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장 지글러 지음, 유영미 옮김, 우석훈 해제, 주경복 부록 / 갈라파고스 / 2007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어찌됐건 나는 첫 장을 넘기기도 전에 이 책이 별로였다.
  
지구상의 절반은 굶주리고 있다.
그래, 알고 있다.
제국주의 시절 난무하던 총과 칼은 '자본'이라는 겉모양만 달라진 모양새로
예전 같았으면 식민지로 불리웠을 개발도상국들의 모든 것을 착취하고 있다.
과거와 지금이 달라진 것이 있다면 지금의 부유한 나라들은 자신들이 자행하는
'범죄'에 대해 가끔씩 '참회'의 시간을 갖는다는 것이다.

바로 '이런 책'들로 인해 말이다.

제목부터가 바로 이런 것이다.
아프리카 어린이가 누더기 옷을 입고 눈물을 흘리는 표지부터가 바로 이런 것이다.
그러나 이런 거룩한 '참회'의 시간이 끝나면 순식간에 눈물 콧물을 닦아내고
"어쩔 수 없어. 세상의 이치니까" 라며 다시금 자본이라는 총과 칼을 그들의 목구멍에
갖다 대고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아무렇지도 않게 태연히 착취와 약탈의 싸이클이 돌아간다.

결국 바뀌는 건 없다.

지금은 책 한 권이 세상을 바꿀 수도 있었던, '담론'이 난무하던 시대가 아니다.
대의는 옛말이 되었고 담론투쟁은 이제는 술잔을 기울일 때나
낭만적인 감상에 빠져 안주거리로 삼는 '학창 시절의 추억'으로 전락해 버렸다.
현재 우리를 관통하는 담론은 단 하나, 바로 '시장과 자본'이다.
빈곤, 기아와 같은 세계화의 이면을 비추는 역할을 하는 것은  
저널리즘성에 충실한, 자본에 찌들어버린 매스미디어다.

그들에게 '진정성'이란 것이 있는가.

어떤 매체가 얼마나 더 자극적인 화면을 전달해서 더 많은 액수를 모금하고
사람들의 눈을 더 오래 잡아둘 수 있느냐가 '진정성'이 되어버린 이 시대에
그러한 행위들은 "우리는 너희들에게 이만큼 신경쓰고 있다"는 자기위안과
근본적으로는 자기네들의 국가 정책의 합리화에 지나지 않는다.

진심으로 그들을 위한다면 자극으로 점철된 충격적인 영상이 아니라
그것들을 보면서 흘리는 사람들의 눈물을 '신념'으로 바꿀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170여 쪽에 불과한 장 지글러의 이 책은 '사랑과 자비'를
강조하는 그 어떤 매체도 하지 못한 일을 해냈다.

나의 눈물은 이 책을 통해 '신념'이 됐다. 

글의 서두에 표현한 내가 이 책을 읽기도 전에 가졌던 반감은 인간의 생명마저도
상업성에 초점을 맞추고 자극적으로 표현하는 언론의 몰상식한 시각에 기인한다.
자본으로 인해 인권마저 도태된 절망적인 이 시대에 
자본의 화려한 이면에 발생한 참혹한 현실마저 '자본'으로 다룬다.
이런 아이러니가 또 있을까?
그들의 진심이 그 순간만큼은 조금은 담겨 있을지언정 근본적인 제도적 장치의 보완은 전무하다.
그리고 자본의 피를 뒤집어 쓴 하이에나들은 바로 다음 날이면 또다른 먹잇감을 찾아
부지런히 펜을 놀리고 셔터를 눌러대며 카메라를 들이댄다.
 
장 지글러는 이 책에서 대중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필수조건인 '자극'을 선택하지 않는다.

물론 책이라는 매체가 표현할 수 있는 '자극'의 범위는
다른 매체에 비해 매우 한정적인 것이 사실이지만, 지금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단 하나의 '매우 극단적이고 참혹해서 오히려 흥미로움을 유발할 수 있는 사례'를
원초적인 단어로 표현하며 지나치게 부각시켜 전체의 의미가 되려 잠식되는 것 같은 
본질을 호도하는 어리석음은 저지르지 않는다는 말이다. 

또한 관련 전문가에게 '자기우월성의 증명'을 '책'이라는 만인에게 공개되는 매체를 통해
자행하는, 우리가 지식인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우를 범하지 않는다.
즉 자신의 학자적 식견의 지나친 과시로 인해 대중들과의 교감이 단절되어버리는
지식인, 전문가의 고질병을 이 책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그는 대화체 형식으로 자신의 아들에게 그저 이야기할 뿐이다.
무엇을? 매스미디어가 외면하고 있는 굶주림의 '본질'에 대해 말이다.
그저 음지의 어둠 만을 훑어보며 그것들이 발생한 근본적 원인에 대해서는
회피하는 그들이 놓치고 있는, 아니 의도적으로 묵인하고 있는 '본질'말이다.

웬만큼 전 세계의 기아에 관심을 갖고 있지 않는 이상
"1980년 이후 영양실조나 저개발로 인해 실명하는 사람의 수는 매년
평균 700만 명이고, 대부분이 아이들"
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며
"이들에게 규칙적으로 비타민 A를 복용시키기만 해도 그런 상태를
비약적으로 개선할 수 있다"
는 사실 역시 알지 못한다.

지나친 극단성으로 인해 현대에 이르러서는 경제학계는 물론
사회학적으로도 추방된 줄 알았던 멜서스의 '자연도태설' 이론이
"하룻밤에도 배고픔에 허덕이며 죽어가고 있는 수많은 어린 아이들에
대한 양심의 가책"
을 외면하고 무관심하게 만들고 그러한 행동을
합리화시켜주는 기능으로서 여전히 유효하게 작동하고 있음을  
우리는 그 어떤 매체에서 들을 수 있었던가.

"캘리포니아 소 사육장인 피드롯의 절반에서 연간 소비되는
옥수수의 양이, 옥수수를 주식으로 하면서도 만성적인 기아에
허덕이고 있는 잠비아 같은 나라의 연간 필요량보다 더 크다"
는 사실과

"부유한 나라들은 생산자들에게 최저가격을  보장한다는
이유로 식량을 대량으로 폐기처분하거나 생산을 제한시킨다"

인간의 생명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이 중요한 사실은
날마다 쏟아져나오는 신문의 귀퉁이에서도 우리는 찾아볼 수 없다.

칠레 아옌데 정부와 같은 '기사꺼리가 될 만한' 드라마틱한 사건이 아니라면,
"부르키나파소의 토마스 상카라의 '자주관리정책'과 같은 가난한 나라의
자립적, 혁명적인 정책의 성공이 프랑스의 비위에 거슬려 그들이 조종한
친 프랑스 세력에 의해 살해당했"
다는 가난한 나라의 비극적인 이야기는
아예 가십거리조차 되지 못해서 사람들에게 그를 슬퍼하고 애도할 기회조차 제공해 주지 않는다. 

장 지글러는 말한다.
"인간은 다른 사람이 처한 고통에 함께 아파할 수 있는 유일한 동물"이라고 말이다.
그는 그렇기 때문에 바로 그 점에서 "희망"을 찾는다고 말한다.
진정 그렇다. 인간에게는 타인에 대한 '공감'이라는 능력이 존재하고
이것은 세상의 많은 부분을 진보시켰다.

공감대 형성은 세력을 군집하게 만들었고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며
좀 더 많은 이들에게 내가 꿈꾸는 행복에 대한 공감을 느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나의 고통을 감수하면서도 모두를 위해 조금 더 나은 세상을 향해 힘겹게 나아갔던 것이다. 

그러나 현재 우리는 공감의 사각지대에 놓여져 있다.

자본의 프레임 밖에 있는 '어둠'을 향해 빛을 밝혀주는 조명의 역할은
'상업성'이란 거대한 이념 아래에서 배터리가 방전된지 이미 오래다.
이런 현실 속에서 결국 우리는 프레임 속 세상의 화려함 안에서만 헤엄치는
우물 안 개구리가 되어타인의 고통에 대해 공감을 할 수 있는
감수성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점점 잃어버리게 된다.

이제는 조그만 촛불을 손에 쥐고 프레임 밖으로 나아가야 한다.
첫 발걸음이 잘 떼어지지 않고 맞닥뜨릴 '진실'이
부담되고 외면하고 싶은 것일지라도
지금껏 우리의 세상이 진보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려움을 떨쳐낸 용기에 있었다.

장 지글러는 이 책을 통해 우리에게 촛불을 쥐어주었다.
프레임 밖으로 나갈 수 있는 힘은 조그맣고 얇은 이 책 자체가 아니다.
이 책을 통해 우리 손에 쥐어진 작은 촛불의 희미한 불빛 그 자체가 아니다.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 느껴지는 슬픔과 흘리는 눈물이
프레임 밖 세상을 향해 조심스레 첫 발을 내딛을 수 있도록 해주는 '신념'으로 변한 그것,
어둠을 향해 비춘 그 곳에서 발견한 또 다른 '우리'의 갸냘픈 손을 따뜻하게 잡아주는 그것, 

바로 우리의 행동하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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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18 08:3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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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의 재구성 - 어느 실천가의 반성과 전망
민경우 지음 / 시대의창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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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란 무엇인가.
아니, 대한민국의 진보란 무엇인가.
나는 대한민국의 진보는 곧 태생의 비극이라고 말하고 싶다.

일찍이 친미주의, 아니 숭미주의와 반공주의는 한국에서 '종교'였다.
해방 후 미군정은 공산주의에 대한 히스테리로 인해,
또한 인민들의 '동질화'를 위해 '반공'을 국교로 채택했고,
이는 한국에서 그 어떤 신앙보다도 더 절실하고 절대적인 종교가 되었다.
반공이 아니면 살아남지 못했고 친미는 자신의 개인적 소신 및 성향이 아닌
곧 살아가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미군정 3년 동안 그 어떤 국정 철학도 없이 끌려다녔던 남한은
지독한 숭미주의자인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미국조차 놀랄 정도로 '빨갱이 때려잡기'에 혈안이 되어
미국 숭배를 몸소 실현하는 '반공의 교육장'이 되었다.
빨갱이는 반역이다. 한국전쟁 후 '평화통일'을 부르짖는 것 역시 반역이 되었다.
우리에게 통일이란 없으며, 만에 하나 그 가능성이
단 1%라도 열려있다면 그것은 평화통일이 아닌 '북진통일'이었다.

