한 개념 자체가 현재진행형이고 혁명으로 대표되는 '한판승부'라는 개념보다 명확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천천히 성숙되는 민주주의를 배척하고 사위, 파업, 혁명과 같은 한판 뒤집기를 선택하자는 것은 결코 '옳은' 방법이 아닐 것이다. '민주주의'라고 불리는 체제를 지향하는 한 사회에서 민주주의라는 대의가 심각하게 위협받을 정도로 최악의 상황에 치닫는 조건에서라면 연대총파업이나 대규모 시위 등이 필요할 수도 있다. 아니 독단으로 빠지는 길을 막기 위해서라도 시민들의 이런 커다란 움직임은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결코 시위와 파업이라는 극단적인 의견 표출이 민주주의에서 '지속적인 울림'을 갖기란 쉽지 않다. 자극도 여러 번 받다 보면 무뎌지는 법이다. 한 사회의 정부가 민주주의를 역행하고 있다고 해서 시민들까지 한두 번 자극제로서의 역할이 아닌, 지속적으로 시위나 파업과 같은 민주주의의 변칙적인 수단을 끊임없이 사용하게 된다면 그것은 그 자체가 곧 민주주의의 몰락으로 나아가는 지름길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때 필요한 것이 천천히 그러나 꾸준한 민주주의에 대한 발전이다.
한판 승부는 체제나 이념을 떠나서 볼셰비키 혁명처럼 꾸준한 '피끓는 원동력'을 지니고 있지 않는다면 몰락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역사상 가장 커다란 영향력을 끼쳤던 프랑스 혁명 역시 자의건 타의건 결국 나폴레옹의 왕정 복고로 막을 내리지 않았던가.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급진주의냐 온건주의냐 라는 두 가지의 보기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닌, 민주주의의 발전에 필요한 두 가지의 시각을 조화롭게 버무리는 것이다. 물론 말처럼 쉬운 일은 결코 아니다. 그래서 강준만은 지금 이 시대에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 정치를 살펴보고 있는 것이다.
어차피 민주주의의 핵심은 정치이다. 대의제 민주주의에 대한 끝없는 문제점 속에서도 풀뿌리 민주주의는 저 먼 나라의 얘기일 수밖에 없는 대한민국의 현실 속에서 우리가 민주주의의 가치를 발전시킬 수 있는 건 정치, 정확히 말하면 선거 밖에 없다. 시위와 파업이 하나의 일시적 자극이 될 순 있겠지만 결국 모든 것은 정치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강준만은 현대정치의 겉과 속을 들여다본다. 우리 민주주의를 성숙하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강준만이 말하는 것처럼 그간 한국 선거판에서 나타난 쏠림은 단 한 번도 예외없이 '반감의 쏠림'이었다. 그 원인에는 제왕적 대통령제라는 것이 커다란 이유일 것이고, 근본적인 이유는 '친일파 청산'의 부재라는 민족적인 한이 밑바닥에 깔려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 아직 우리 인민들과 정치와 정치인들은 미성숙했다. 그동안 우리 민중들이 정치인들의 공약을 보고 표를 선사한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그런 의미에서 정권 교체 역시 진정한 정권 교체는 단 한 번도 없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것이 우리의 현실임을.. 아직까지 우리 민주주의는 철부지다. 그리고 우리가 민주주의를 향해 바라는 것 역시 ‘물리적'이고 '일차원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보복의 정치라도, 반감의 쏠림이라도 없다면 우리는 우리의 의견을 민주적으로 표출하는 길을 완전히 잃어버릴 수도 있다.
"한국의 정치 문화가 바뀌어야 한다는 데엔 모든 이들이 공감하면서도,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건 아마도 "세상이 다 그런 거지"하는 체념과 냉소 때문일 것이다" 이제는 그 시크함과 시니컬함을 벗어버리고, 쿨~함을 벗어버리고 조금 더 뜨거워져 보는 것은 어떨까. 우리는 항상 그 뜨거움 덕택에 '새로움'을 얻지 않았나.
일부 현 사회를 호령하고 계시는 386세대들의 변절이 역겹지만 그들을 결코 돈과 권력과 사회적 지위에 눈이 먼 탐욕스러운 돼지들로만 취급할 수 없는 이유는 그들은 한국 사회에서 그러한 '뜨거움'을 간직한 채 목숨 다 내놓고 멋지고 당돌하게 세상을 향해 끈질기고 집요하게 돌을 던진 마지막 세대이기 때문이다. 비록 지금은 현실에 타협했을지언정 진심으로 약자를 위해 눈물 흘리고 약자 속으로 들어갔던 유일한 세대였기 때문이다.
과거의 행동이나 업적으로 인해 현재의 가치 판단에 대해 면죄부를 주는 것은 원칙적으로 따지고 보면 결코 옳은 시각은 아닐 것이다. 386세대들이 80년 광주에 대한 부채를 품고 그 시절을 살아왔던 것에는 결코 미치지 못할 것이겠지만 87년 코흘리개 시절, 아무것도 모르던 그때에 민주화라는 대한민국 역사상 최고의 업적을 덜컥 무임승차한 세대라는 점이 그들을 애증의 대상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는 여건을 만드는 것이 아닌가 싶다.
-흔히 하는 말로, 민주주의는 한판 승부가 아니다. 한판 승부가 되어서도 안 된다. 우리 모두 한판 승부의 심리를 경계해야 한다. 누가 이기고 누가 지는 식의 사고의 틀을 벗어나 더불어 같이 살면서 늘 약자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하며, 이건 결코 완성될 수 없는 영원한 과정이기 때문이다. 한국 정치를 세계에 내놓고 자랑할 만한 수준으로 만들어 세계 각국에 수출함으로써 우리도 인류의 진보에 적극 기여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