태초부터 피를 철철 흘리며 우리 앞에 다가온 대한민국 이 땅에서
진보란 결국 민족주의로 귀결되었다. 진보는 곧 빨갱이로 귀결되었다.
이땅에서 보수란 곧 친미주의로 귀결되었다. 극우는 곧 친일파와 동의어였다.
'민족평화'를 이야기하려면 목숨을 걸어야 했다.
이 땅에서 진보는 심장을 내놓고 살아야 했다.

그리고 이는 '병영국가'를 꿈꾸며, 걸핏하면 '목숨을 걸고' 운운하던
위대하신 가카 덕택에 수십 년 간 이 같은 '국가 고유의 개념'이
이어져 올 수 있었고, 유신의 칼날 아래에서 진보는 '범죄'가 되었다.

그들은 대한민국 역사상 단 한 번 성공한다.
이 서슬 퍼런 땅에서 단 한 번 주류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잠시나마 대한민국의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87년 6월의 기억은 그래서 '거룩하다'.

돌이켜보건대 대한민국 역사에서 '진보'가
사회의 전면에 설 수 있었던 것은 그때가 유일했다.
87년 이후 이뤄진 '민주주의 국가'에서 다시 한 번
진보 세력이 수면 위로 올라와 전 민중들의 지지를 받았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모두가 진보를 가장한, 혹은 진보를 이용한 극우, 보수 세력이었을 뿐이다. 

이 책은 제목부터가 [진보의 재구성]이다.
제목이 너무 지겹고 고리타분하다.
진보는 언제나 재구성된다. 그것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그들의 문제는 너무 '똑똑해서' 탈이다.
극우세력들처럼 한 곳으로 모아지는 '뚜렷한' 선이 없다는 것이다.

 

  

보수세력은 '동질화'를 전제로 한다.
그렇기 때문에 보수세력은 하나의 주제로 재빠르게 결집되며
그들이 정권을 잡고 정권의 주체가 극우세력으로 '진화'하면
전 인민의 동일화, 즉 전체주의가 나타나는 것이다.

이때 인민들은 '다양성의 표출'과 그에 따른 '갈등의 심화'라는
민주주의의 기본 요소를 '전체'와 '국가'라는 이름 아래 억압당한다.
대신 민중들이 보는 것은 "우리가 이렇게 잘하고 있다.
당신네들이 굳이 신경 안 써도 된다."
라고 외치는 집권 세력의 이벤트성 포퓰리즘이다. 

반면 진보는 다양성을 존중한다. 소수의 목소리에도 귀 기울여야 한다.
그것이 진보가 추구하는 '민주주의의 기본 요소'이기 때문이다.

(오해의 소지가 있는 것이, 보수 세력이 위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꼭 '민주주의를 유린해야 겠다' 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들 역시 민주주의를 표면적으로 거부하지는 않지만 보수의 철학 속에는
민주주의의 기본 방향과 엇갈리는 부분이 상당히 있는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그들은 세력의 결집부터가 어렵다. 서로서로 한 마디 씩의 말들을
그들은 보수처럼 '동질화'라는 이름으로 통일할 수가 없다.
애초에 그럴 수 없는 가치 체계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커다란 바운더리 내에서 끝없는 가지치기를 한다.
이들이 뭉칠 수 있는 것은 진보 세력의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커다란 목표'가 있을 때이다.

그것이 우리나라에는 87년의 '민주화' 였다.
우리가 보았던 것처럼 진보라는 세력이 한 번 집결하면 충분히 나라를 흔들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일시적이 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목표의 달성' 이후에 이어지는 여러 의견들을 모든 이들에게
보편적으로 만족감을 줄만한 방법으로 조화를 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보의 재구성]이란 제목은 진부하다.
87년 체제 이후 우리나라의 진보 세력이
한번이라도 '재구성'을 하지 않았던 적이 있었던가.
문제는 '재구성'이 아니라 다른 것에 있는 것이 아닐까?

작가 소개를 살펴보았다.
87년 서울대 인문대 학생회장으로 6월 항쟁의 중심이었고
졸업 후 구로, 영등포, 관악 등지에서 청년운동과 노동운동에 몸담았다.
범민련 남측본부 사무처장, 통일 연대 사무처장,
한미 FTA 저지 국민대책위원회 정책팀장 등 경력이 화려하다.
이정도면 기회주의가 판치는 한국에서 보기 드문 전형적인 좌파다.

나는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을 더욱 신뢰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좌파의 입장에서 보는 자신들의 성찰이야 뻔할 것 아닌가.
지금껏 진보진영의 자기성찰이 없었던 까닭에
이나라 진보가 이렇게 맥을 못 추는 것이 아니다.

궁시렁궁시렁.. 이런 삐딱한 시각으로 책을 접했다.
진보에 대한 환멸과 회의감이 어제 오늘 일도 아닐진데
단순히 '장삿속'으로 책 제목에 '진보'란 단어를 떡하니 넣어놓고
(나같은) 어중이 떠중이나 현혹하는 그저그런 책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면서도
(나처럼)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책을 집어들고 나서
'또 상술에 낚였구나' 하고 후회하는 것이다.
그래서 책을 보기 전부터 내 시각은 삐딱했다.
이것은 책이 좋고 나쁨을 떠나서 진보를 향해 느끼는 '냉소주의'에 가깝다.  

책의 처음은 역시나 촛불로 시작한다.
촛불은 내가 일반적으로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사회 광범위한 분야에 영향을 끼친 것인가 보다.
역사가 알아서 판단해 주겠지만 촛불은 참 대단한 것이면서도 편한 것이다.
은근슬쩍 촛불을 핑계삼아 자신들의 '반성'을 이야기할 수 있는 훌륭한 도구이지 않은가.

촛불은 이제 일종의 '면죄부'이다.
진보는 자신들의 잘못과 성찰을 촛불에 대입한다.
"나는 진정 6월의 촛불에 감동받았다" 라고 시작하는
진보세력의 참회는 촛불세대를 하늘로 두둥실 띄워주는 역할을 해서
그들에게 일종의 심리적 만족감을 주면서 '위'에서 '아래',
하늘에서 땅을 내려다보는 시각으로 지금껏 진보가 했던 수많은 한심한 짓들을
'현자'의 눈으로 너그럽게 용서하도록 만드는 역할을 한다. 

이것뿐인가.
동시에 진보는 촛불세대에게 '적'을 규정하면서 그들의 결속력을 한층 강화시킨다.
진보세력과 촛불세대들의 표면적인 적은 MB정부이겠지만
진보가 내세우는 실질적인 적은 그들이 아니다. 그것은 20대이다. 

촛불시위의 촉발은 비록 10대의 고사리같은 손이었지만
(그것이 단 두 달에 불과하다 하더라도)지속될 수 있기까지는
20대, 30대 그리고 일부 40~50대의 참여가 커다란 역할을 한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진보는 지금의 10대를 '촛불세대'로 규정해놓고
취업에 눈이 먼 20대와 니들은 다르다며 일종의 우월감을 부여한다.

여기서 20대는 실로 한심한 존재로 부각된다.
취업에 쩔쩔 매는 찌질이들이 자신의 동생들이 촛불을 들고 나오니까
뭔지도 모르고 어쩔 수 없이 끌려 나간
한심한 찐따가 되는 것이 진보가 바라보는 촛불정국의 20대다.

촛불을 빗대며 자신들을 반성함과 동시에
촛불세대를 신격화하고 (최장집의 말처럼)촛불은 '촛불주의'가 된다.
자신들의 참회에 대한 진정성을 증명하기 위해 그들은 세대 간 적을 규정한다.
촛불정국의 20대. 진보가 생각하는 그들의 역할이란 촛불세대들에게 심리적 우월감을
부여함과 동시에 자신들의 그간 잘못을 희석화시켜주는 편리한 도구이다.
(쟤네들이 의욕감도 없고 능력도 없는 세대들인데 그게 꼭 우리만의 잘못이야? 라는 따위)
  

그래도 이 책에서의 촛불에 대한 부분은  최소한 특정 세대를 거들먹거리며
눈물 질질 짜는듯한 역겨운 태도를 보이지는 않는다.
"5~6월의 촛불대오는 소통과 네트워크로 무장한 수평적 민주주의로 단련되어 있었다.
이들은 토론과 논쟁을 즐겼으며 가는 곳마다 저마다의 방식으로 세계관을 표현했다.
이는 지도와, 대중, 민주집중제를 주장하며
일사분란한 단결을 강조했던 운동진영의 조직문화와 다른 것이었다."
작가의 경력도 그렇거니와 이 정도면 허무맹랑한
헛소리를 할 것 같지는 않았기에 책장을 계속 넘기기로 한다.

이 책은 진보의 반성과 앞으로의 전망을 위해
민주화 전후의 역사적 사건을 살펴보는 방식을 취한다.
6월 항쟁의 근본적인 도화선이 되었던 86년 10월의 '건국대 사건'이나
한국 학생운동사 최악의 비극이 되어버린 1996년 '연세대 사건',
2001년 '강정구 교수 사건' 등이 그것이다.

한총련과 학생운동에 대해 그는 "한국의 학생운동이 비약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1984~87년 학생운동의 활성기와 1987년 6월 항쟁의 승리가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다. 위장된 민선정부 아래에서 반 독재투쟁은 여전히
대중적 공감대를 갖고 있었기에 전대협과 한총련은 영향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같은 사실은 '연대사건'이 왜 민중과
철저하게 고립될 수 밖에 없었는지 말해준다고 한다.
"1990년대 초중반, 학생들의 통일운동의 진정한 동력은 통일에 대한 열정 그 자체에
있었다기 보다는 1987년 6월에 기초한 강력한 반 독재투쟁이 있었다.
반 독재투쟁이라는 동력이 유지되었기 때문에 다소 생경한 통일 구호도
용인되는 구조였던 것이다. 1996년 연대 사건의 학생들이 철저히
고립된 것은 반 독재투쟁의 연결고리가 끊어진 상태였기 때문이다"

과연 그렇다. 학생운동이 연대사건 이후로 몰락해버린 것은 '현실과의 괴리감'에 있었다.
'연대사건'이 그 자체가 학생 운동 몰락의 근본적 계기가 된 것이 아니라
언젠가 무너져버릴 것 같은 허약한 모래성에 물결이 살짝 친 것 뿐이었다.
민주화 이후 학생운동은 그 목적을 잃어버렸다.
권위주의 정부 시절 학생운동의 근본적 동력은 '민주화'였기 때문이다.
민경우의 말처럼 모든 이들이 보편적으로 추구하던 '민주화'라는 대승적 목표가
있었기 때문에 다소 생경하고 과격하기까지 한 강경한 통일구호도 용인이 되었던 것이다. 

반공이 이승만과 박정희의 종교적 믿음이었다면
그 시절 학생들에게 있어서 종교적 믿음이 되었던 것은 '민주주의'였다.
그만큼 절대적이었으리라.

학생운동은 민주화'이후 목적과 당위성을 잃어버렸다.
목적은 충분히 존재할 수 있었다. 
계급간 불평등의 해소라던지 더 나은 복지정책의 추구 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이제 갓 민주주의에 돌입한 사회에서 그같은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목표는
비록 이론상으론 존재했을지언정 그들을 '민주주의'라는 종교와 같이
뜨거운 가슴과 차가운 머리로 움직이게 하기에는 동력 추진력이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그럼에도 87년 이후 근 10년 간 학생운동이 명맥을 이어나갈 수 있었던 것은
아직까지도 완전한 '민주화'가 되지 않았던 시대적 상황 때문이었다.
신군부의 잔재는 노태우라는 이름으로 여전히 이어졌고
전교조의 결성과 분신정국 속에서 그들은 또 다른 세상을 꿈꾸지 않았던가.
그러나 이처럼 추상적인 '반독재' 투쟁에
의존하고 있었던 그들의 자멸은 예견되어 있던 것이다. 

그래서 민경우가 말하는 해결책은 무엇인가?
해결책의 제시에 앞서 그는 최소한 '책임회피'는 하지 않는다.
진보진영의 무너짐과 무능력함을 신자유주의라는
시대의 조류 탓을 하는 편하고 당연한 방법을 선택하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설령 그것이 맞다고 하더라도, 아니 분명히 그것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겠지만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한심하게 시대 탓이나 하면서 나약한 소리나 하는 것이
언제부터 '진보'란 이름으로 불리워졌단 말인가)

"2008년 주류 운동진영은 세 가지 점에서 중대한 한계에 봉착했다.
첫째는 조직 역량과 대중적 동력 사이의 괴리, 둘째는 대중적 동력과
정치적 권위 사이의 괴리, 셋째는 급변하는 정세와 전통적인 인식 구조 사이의 괴리다.
87년 6월의 승리는 86년 건대 사건과 같은 좌경맹동주의를 청산하고
참다운 대중 노선의 길을 개척하는 과정 속에서 가능했다"

핵심은 언제나 원론적일 수 밖에 없다. 민경우의 해결책 역시 원론적이다. 그는
"진보진영의 핵심적인 과제는 정책과 노선, 문화와 감수성에서 2008년 촛불,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와 관련된 대중의 분출 등 국민 대중,
특히 수도권의 청장년층과 호흡을 같이 하는 것이다"
라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지금 현재 우리 사회에서 민중들과 진보 세력 사이에는
너무나도 큰 거리가 있는 듯한 느낌이다.
그 어떤 세력들보다 더욱 더 민중들의 작은 목소리에도
귀 기울이는 가치체계를 추구하는 진보가 
이토록 현실과의 괴리감이 느껴진다는 것은 참으로 역설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2010~12년 진보진영의 최소 목표는 '현대적, 대중적, 진보적이며
정치적 영향력이 있는' 진보정당을 만드는 것이고
최대 목표는 민주당의 '좌파'와 함께 연립정권을 세우는 것이다"

한국 정치판 특유의 보수(민주당)와 극우(한나라당)의 싸움터 속에서
보수 속 '좌파'와 진보세력이 연립정권을 세운다는 것은 매우 현실성이 없는 소리이다.
어디까지나 최대목표이겠지만. 또한 진보정당의 새로운 창당이 국민들에게
'프레시함'으로 다가올 지는 미지수이다.

그동안 그 얼마나 많은 정당들이 창당되고 공중분해되었는가.
또 '신선함'을 위시해서 얼마나 많은 진보를 표방한 정당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는가. 개인적으로 창당보다는 현재의 민노당과 진보신당의
개선과 발전이 일차적인 과제라고 생각하지만
그 어느 방향이 정확한 답이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을 것이다.

현재 많은 사람들이 품고 있는 반 정부 성향은 결코 '진보의 지지'와 동일한 것이 아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진보를 추구해서 현 정부를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소통이 불가능하고 기본적인 의식주에 대한 개선이라는 측면에서
전혀 정책적으로 반영하지 않는 행태에 불만인 것이다.
지금처럼 진보 진영에게 유리한 시대는 이제 다시는 오지 않을 지도 모른다.

다음 대선까지 진보가 확실하게 민심을 얻어내지 못한다면
진보가 주류를 차지하기까지는 십수년이 걸릴지도 모른다.
MB정권의 뼈아픈 실책을 경험했던 보수 진영에서 이 위기의 시기가 지나면
포퓰리즘조차 조소의 극치가 되는 MB처럼
멍청한 인간을 내세우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진보의 현재 행태는 실망적이기 그지 없다.
그럼에도 나는 한국 사회의 밝은 미래는 진보진영에 있다고 본다.
그래서 끝까지 나는 진보 진영을 비판할 것이다.
진보 진영의 생명력은 "각하! 시원하시겠습니다"라는 아부와 고립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 없는 자기 비판과 혹독한 말들 속에 점진적으로
발전되어 가는 '현재진행형 생동감'이기 때문이다.

이 한 권의 책은 그런 면에서 '진보의 미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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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에서 시민으로 - 한국 민주주의를 이해하는 하나의 방법 돌베개 석학인문강좌 4
최장집 지음 / 돌베개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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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장집의 글은 그다지, 아니 전혀 '감성적'이지 않다.
전문적인 용어들의 무미건조한 나열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어도
기름기, 그러니까 과장된 표현이나 그 어떤 미사여구도 찾아볼 수 없다.
소위 '먹힌다는' 지식인들의 필수 덕목인 위트나 재기발랄함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그렇지만 그럼에도 그의 글은 읽는 사람들을 '감성적'으로 만든다.
(그래, 이런 감정을 일반화시키기에는 무리가 있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랬다)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를 보며 얼마나 가슴 떨렸던가.
온갖 현학적인 용어가 난무하며 '앎의 과시'에 지나지 않았던
한국 현대사 정치를 집중적으로 바라보던 수많은 사회과학 서적들과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가 달랐던 점은 이렇게 전문적인 내용을
그만의 탁월한 시각을 통해 대중들에게 전달함에 있어
전혀 일반 대중에게 괴리감이 느껴지지 않는 '언어'로 설파함에 있었다.

이 책([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은 민주화에 대한 일종의 도전이었다. 
그는 결코 돌려서 말하지 않는다.

"나는 민주화 이후 한국사회가 질적으로 나빠졌다고 본다"라는
도발적인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 책은 면죄부는 물론 사회적 특권마저
독점하고 있는 민주화 세대, 일명 386세대에 대한 치기어린 비판이 아니다.
그는 현재 한국의 정당 정치의 본질적인 문제점에 다가가기 위해
한국 현대사의 정치의 역사를 살펴본다. 그리고 민주화 이후에도 여전히
'갈등'을 '전체적'인 동질화로 희석시키는 현 정치를 따끔하게 꼬집었다.

개인적으로 '한국의 민주주의'라는 개념에 있어서 너무나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최장집 교수의 근작이 나왔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사실 약간은 걱정을 했던 것이 사실이다.
최근 MB정부에 대해 했던 발언들이나 글들을 보았을 때 '변절'까지는 아닐지라도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지식인 중의 한 명이라고 여겼던 내 생각과는
전혀 다른 시각 때문에 혼란스러웠었는데, 그런 혼란스러움이 이 책을 통해 가중이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책을 접하기 전 들었던 걱정의 이유였던 것 같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우려의 이유라면,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이후의 책들이 거의 [민주화...]의 바운더리 안에서
계속해서 '동어반복'에 지나지 않는 내용들이 꽤나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워낙에 [민주화...]에서 닦아놓은 이론의 토대가 견고하고 설득력 있다 보니
우려먹기의 유혹을 뿌리칠 수 없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다만 계속되는 같은 것의 반복은 원래의 의미와 영향력을
퇴색시킬 수도 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우석훈이 [88만원 세대]를 중심으로 가지치기하며
책을 쉴새없이 '찍어내는' 것도 같은 연유 때문일 것이다)

그래도, 지금 시대가 어느 때인가?
현 시대만큼 사회과학 서적이 '주목'을 받을 수 있는 시대도 흔치 않다.
김대중 정부, 노무현 정부 때에는 '신자유주의의 숙성기'였기 때문에
시장경제에 대한 여러 가지 비판적인 시각들이 나오긴 했지만,
최소한 '민주주의'라는 대의 안에서는 논란의 여지가 거의 없었다.
담론적 시각으로 접근하는 경향을 많이 보이는
사회과학 서적들이 설 자리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경제? 말 할 것도 없다.
정치? 장난하시나.
10년 만에 이제 '민주주의'의 본질적인 가치를 논하고 있다.
역설적인 말이지만 지금만큼 '책'이 사람들의 의식을 각성할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경향신문이 말했던 "지식인의 죽음"을
탈피하는 길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지금 현재 지식인은 그 어느 때보다도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야 한다.
이제 자신들만 알 수 있는 언어로 지껄이던 '고상한 수다 떨기'에서
뛰어나와 민중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래서 나는 최장집의 신작을 든 것이다.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이후로 그가 말 그대로 맛탱이가 갔다고 하더라도
최장집이란 지식인에는 최소한 자신의 입장을 
침 튀기며 말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은 줘야 한다.

그것이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가 한국 사회에
끼쳤던 영향에 대해 보답하는 최소한의 예우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에 하나 그가 아무리 '시각'이 바뀌었고
사회를 바라보는 눈의 날카로움이 무뎌졌다 하더라도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라는 기본 베이스가
그의 주장의 전제에 있기 때문에 그것이 멍멍이 소리일 리는 없다.

참 길다 길어.
서론이 참 길다.
그래서 내용이 어떠냐고? 

이 책은 촛불세대로 시작한다.

그는 촛불 집회 때 잠식당한 '담론'의 소외를 먼저 꼬집는다.
그는 소위 말하는 "진보파, 개혁파들이 갑작스럽게 정치에
관심을 회복한 것이 작년 여름의 '촛불 집회'"
라고 말한다.
그동안 숱하게 겪어왔던 그놈의 '회의'와 '의심'때문에 변방에 있다가
어라? 이것 보게? 점점 더 뜨거워지는 촛불을 보며
과거의 그 씨니컬 함을 잠시 가슴에 묻어두고
"갑자기 '대중을 찬양'하고, 한국 민주주의를 신격화 한다."

여기서 그들은 '희망'을 발견했다고 하지만
그들이 '촛불'을 정치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해 놓고서
막상 자신들은 민주주의의 거룩함을 들먹이면서 촛불의 정치화를 거부한다.
그래서 결과는?
자신들은 심리적인 만족을 얻었을지언정 촛불은 '현실'로 바뀌지 않았다.
"촛불은 그저 신화가 되었다. 촛불은 촛불주의로 끝났다."
결국? 보통사람들이 실천할 수 있는 '직접'민주주의는 멀어져갔다.

이것이 그가 2008년 6월의 촛불을 바라본 시각이다.
나는 촛불의 '신화론'에 대해 진보개혁파들의 절대적인 책임은
아닐지라도 막중한 책임이 그들에게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에
최장집의 이 의견에 대해서는 절대적으로 동감한다.

이건 "우리는 할 만큼 했다"라는 자위를 바탕으로 한 결과론적 책임회피가 아니다.
그때 우리는 할 만큼 했다는 차원을 넘어서 '민주주의'라는 인류 역사상 최대의
가치체계 안에서 할 수 있는 가장 합법적이고 가장 혁신적이고 가장 고차원적이고
가장 우아한 방법으로 우리의 '목소리'를 표출했다.

직접 민주주의는 저 먼나라 이야기에 불과한 우리나라에서,
소수 엘리트가 권력을 독점하고 행사하는 짝퉁 민주주의 안에서,
"선거철이 지나면 인민의 가치는 휴지조각이 된다"라는
루소의 200여 년 전 말이 여전히 유효한 이 땅에서
믿기 힘들 정도로 성숙한 시민의식을 바탕으로
그 여름밤을 얼마나 아름답게 수놓았던가.

우리는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 '폭력'만 빼고 말이다.
정부 역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 '폭력'을 포함해서 말이다.

이쯤 되면 소위 말하는 진보개혁세력들은
'감탄'이 아니라 대안을 제시했어야 했다.
외신들과 똑같이 넋 놓고 감탄하고 있으면 어쩌자는 건가?
정부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모든 방어책과 대응책을 민중들 앞에
들이대고 있을 동안 그들이 한 건 도대체 무엇인가? 

그저 계속되기만을 바라는 마음?
지금은 87년이 아니다. 혹시 그들이 정말로 혁명주의에 빠져
시위 군중들이 청와대에 들어가 대통령을 끌어내리기만을
바라고 있었던 건 아니었겠지?

2008년의 여름을 지나며 대중들이 얻은 건 냉소주의다.
마치 해방 후 9월 총파업과 대구 항쟁을 거치며 이루 말할 수 없는
탄압을 받으며 보수화와 동시에 냉소주의에 휩싸인
과거 우리나라의 농민들처럼 말이다.
 
"6월의 기억"은 이젠 그저 '향수'가 되었다. 그때를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현재에 대한 자괴감만 늘어간다. '우리가 정말 저랬구나. 다시 할 수 있을까.
안 될 거야. 바뀌지도 않는데 뭘.' 이렇게 될 동안 그들이 한 건 도대체 뭔가? 

최장집은 이 책에서 "'촛불이 신화가 되길 바라는 이들'에게
나의 이 책은 실망스러울 것"
이라고 말을 한다.
그는 결코 촛불의 낭만주의에 빠져 "다시 한번!"
이라는 케케묵은 구호를 남발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현재의 냉소주의를 걱정하며, 이에 대한 근본적 원인은
촛불'과 같은 한 번 씩 터지는 집단적 분출을 민중들에게서
유발할 수밖에 없게 하는 정치적 무능력, 현실 정치의 실패에 있다고 말한다.
역시 최장집은 민주주의의 위기를 '정치'에서 찾는다.
사실 이것은 가장 현실적인 개선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현실적인 정도와는 별개로 그것이 개선되기까지는
수많은 조건과 역량이 수반되어야 하겠지만 말이다.

이 책을 관통하는 하나의 커다란 키워드는 '갈등'이다.
"정치의 본질은 권력의 문제를 다루는 데 있다.
권력의 문제는 갈등의 문제로부터 불러들여 진다"

정치라는 세계가 참 미묘한 것이 인간관계에서 갈등은
그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무난히 풀 수 있는 방법이 있다.
툭 터놓고 술 한 잔 마시면서 서로 속마음을 내뱉으며 푼다던지,
옥신각신하면서 갈등의 감정이 중화된다던지 하는 것들로.

그러나 정치란 것이 어디 그런가?
정치에서의 갈등은 수많은 이해관계가 얽혀 있어
그 매듭을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지 모른다.
따지고 보면 인간관계의 거시적인 차원이 정치라지만
'인간의 본성'이라는 복잡 미묘한 것, 다시 말해 '권력'이라는
무시무시한 추상체가 갈등의 개념에 섞여 들어가면
매듭은 수없이 증가한다. 그 시작점을 모를 정도로.

이런 면에서 본다면 민주주의는 어쩌면 '유토피아'에 불과한 개념일지도 모른다.
"민주주의와 이론과 제도는 갈등의 타협을 통해 잠정적으로
해소될 수 있다고 보는 관점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
이다.
따라서 그 유토피아에 도달하기까지의 여정이 너무나도 힘들기때문에
엘리트, 권력자들은 편한 방법을 간혹 선택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유토피아를 실현했다고 믿는다.
갈등 없는 무균질 사회, 청정 민주주의를 실현했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것은, 즉 갈등의 요소를 원천 봉쇄한 그 사회를
우리는 '전체주의'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그래서 우리 사회에는 '갈등'이 필요한 것이다.
우리 사회가 갈등이 없다고는 말 할 수 없다.
오히려 현재 우리 사회는 갈등이 난무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어느 사회보다도
민주주의의 발전 조건에 더더욱 가까운 것이 아닌가?
그럼에도 현재 우리 사회가, MB정권이 점점 더 민주주의와
멀어져가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최장집은 그것은 "갈등의 사회화"라는 것의 취약성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갈등의 사회화는 보다 많은 이해 당사자들을 정치에 관여하게 함으로써
정치과정에서 이루어지는 권력의 행사를 부당하게 만들며,
법 앞의 평등을 포함하는 법 적용과 집행의 보편성을 구현하는 데도 기여 한다"

우리 사회는 갈등까지는 충분히 차고 넘치지만
이러한 갈등이 '사회화' 되기까지는 터무니없어 보인다.
왜 그런 것인가? 대의제 민주주의에서 갈등의 사회화는
오로지 정당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소수 엘리트의 '갈등'은 한나라당과 민주당 등
소위 말하는 메이저 정당을 통해 구현된다.
국회를 보라. 매일 싸우지 않는가.
서로 자신들의 입장을 내세우면서 갈등을 조장하지 않는가.

그러나 일반 민중들의 보편적인 입장에 귀 기울이고 대변하는
순수한 의미의 '좌파'정당은 우리나라에 전무할 뿐더러 좌파를 표방하는 정당,
즉 민주노동당이나 진보신당의 국회에서의 파워는 너무나 약하다.
아니 근본적인 문제는 그들 정당들이 진정으로
민중의 입장을 대변하는 정당이 아니라는 점이다.

노동자들은 민주노동당을 지지하지 않는다.
이것은 '정치의 무관심'과 '냉소주의'라는 민주화 이후 
한국 현대사의 전통적인 습성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그만큼 민주노동당이 대중들과의 교감에 서투르고 대
중들의 요구에 무지하다는 것을 반증하는 현상이다.

최장집은 말한다.
"민주주의는 사회 균열로부터 발생하는 갈등을 억압하기보다는 민주적인
방법으로 표출하고 해소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발전하는 정치체제"
라고 말이다.
그러나 "한국 사회의 지배적 담론, 교육, 사회화의 규범이 되는 내용들은
대체로 갈등을 부정하면서 사회 통합을 강조하는 덕목과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바로 이것이 문제인 것이다.

시민사회의 발전, 풀뿌리 민주주의가 근본이 되어
발전한 민주주의가 아니라 국가가 중심이 되어,
국가가 그 모든 것에 선행해서 존재한 이후 발전한 민주화,
민주주의 국가는 필연적으로 국가에 예속될 수밖에 없다.
국가에 예속된다는 것은 '통합'을 뜻하고 그것은 갈등의 원천적 뿌리를 봉쇄한다.
우리는 '국가'라는 커다란 존재 아래 갈등 요소들을 꾹꾹 눌러 담고 휩쓸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민주화의 가장 큰 문제점은 이런 것이 아니다.
'국가'는 언제나 늘상 인민보다 선행되어 왔다.
최장집은 한국의 민주화에 있어 가장 큰 문제점은 '시민사회의 분리'라고 말한다.

"민주주의 공고화 과정에서 나타난 민주화운동의 중요한 특징은
정치적 문제나 사회경제적 문제에 있어 중산층적 관심사에 초점을 둔
지식인, 전문가 중심의 시민운동과 노동자, 농민 같은 생산자 집단 중심의
민중운동이 분화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시민운동이 '갈등의 사회화'라는 민주주의의 커다란 발전 요소를
체계화 시킬 수 있는 활동이라는 점에서 커다란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시민운동에 있어서 계급적 분화는 결국 민중들의 '갈등'을
'사회화'시킬 수 있는 길을 원천봉쇄하는 최악의 상황을 만들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최장집의 결론은 무엇인가.
"민주주의를 발전시키기 위해 민주주의의 제도화된 정치 과정을 이해하고
이를 바탕으로 정치적 힘을 조직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결론은 이것이다.

너무 원론적이라고? 어쩔 수 없다. 그 무엇이든지 이론은 이론일 뿐이다.
어차피 현재 우리 사회에서 어떤 말을 한들 원론적이지 않을 이야기가 있을까?
지금은 '원론'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것은 케케묵은 '담론 투쟁'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민주주의의 기본권이 위협되고 있는 이 시점에서 우리는 별로 논쟁할 건덕지가 없다.
두 지도자의 과거 민주정부 시절
우리가 논의한 대상은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논쟁이었다.
비록 입장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서로의 공통적인 목표는
'더 나은 사회로의 발전'이었던 것임은 분명하다.

지금 역시 우리는 '더 나은 사회로의 발전'을 꿈꾸고 있다.
그러나 누군가 우리에게 현재 한국 사회에 바라는 것이 있다면?
이라는 질문을 했을 때 저런 추상적인 대답은 많이 나오지 않을 것이다.
'서민경제의 발전'이라는 대답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 대답 중의 하나일 테고,
과거 10년과 지금 저 물음에 대한 대답의 예상 답안 중 
추가될 것이 있다면 '민주주의 가치의 정립'이라는 답안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것은 진정한 '독재'를 경험해보지 못한
20대들의 조급한 판단에서 나오는 치기어린 생각에 불과한 것인가?
나는 결코 그렇지 않다고 본다.

'진정한 독재'를 경험해 본, 그리고 지금 20대들의 민주주의 조루증을
조롱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그들'이 간직하고 있는 '특권의식'은
자신들의 20대 시절의 현실을 최대한
절망적으로 해석하는 데 그 바탕을 두고 있다.
그 시대에도 우리는 뱃지를 떼고 길거리로 뛰어나가 민주화를 부르짖었다며....

그래서 뭐?

그것은 당신들이 민주화에 대한 특정한 DNA를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이아니라
단지 그 시대의 시대적 상황에 젊은이들이 대응해야 했던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이다. 

니들이 지금 그렇게 한심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20대들 역시 
니들과 같은 상황에 처해있다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이 말이 억지 같고 졸렬한 자기위안에 불과한 것 같다고? 뭐 좀 그러면 또 어떤가?
"80년대 그 청년들이 오늘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의 9할을 주었다"며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낭만주의에 빠져서 끊임없이 자기네 세대들을
신격화 시키는데 여념 없는 김규향 같은 인간도 있는데 우리 처절한 이 시대에
나 같은 20대 하나가 니들 세대를 빗대면서 우리 세대를 자위한다고 문제 될게 있나? 

결론적으로 우리 사회는 '갈등'은 많은데 제도화가 부족하다.
우리는 우리의 목소리를 내고 싶은 정당을 필요로 한다.
아무리 원론적인 이야기를 한다고 지겨워하면 뭐하나. 바뀌는 것이 하나도 없는데.
그래서 이 책에서도 이어지는 최장집의 [민주화...] 이후의
동어반복이 '여전히'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나는 더이상 최장집의 똑같은 말을 보고 싶지 않다.
지겹다.
언제나 똑같은 이야기 뿐이지 않은가.
이제 이런 원론적인 이야기만 반복하는 책은 그만 나와야 한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언제나 이러한 똑같은 이야기에 귀 기울여지게 만들고 있다.
과거보다 현재가 더욱 더.  


이것이 우리사회의 가장 큰 비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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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정치의 겉과 속 - 한국 정치는 왜 늘 복마전인가?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9년 3월
평점 :
절판


 

-나는 이 책에 대한 리뷰를 내가 386세대에 대해 느끼고 있는 비판적 관점과 함께 접근하려 한다-  



나는 강준만의 글을 참 좋아한다. 아니, 그를 존경한다는 표현이 더 적합할 것 같다. [인물과 사상]은 일명 '강준만 식 글쓰기'라는 신조어까지 나올 정도로 90년대 당시 지식인들 사이에서 커다란 파장과 논란을 불러 일으켰지만, 내가 접했던 그의 첫 번째 책은 [인물과 사상]이 아닌 [한국 현대사 산책]이었다.

[한국 현대사 산책]은 나에게 있어 그 어떤 교과서나 스승보다 더욱 많은 가르침을 주었다. 지금껏 단편적으로만 알고 있던 격동의 현대사에 일어났던 굵직굵직한 사건들을 연대순으로 체계적으로 정립하게 해 주었던 것과 동시에, 반공이데올로기 속에서 음지에서 목소리를 죽일 수밖에 없었던, 진실은 곧 반역이었던 그 암울한 시대의 수많은 '진실'을 알게 되었다.

조국의 변태적인 취향 덕분에 영원히 모를 수도 있었던 우리 사회의 어두운 면을 알 수 있게 해주었던 것이 이 책을 나에게 최고의 스승으로 만들어 준 이유였다면, 책 곳곳에 나와 있는 수많은 인용 저서들은 강준만이란 인물에 대해 존경심을 품게 해주기에 충분했다. 70~80년대 반독재 투쟁에 정신적인 버팀목이 되어 준 사람이 리영희라면, 2000년대에 대학을 들어간 우리 세대에게 386세대의 리영희 같은 존재는 강준만이 아닐까 생각한다. (영향력의 종류에는 차이가 있겠지만 진중권이나 우석훈, 장하준 같은 이들 역시 거기에 포함될 것이다)

[현대정치의 겉과 속]은 강준만의 최근작이다. 이 책에서 그는 한국의 현대 정치에 대해 살펴본다. 왜 그가 지금 이 시점에서 한국의 '정치'에 대해 이야기하는가.

20대들은 지금을 조급해한다. 이명박은 20대에게 쥐새끼, 독재자, 쓰레기로 통한다. 촛불집회에서 공권력을 사용한 진압은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인권탄압이며, 대운하, 아니 4대강 살리기와 민영화는 민주주의를 심각하게 위협하는 독재 행위이다. 지금의 20대는 명박산성이며 미국산 쇠고기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왜? 민주주의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위에 나열한 예는 절대적인 시각으로서 민주주의의 위협으로 볼 수 있는 부분도 분명히 있지만 지나치게 상황을 극단으로 몰고 가서 비약하는 20대들의 상대적인 시각이 개입된 부분도 존재한다. 그러나 이게 뭐 어쨌다는 것인가? 어느 것이 옳고 그르다고 할 수 있는가? 뒤에서도 이야기하겠지만 문제는 20대들의 민주주의를 향한 조급함이 아닌 과거의 독재정권에 비교하며 지금 20대들의 사회를 향한 목소리를 사회적 자폐아들의 마지막 발악이라고 생각하는 일부 기성세대와 386세대들의 시각처럼 시대착오적이고 역겨운 생각인 것이다.

우리가 현 정부의 행동에 화낼 수 있는 원동력이 '민주주의의 성숙'이라고 가정했을 때 우리가 지금 이렇게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을 느끼고 목소리를 낼 수 있기까지 그들이 이 사회에 끼쳤던 역할을 무시할 순 없겠지만, 최소한 민주주의가 성숙화 되는 과정에서(정확히 말하면 지난 10년 간) 기성세대, 특히 386세대들이 사회에 끼쳤던 해악은 결과적으로 봤을 때 권위주의 정부의 권력남용을 비난할 정도로 이타적이고 올바른 것은 결코 아니었다.

우리에게 민주주의는 과거처럼 '치명적'인 것이 아니었다. 타는 가슴속의 목마름의 기억으로, 떨리는 손, 떨리는 가슴, 치 떨리는 노여움으로 신 새벽 뒷골목에서, 남몰래 '민주주의여 만세'라고 속삭이는 가슴시린 짝사랑의 대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우리는 민주주의와 지난 10년 동안 소리 소문 없이 절름발이 사랑을 나눴다. 아니 사랑을 일방적으로 받았다.

내가 미처 너(민주주의)라는 존재를 의식적으로 자각하기 전부터, 너는 언제나 내 옆에서 일방적인 사랑을 주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우리는 너를 특별한 존재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2008년 네가 떠나가고 모든 것이 바뀌어버린(것 같이 느껴지는) 세상을 향해 우리는 시끄럽게 네게 돌아오라고 소리를 지르고 있다.

분명 20대의 현재 '독재 타도'라는 구호는 조금 멀리 떨어져서 바라보면 괴리감이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386세대는 혀를 끌끌 차며 우리들을 본다. 니들이 독재를 아냐면서. 20대를 '적'으로 놓고 현실에서는 착취할 대로 착취해놓고, 이럴 때만 그들은 여전히 낭만주의에 빠져 자신들의 반 독재투쟁을 무용담처럼 늘어놓는다.

물론 모든 386세대가 이런 건 결코 아니다. 내가 여기서 말하는 386세대는 학교 다닐 때 나름대로 '운동' 좀 했다고 거들먹거리고, 그 시절 당신의 모습을 자랑스레 늘어놓으면서 정작 자신은 자신이 그렇게 싫어하는 독재정권 덕택에 지금은 어디 가서 내밀기도 쪽팔리는 F학점으로도 대기업 간부직 자리에 있는, 지금 20대를 그저 취업에만 눈이 먼 사회적 자폐아로 취급하면서 정작 지들 자식들은 사교육에 유학으로 몰아넣는, 20대들이 '민주주의' 얘기만 할라치면 취업에 학점에 토익에 눈깔 돌아간 애들이 민주주의가 뭔지는 아냐면서 "그 때 우리는 니들과 달랐다"는 낭만주의에 빠져 허덕이는 일부 한심하기 짝이 없는 386세대들이다.

최소한 내가 아는 지식인 중에 유시민과 강준만은 저들 부류는 아니다. 유시민과 강준만이 비록 저들과 같은 '80년대 향수'를 간직하고 있을지는 모를지언정 권위주의 군부 독재 정부가 자신들에게 행했던 착취와 탄압을 사회 경제적인 측면에서 현 20대에게 그대로 행하고 있는 모순적이고 위선적인 부류는 아니라는 것이다. 이 둘은 최소한 '글'이라는 수단을 통해서 그들의 지식을 대중에게 제공하고 있다는 점에서 기성세대, 386세대의 역설적인 모습과는 분명 다른 길을 걷는다. 유시민의 [후불제 민주주의와] 강준만의 바로 이 책이 그들이 현재 아랫세대를 바라보는 시각의 적절한 예가 될 것이다.

강준만은 이 책에서 '우리'가 잃어버렸다고 생각하고 있는 '민주주의'를 조급한 시점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밖에서 봤을 때 한국의 시위, 파업은 놀랄 일이 아니다. 우리 또한 이런 일들을 겪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민주주의는 항상 실망스럽고 불완전하다는 것에 한국인들은 익숙하지 않은 듯하다"라는 기 소르망의 말을 빌어서 우리의 조급함에 경종을 울린다.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는 따지고 보면 이제 22살이다. 그런 우리나라가 이제는 백여 년이 넘는 유럽과 미국의 민주주의를 부러워한다. 사실 민주주의라는 것이 나이만 많다고 성숙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나이가 많아서 성숙하는 것이라면 왜 그렇게 프랑스와 북유럽의 선진국들에서는 아직까지도 파업이 일어나고 미국은 왜 이토록 끝없이 '민주주의의 가치'가 논란이 되겠는가?

물론 민주주의가 성숙하는 과정에서 시간이 하나의 지표가 될 수는 있을 것이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민주주의에 반하는 '문제점'이 자연스레 제기되고, 서로간의 갈등으로 인해 성숙되는 민주주의의 가치에서 시간이란 무시할 수 없는 요소임이 분명한 것이 사실이긴 하지만,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시간, 그것이 민주주의의 만병통치약이자 절대적인 기준은 아니라는 말이다.

워낙에 한국 현대사가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심한 굴곡을 겪었기에 한국인들의 체감 상 우리의 민주주의는 오래된 것 같은데 변한 것도 없고 벌써 위기가 찾아오는가. 라고 느끼는 게 아닌가 싶다.

강준만은 이 책에서 민주주의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한국 정치에 대해 조용하게 살펴본다. 그리고 그는 결코 우리의 단점(이라고 흔히 일컬어지는 문제)들에 대해 '단정'짓지 않는다. 가령 그는, "지도자 추종주의는 한국의 장점과 동시에 단점이다. 유능하고 강력한 지도자를 만나면 무서운 힘을 발휘할 수 있지만, 그로 인한 부족용도 크다. 국민 각자가 자기 몫을 할 생각은 안 하고 지도자에게 의존하려는 심리가 강해지기 때문이다. 이것이 지도자를 필요 이상으로 극찬하거나 매도하는 양극단의 성향이 드러나는 이유"라고 말을 한다.

그는 여기서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를 몇몇 특성으로 규정했는데, 그 중 하나인 '홍수 민주주의'에 대한 정의를 살펴보면 강준만의 이런 시각은 더욱 확연히 드러난다. 티핑포인트에 대한 개념을 설명하면서 "한국의 민주주의는 변화의 기운이 잠재된 채로 수면 하에 머무르지만 그 기운이 쌓이고 쌓여 어느 순간에 도달하면 일시에 폭발해 겉으로 분출하게 된"다고 말하면서,

"홍수 민주주의는 마지막 남은 카드인 셈이다. 그 부작용을 염려하기엔 그간 숨 죽이고 지내온 세월이 너무 길다. 아니 너무 길어 부작용이 있을 것 같지도 않다. 과연 어디에서부터 홍수가 터질 것인가?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때가 무르익은 것은 분명하다. 두고 보라. 반드시 홍수는 어디에선가 터지고야 말 것이다. 시간은 티핑포인트를 향해 질주하고 있다." 라고 한다.

그는 여기서 한국의 민주주의 발전을 '자연성'에 맞겨 두는듯한 뉘앙스를 풍긴다. 시간은 티핑포인트를 향해 질주하고 있고, 그 곳에서 홍수는 반드시 터질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우리가 두 손 놓고 있으면 언젠가는 홍수가 터져서 민주주의는 발전하게 될 것이니 가만 있으면 된다.' 라고 해석하는 것은 정말로 어리석은 생각이다.

우리가 티핑포인트를 향해 '질주'하고 있는 원동력에는 민주주의라는 녀석에 대한 끝없는 자각과 회의감, 모순의 발견, 그리고 그에 따른 우리의 직접적인 '행동들'에 있는 것이다. 촛불 집회와 같은 우리네들의 의견 표출은 홍수에 다다르게 하는 커다란 물줄기가 되고, 우리가 정치에 대해 느끼는 혐오감과 무관심을 뛰어넘어 (강준만이 지적하는 '반감의 쏠림'에 불과하다 하더라고) 투표장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티핑포인트를 향해 질주하는 속도에 박차를 가해주는 것이다.

강준만은 이 책에서 현 20대의 바이블 [88만원 세대]에서 우석훈이 말한 것처럼 '짱돌'을 집어 들고 연대파업 하라는 직접적인 선동의 길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민주주의는 한판 승부가 아니라며, 우리의 조급함을 질타한다. 대신 그는 민주주의 개념의 거시적인 측면에서 우리의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하면서 그렇게 천천히 그러나 갑자기 바뀔 수 있는 민주주의의 성숙에 대한 가능성을 제시한다. 누구의 시각이 맞는 것 인가. 이에 대한 '정답'은 결코 없다.

'한판 승부'라는 급진성은 곧 혁명이라는 '급진적 개혁의 극단적 수단'을 통해 표출된 바 있다. 프랑스와 러시아에서 말이다. 둘 다 결과적으로는 실패로 끝났지만 둘 다 세계를 바꾸어놓았다. 프랑스 혁명이 없었다면 지금 현재 전세계의 민주주의는 어쩌면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고, 만약에 존재한다고 해도 그저 형식적인 틀에 지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러시아 혁명에 대한 시각은 지금까지도 여러 견해들이 분분하지만 나는 러시아 혁명을 통한 '사회주의의 현실화'가 없었다면 현재 자본주의는 벌써 몰락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흔히 자본주의의 황금기라고 일컬어지는 전후시대~1960년대까지의 풍요로움이 발생하고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은 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 국가들의 혁신적인 '복지정책'을 참고하지 않았더라면 결코 있을 수 없는 것이었다.

이에 비해 '천천히 이루어지는 민주주의'의 사례는 역사 속에서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그러한 개념 자체가 현재진행형이고 혁명으로 대표되는 '한판승부'라는 개념보다 명확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천천히 성숙되는 민주주의를 배척하고 사위, 파업, 혁명과 같은 한판 뒤집기를 선택하자는 것은 결코 '옳은' 방법이 아닐 것이다. '민주주의'라고 불리는 체제를 지향하는 한 사회에서 민주주의라는 대의가 심각하게 위협받을 정도로 최악의 상황에 치닫는 조건에서라면 연대총파업이나 대규모 시위 등이 필요할 수도 있다. 아니 독단으로 빠지는 길을 막기 위해서라도 시민들의 이런 커다란 움직임은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결코 시위와 파업이라는 극단적인 의견 표출이 민주주의에서 '지속적인 울림'을 갖기란 쉽지 않다. 자극도 여러 번 받다 보면 무뎌지는 법이다. 한 사회의 정부가 민주주의를 역행하고 있다고 해서 시민들까지 한두 번 자극제로서의 역할이 아닌, 지속적으로 시위나 파업과 같은 민주주의의 변칙적인 수단을 끊임없이 사용하게 된다면 그것은 그 자체가 곧 민주주의의 몰락으로 나아가는 지름길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때 필요한 것이 천천히 그러나 꾸준한 민주주의에 대한 발전이다.

한판 승부는 체제나 이념을 떠나서 볼셰비키 혁명처럼 꾸준한 '피끓는 원동력'을 지니고 있지 않는다면 몰락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역사상 가장 커다란 영향력을 끼쳤던 프랑스 혁명 역시 자의건 타의건 결국 나폴레옹의 왕정 복고로 막을 내리지 않았던가.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급진주의냐 온건주의냐 라는 두 가지의 보기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닌, 민주주의의 발전에 필요한 두 가지의 시각을 조화롭게 버무리는 것이다. 물론 말처럼 쉬운 일은 결코 아니다. 그래서 강준만은 지금 이 시대에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 정치를 살펴보고 있는 것이다.

어차피 민주주의의 핵심은 정치이다. 대의제 민주주의에 대한 끝없는 문제점 속에서도 풀뿌리 민주주의는 저 먼 나라의 얘기일 수밖에 없는 대한민국의 현실 속에서 우리가 민주주의의 가치를 발전시킬 수 있는 건 정치, 정확히 말하면 선거 밖에 없다. 시위와 파업이 하나의 일시적 자극이 될 순 있겠지만 결국 모든 것은 정치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강준만은 현대정치의 겉과 속을 들여다본다. 우리 민주주의를 성숙하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강준만이 말하는 것처럼 그간 한국 선거판에서 나타난 쏠림은 단 한 번도 예외없이 '반감의 쏠림'이었다. 그 원인에는 제왕적 대통령제라는 것이 커다란 이유일 것이고, 근본적인 이유는 '친일파 청산'의 부재라는 민족적인 한이 밑바닥에 깔려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 아직 우리 인민들과 정치와 정치인들은 미성숙했다. 그동안 우리 민중들이 정치인들의 공약을 보고 표를 선사한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그런 의미에서 정권 교체 역시 진정한 정권 교체는 단 한 번도 없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것이 우리의 현실임을.. 아직까지 우리 민주주의는 철부지다. 그리고 우리가 민주주의를 향해 바라는 것 역시 ‘물리적'이고 '일차원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보복의 정치라도, 반감의 쏠림이라도 없다면 우리는 우리의 의견을 민주적으로 표출하는 길을 완전히 잃어버릴 수도 있다.

"한국의 정치 문화가 바뀌어야 한다는 데엔 모든 이들이 공감하면서도,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건 아마도 "세상이 다 그런 거지"하는 체념과 냉소 때문일 것이다" 이제는 그 시크함과 시니컬함을 벗어버리고, 쿨~함을 벗어버리고 조금 더 뜨거워져 보는 것은 어떨까. 우리는 항상 그 뜨거움 덕택에 '새로움'을 얻지 않았나.

일부 현 사회를 호령하고 계시는 386세대들의 변절이 역겹지만 그들을 결코 돈과 권력과 사회적 지위에 눈이 먼 탐욕스러운 돼지들로만 취급할 수 없는 이유는 그들은 한국 사회에서 그러한 '뜨거움'을 간직한 채 목숨 다 내놓고 멋지고 당돌하게 세상을 향해 끈질기고 집요하게 돌을 던진 마지막 세대이기 때문이다. 비록 지금은 현실에 타협했을지언정 진심으로 약자를 위해 눈물 흘리고 약자 속으로 들어갔던 유일한 세대였기 때문이다.

과거의 행동이나 업적으로 인해 현재의 가치 판단에 대해 면죄부를 주는 것은 원칙적으로 따지고 보면 결코 옳은 시각은 아닐 것이다. 386세대들이 80년 광주에 대한 부채를 품고 그 시절을 살아왔던 것에는 결코 미치지 못할 것이겠지만 87년 코흘리개 시절, 아무것도 모르던 그때에 민주화라는 대한민국 역사상 최고의 업적을 덜컥 무임승차한 세대라는 점이 그들을 애증의 대상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는 여건을 만드는 것이 아닌가 싶다.

-흔히 하는 말로, 민주주의는 한판 승부가 아니다. 한판 승부가 되어서도 안 된다. 우리 모두 한판 승부의 심리를 경계해야 한다. 누가 이기고 누가 지는 식의 사고의 틀을 벗어나 더불어 같이 살면서 늘 약자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하며, 이건 결코 완성될 수 없는 영원한 과정이기 때문이다. 한국 정치를 세계에 내놓고 자랑할 만한 수준으로 만들어 세계 각국에 수출함으로써 우리도 인류의 진보에 적극 기여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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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라이트 사용후기 - 상식인을 위한 역사전쟁 관전기
한윤형 지음 / 개마고원 / 2009년 8월
평점 :
절판


 

이 책은 좀 할 말이 많은 책이다. 개인적으로 뉴라이트를 비판하는 거의 유일하다시피 한 대중서가 김기협의 [뉴라이트 비판]과 이 책이라는 점이 조금 서글프기도 하다.

모순투성이인 뉴라이트에 대해 비판적으로 접근하는 인터넷에서 떠돌아다는 무수히 많은 글들의 공통점, 즉 감정에 치우친 글들이 아닌, 이성적으로 접근해서 논리적으로 비판을 해야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할 일일 것이다. 그러나, 인터넷에서 떠돌아다니는 글이 아닌 이렇게 책으로 인쇄된 [뉴라이트 비판]과 [뉴라이트 사용후기]라는 뉴라이트에 관한 비판서는 이성적인 접근이나 객관적인 비판보다는 전자는 지극히 감성에 치우쳐 글의 논점을 잃고 사경을 해메고 있고, 후자는 너무 '이성적'접근을 의식하다가 주관적 함정에 빠지는 우를 범하고 있다는 것.

이 글로 인해 뉴라이트를 처음 접하는 사람들이 자칫 뉴라이트라는 존재에 대해 이 책들이 그들을 바라보는 인식이 곧 나의 인식인 것처럼 편협한 시각에 사로잡혀 큰 기둥을 못 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이 책들을 보며 들었던 '서글픔'의 이유였던 것 같다.

그래도 이 책은 김기협의 [뉴라이트 비판]을 읽고 느꼈던 '어처구니'없는 황당함 보다는 그나마 생각할 꺼리를 많이 제공해 준다는 점에서 김기협의 급조된 비판보다는 훨씬 더 수준 높은 비판을 제공한다.

일단 한윤형은 김기협처럼 감정적으로 뉴라이트를 비판, 아니 비난하지 않는다. 또한 김기협처럼 뉴라이트의 저서에서 자신에게 유리한 입장만을 얌체같이 '쏙' 빼와서 자신의 주장에 불리하겠다 싶은 앞 뒤 문맥은 다 잘라먹고 단물만 쪽쪽 빨아먹고 버리는 치사한 짓은 하지 않는다. 한윤형은 뉴라이트에 대해 충분히 '논리적'이고 '이성적'으로 다가간다. 한마디로 민족주의의 딜레마와 정치적 견해라는 뉴라이트 비판시 가장 위험한 함정에 빠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은 존재감이 모호해진다. 자신이 뉴라이트를 살펴보는데 지극히 '중립적'이어야 한다는 강박관념, 혹은 뉴라이트 측에서 반대 주장을 할 껀덕지를 아예 원천봉쇄하기 위해 뉴라이트보다 더 뉴라이트스러운 입장에서 그들의 주장을 옹호하고 민족주의자(?)들을 열렬히 까대고 있다. 호랑이를 잡기 위해 소굴에 들어갔다가 굴 속에서 나오는 길을 잃어버린 상황이다.

그래도 인정해야 할 점은 한윤형은 최소한 '비판'의 기본 자세라도 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 책에서 느꼈던 점 중의 하나는 '필자가 뉴라이트의 저서들을 꽤나 꼼꼼히 읽었구나'이다. 뉴라이트의 저서들을 읽고 느꼈던 감정과 전개하는 주장들은 비록 나의 생각과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많지만 이데올로기와 정치적 성향에 사로잡히지 않고 온전히 '분석'적인 면에서 뉴라이트의 저서들을 살펴보고 이러한 비판서를 내놓은 점은 김기협의 황당한 비판 선례가 있어서 더욱 돋보이는지 모르겠지만 박수를 쳐주고 싶은 부분이다.

한윤형은 이 책에서 뉴라이트를 극단으로 몰고가지 않는다. 이 책 뿐만이 아니라 평소 글의 스타일에 있어서 그의 안티가 많이 생길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극우 뿐 아니라 좌파, 진보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이들까지 동시에 비판을 작렬하는 중도성향의 태도 때문이다. 이러한 '중도성향'이 단순히 자신 개인의 사상을 떠나 남을 설득하기 위한 논리를 갖추기란, 게다가 이러한 자신의 저서들로 남을 이해시키기란 좌파와 우파보다 정치적 식견이나 세상을 보는 시각이 훨씬 더 넓어야 되기 때문에 상당히 어려울 뿐더러 자신의 변변한 논리가 없으면 한 번에 무너질 수 있는게 한국의 '중도'이다.

한윤형의 문제는 여기에 있다. 자신이 견지하고 싶은 입장은 중도이지만 사실 자신의 논리와 주장은 강준만과 최장집같은 이들에게 지나치게 기대고 있다. 이 글에서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고 있는 상당 부분도 강준만과 최장집 같은 학자들의 입장과 시각을 그대로 가지고 와 대입을 시키고 있다는 것, 이것이 이 책의 단점 중 하나이다. (글쎄, 그들의 생각이 곧 나의 생각이다. 라고 하면 할 말이 없지만, 그래도 너무 ctrl + v 포스가 느껴진다)

그는 책의 초반에 "정치논쟁"으로 변질되어 뉴라이트를 비판하는 우는 범하지 않겠다는 말을 한다. 이러한 다짐은 전반적으로 잘 지켜진다. 이 책에서는 최소한 뉴라이트를 "보수세력"이라서 개새끼 보듯 하는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수많은 좌파꼴통들(아니 이들을 좌파라고 할 수 있을까?)보다는 당연히도 훨씬 더 수준높고 세련된 비판을 보여준다.

하지만 문제는 그의 비판은 지나치게 남의 것을 차용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이 책에서 그는 상당부분을 뉴라이트의 역사관을 살펴보는 것에 할애하고 있는데 뉴라이트 역사관 비판의 근본적인 입장은 강준만이 [한국현대사산책]이라는 명저서에서 풀어나간 시각과 완전히 '동일하다'

[한국현대사산책]이 어느 한 극단의 이념에 사로잡힌 책은 결코 아니다. 강준만이 책 곳곳에서 보여주는 그 시대상을 보는 통찰력있는 식견을 한윤형은 자신의 생각처럼 재포장해 책에서 늘어놓는다. 여기서 이 책의 생명력은 죽어버리는 것이다. 예쁘고 그럴듯한 포장지를 버리고 보면 이 책이 가지고 있는 의의는 무엇인가?

'중립적입장'의 견지라는 강박관념은 책의 모든 부분을 지배하고 있는데, 이것이 자신의 의견이건, 아니면 이것 역시 중도좌파 인사들의 주장의 차용이건 간에 책을 지배하고 있는 이러한 강박은 오히려 너무나 의식적으로 "나는 쟤들과 똑같은 좌파가 아니예요!" 라고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듯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부각에 너무도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뉴라이트 비판을 위해 민족주의자를 먼저 비판을 하는 부분에서는 일견 나와 의견이 일치하는 부분도 많긴 하지만, 대체 무엇을 위한 책을 썼는가마저 헛갈릴 정도로 민족주의, 민족주의자의 비판에 상당량의 부분을 할애하면서 책 제목의 '뉴라이트'라는 단어는 단순히 상술 때문에 붙여놓은 것이 아닌가 할 정도로 지나치게 삼천포로 빠진다. 글 내용을 한 번 살펴보자. 한윤형은 임지현이 쓴 [국사의 신화를 넘어서]에서 이 부분을 발췌한다.

-20세기에 걸쳐 제국주의의 지배를 당했다고 해서 우리 조상들이 열성인자만을 유전하였다고 이야기함은 결코 아니다. 제국주의 지배체제 하에서 수많은 피지배 민족과 문명이 소멸하고 말았듯이 유전자의 구조가 아주 다르다면 융합은 불가능하거나 변종을 낳을 뿐이다. 그렇지만 필자는 우리의 근대사가 그러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의 전통 유전자 속에는 성공적인 융합을 가능케 한 우성인자가 성숙해 있으며, 그 복잡 미묘한 구조 속에는 근대 서유럽과 닮은꼴의 문명소가 실려 있다-

사회진화론의 냄새가 폴폴 풍기지 않는가? 유전자 자체로 한 국가의 문명을 판단하는 것이 대체 언제적 발상인가? 일단 첫 문장부터 우생학적인 분위기가 풍겨온다. '비판'을 위해 발췌해 온 이 부분을 보고 한윤형은 이렇게 말한다.

"서양 근대의 우월함을 자명한 것으로 인지하고 있다거나, 문명소를 유전자에 비유한다는 점에서 사회진화론의 냄새가 풍기기는 하지만, 이런 냄새에 대한 거부감을 제외하고 나면 나는 이영훈의 위와 같은 현실 인식에 대체로 동의한다"

난 이 문장을 몇 번을 읽어도 도통 모르겠다. '이런 냄새에 대한 거부감'이라 함은 원문 전체적으로 풍기는 사회진화론적인 냄새에 대한 거부감일 것이다. 그런데 또 한윤형은 이런 거부감을 제외하면 이러한 '현실 인식에 대체로 동의한'단다. 대체 이게 무슨 말인가? 원문은 사회진화론이라는 커다란 바운더리 안에서 풀어나가는 아주 위험한 발상인데 발상의 근본을 부정하면서 이같은 현실인식은 동의한다고?

그래. 백번 양보해서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동의를 하는지, 정확히 어떤 부분을 동의를 하는지 명시를 하고 자신의 주장에 대해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사람들을 설득시켜야 할 것 아닌가? 한윤형은 원문에 관해선 달랑 제 말만 던져놓고 다른 곳으로 간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부분이다.

국정교과서와 관련된 부분을 언급하는 부분에서도 나와의 의견 불일치는 나타나는데, 교과서, 특히 역사교과서는 이제 막 자의식이 성숙해가는 시점에서 배운다는 것도 그렇거니와 다른 어떤 방어막이나 시각이 없이 학생들의 머리속에 최초로 받아들이는 '정보'라는 측면에서 역사교과서가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은 더없이 중요하다.

이것은 좌편향적인 교과서가 좋으냐, 나쁘냐의 문제가 아니라 역사교과서는 어쩔 수 없이 이념지향적일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끝없이 논란이 될 수밖에 없다. 뉴라이트의 역사교과서 논란이 많은 사람들의 분노를 자아내고 있긴하지만 역사교과서에 대한 이런 뜨거운 찬반양론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좌파는 자신들의 입장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고, 우파 역시 자신들의 입장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다. 좌와 우의 갑론을박 과정 속에서 자신들의 이념에 잠식되어 사실을 왜곡되게 보았던 부분이 나올 수도 있고, 그런 부분을 점차 고쳐나가는 것이 역사교과서 논란 속에서 우리가 나아갈 궁극적인 길이다. (물론 이것은 좌파와 우파의 수준이 어느정도 '기본'은 되는 나라에 해당되는 이야기이지만 말이다)

한윤형은 역사교과서 논란의 중요성을 아예 무시하는 듯한 태도를 취한다. 아니 역사교과서 논란의 본질을 호도하고 있다는 듯한 느낌을 받기도 하는데 자신이 이런 태도를 보이는 이유랍시고 늘어놓는 말이 참으로도 가관이다. 자신이 이렇게 교과서 문제에 대해 안이하게 생각하는 까닭은 딱히 역사 교과서를 통해 역사관을 형성해본 일이 없는 개인적인 경험 때문이라는 것이다.

참 할 말이 없는 주장이다. 자신의 입장과 경험이 결코 모든 것을 대변하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이렇게 많은 사람이 '돈을 지불하고' 읽는 비판서에서 내 경험을 토대로 역사교과서 문제의 본질적인 부분을 아예 배제하겠다는 저러한 태도는 독자들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부족이 아닐까 싶다.

그는 뒤에서 "양 진영이 공히 역사 교과서 문제에서 헤게모니를 장악하면 '어떤 국민'을 만드는가 하는 문제에서 정치적 우위를 점할 수 있다고 믿는 것같아 조금 씁쓸하다"라며 역사교과서에 대한 자신의 소신을 밝히기는 했는데 뉴라이트가 그렇게 좌편향 교과서라고 주장하는 금성교과서로 공부한 학생들이 헤게모니에 장악당해 운동권이라도 됐는가? 이는 전적으로 뉴라이트를 위시한 극우세력들의 지난 10년 간의 '피해의식(?)'이자 일방적인 주장이다. 중립적 강박에 사로잡혀 좌파진영까지 "교과서를 통해 헤게모니를 장악하려는 악의 무리들"로 해석하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다.

이외에도 나와는 견해가 매우 다른 부분이 많이 있지만 글이 너무 길어질 것 같아 그만 줄일까 한다.

이 책은 태생이 '논란의 비극'을 가지고 태어난 책일 것이다. 일단, 현 한국사회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뉴라이트'라는 제목을 달고 나온 책이니만큼 논란은 피할 수 없다. 그런데 뚜껑을 열어보니 이 글을 읽고 치열한 갑론을박이 예상되는 부분은 '뉴라이트'에 관한 부분이 아니다. 되려 뉴라이트에 대한 비판적 견해는 이 책에서 극히 일부분이다. 말하지면 이책은 '좌파'를 견지한 민족주의자들을 향한 비판서라고 할 수 있다.

사실 글 전반적으로 나와는 의견이 일치되지 않는 부분이 많은 책이긴 하지만 한윤형이 뉴라이트에 관해 이런 식의 비판방법을 이용했다는 점은 매우 박수를 쳐주고 싶은 부분이다. 우리나라는 뉴라이트 논쟁에 '이성'이 개입할 공간이 거의 없다. 일단 그들이 일제를 들먹거리는 것 부터가 곧 정상적인 소통의 단절을 의미한다. 그들이 아무리 논리적으로 접근을 한다 한들 '일제'는 논란의 여지가 없는 것이고, 따라서 뉴라이트를 비판하는 대다수는 지극히 민족적인 감정에 호소한다. 논리가 없다. 그리고 그것은 놀랍게도 먹힌다(!)

이처럼 뉴라이트 논쟁의 일방통행이 난무하는 상황 속에서 한윤형은 상당히 위험한 길을 택했다. 감정에 호소하지 않음은 물론이요, 뉴라이트를 비판하기 위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매우 민감한 친일파와 민족주의를 우회하지 않고 정면으로 파헤친다. (내가 이러한 부분들을 읽으며 마음 한 구석이 불편했던 이유는 한윤형의 주장에 반대해서가 아니라 십 수년간 세뇌되어 떨어지지 않는 민족주의에 세뇌당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비록 이같은 정공법을 선택해 주장을 펼쳐나가는 과정에서 논리가 꼬이는 모습도 많이 보이고, 전문가가 아니다보니 주장의 이론적 근거가 상당히 떨어지는 부분도 발견되긴 하지만 김기협처럼 민족주의를 무기로 뉴라이트의 '논리'가 아닌 '이미지'를 난도질하는 치사한 짓은 하지 않는 다는 점은 참 마음에 드는 부분이다. 그리고 이것은 동시에 아쉬운 부분이기도 하다.

시간이 부족했던 것일까? 그리 얇지 않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급조되어 나왔다는 느낌이 많이 든다. 그리고 이 책은 '설득'이라는 측면에서 그 누구도 설득시키지 못할 것이다. 좌파진영에 있어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자신들에 대한 비판은 '맞는 부분'이 어느정도 있다 하더라도 한윤형의 배려없는 글쓰기에 내용이 눈에 들어오지 않을 것이고, 뉴라이트에게는 오히려 자신들의 논리를 더더욱 강고하게 관철시킬 수 있는 디딤대가 될 수 있는 책이 바로 이 책이다.

한윤형에게는 위트가 부족하다. 독기어린 시선으로 극좌파와 극우파를 신랄하게 까기로 마음 먹었으면 충분한 이론적 무기를 준비해놓고, 위트와 유머를 가미해야 한다. (난 적어도 이 책의 제목만 보고 센스있고 위트있는 비판을 기대했다) 한윤형은 이 책에서 자신만의 이론적 무기도 부족했을 뿐더러, 그저 자신의 주장만을 올곧게 고집하는 것에 집중한 나머지반대파들을 끌어당길 수 있는 위트와 유머를 완전히 상실했다. 책을 다 읽고 남는건 그의 서슬퍼런 독기, 또는 "그래! 너 잘났다!" 라는 조롱섞인 시선뿐이다.

그는 소통방법이 잘못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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