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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에서 시민으로 - 한국 민주주의를 이해하는 하나의 방법 ㅣ 돌베개 석학인문강좌 4
최장집 지음 / 돌베개 / 2009년 7월
평점 :
최장집의 글은 그다지, 아니 전혀 '감성적'이지 않다.
전문적인 용어들의 무미건조한 나열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어도
기름기, 그러니까 과장된 표현이나 그 어떤 미사여구도 찾아볼 수 없다.
소위 '먹힌다는' 지식인들의 필수 덕목인 위트나 재기발랄함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그렇지만 그럼에도 그의 글은 읽는 사람들을 '감성적'으로 만든다.
(그래, 이런 감정을 일반화시키기에는 무리가 있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랬다)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를 보며 얼마나 가슴 떨렸던가.
온갖 현학적인 용어가 난무하며 '앎의 과시'에 지나지 않았던
한국 현대사 정치를 집중적으로 바라보던 수많은 사회과학 서적들과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가 달랐던 점은 이렇게 전문적인 내용을
그만의 탁월한 시각을 통해 대중들에게 전달함에 있어
전혀 일반 대중에게 괴리감이 느껴지지 않는 '언어'로 설파함에 있었다.
이 책([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은 민주화에 대한 일종의 도전이었다.
그는 결코 돌려서 말하지 않는다.
"나는 민주화 이후 한국사회가 질적으로 나빠졌다고 본다"라는
도발적인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 책은 면죄부는 물론 사회적 특권마저
독점하고 있는 민주화 세대, 일명 386세대에 대한 치기어린 비판이 아니다.
그는 현재 한국의 정당 정치의 본질적인 문제점에 다가가기 위해
한국 현대사의 정치의 역사를 살펴본다. 그리고 민주화 이후에도 여전히
'갈등'을 '전체적'인 동질화로 희석시키는 현 정치를 따끔하게 꼬집었다.
개인적으로 '한국의 민주주의'라는 개념에 있어서 너무나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최장집 교수의 근작이 나왔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사실 약간은 걱정을 했던 것이 사실이다.
최근 MB정부에 대해 했던 발언들이나 글들을 보았을 때 '변절'까지는 아닐지라도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지식인 중의 한 명이라고 여겼던 내 생각과는
전혀 다른 시각 때문에 혼란스러웠었는데, 그런 혼란스러움이 이 책을 통해 가중이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책을 접하기 전 들었던 걱정의 이유였던 것 같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우려의 이유라면,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이후의 책들이 거의 [민주화...]의 바운더리 안에서
계속해서 '동어반복'에 지나지 않는 내용들이 꽤나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워낙에 [민주화...]에서 닦아놓은 이론의 토대가 견고하고 설득력 있다 보니
우려먹기의 유혹을 뿌리칠 수 없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다만 계속되는 같은 것의 반복은 원래의 의미와 영향력을
퇴색시킬 수도 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우석훈이 [88만원 세대]를 중심으로 가지치기하며
책을 쉴새없이 '찍어내는' 것도 같은 연유 때문일 것이다)
그래도, 지금 시대가 어느 때인가?
현 시대만큼 사회과학 서적이 '주목'을 받을 수 있는 시대도 흔치 않다.
김대중 정부, 노무현 정부 때에는 '신자유주의의 숙성기'였기 때문에
시장경제에 대한 여러 가지 비판적인 시각들이 나오긴 했지만,
최소한 '민주주의'라는 대의 안에서는 논란의 여지가 거의 없었다.
담론적 시각으로 접근하는 경향을 많이 보이는
사회과학 서적들이 설 자리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경제? 말 할 것도 없다.
정치? 장난하시나.
10년 만에 이제 '민주주의'의 본질적인 가치를 논하고 있다.
역설적인 말이지만 지금만큼 '책'이 사람들의 의식을 각성할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경향신문이 말했던 "지식인의 죽음"을
탈피하는 길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지금 현재 지식인은 그 어느 때보다도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야 한다.
이제 자신들만 알 수 있는 언어로 지껄이던 '고상한 수다 떨기'에서
뛰어나와 민중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래서 나는 최장집의 신작을 든 것이다.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이후로 그가 말 그대로 맛탱이가 갔다고 하더라도
최장집이란 지식인에는 최소한 자신의 입장을
침 튀기며 말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은 줘야 한다.
그것이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가 한국 사회에
끼쳤던 영향에 대해 보답하는 최소한의 예우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에 하나 그가 아무리 '시각'이 바뀌었고
사회를 바라보는 눈의 날카로움이 무뎌졌다 하더라도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라는 기본 베이스가
그의 주장의 전제에 있기 때문에 그것이 멍멍이 소리일 리는 없다.
참 길다 길어.
서론이 참 길다.
그래서 내용이 어떠냐고?
이 책은 촛불세대로 시작한다.
그는 촛불 집회 때 잠식당한 '담론'의 소외를 먼저 꼬집는다.
그는 소위 말하는 "진보파, 개혁파들이 갑작스럽게 정치에
관심을 회복한 것이 작년 여름의 '촛불 집회'"라고 말한다.
그동안 숱하게 겪어왔던 그놈의 '회의'와 '의심'때문에 변방에 있다가
어라? 이것 보게? 점점 더 뜨거워지는 촛불을 보며
과거의 그 씨니컬 함을 잠시 가슴에 묻어두고
"갑자기 '대중을 찬양'하고, 한국 민주주의를 신격화 한다."
여기서 그들은 '희망'을 발견했다고 하지만
그들이 '촛불'을 정치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해 놓고서
막상 자신들은 민주주의의 거룩함을 들먹이면서 촛불의 정치화를 거부한다.
그래서 결과는?
자신들은 심리적인 만족을 얻었을지언정 촛불은 '현실'로 바뀌지 않았다.
"촛불은 그저 신화가 되었다. 촛불은 촛불주의로 끝났다."
결국? 보통사람들이 실천할 수 있는 '직접'민주주의는 멀어져갔다.
이것이 그가 2008년 6월의 촛불을 바라본 시각이다.
나는 촛불의 '신화론'에 대해 진보개혁파들의 절대적인 책임은
아닐지라도 막중한 책임이 그들에게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에
최장집의 이 의견에 대해서는 절대적으로 동감한다.
이건 "우리는 할 만큼 했다"라는 자위를 바탕으로 한 결과론적 책임회피가 아니다.
그때 우리는 할 만큼 했다는 차원을 넘어서 '민주주의'라는 인류 역사상 최대의
가치체계 안에서 할 수 있는 가장 합법적이고 가장 혁신적이고 가장 고차원적이고
가장 우아한 방법으로 우리의 '목소리'를 표출했다.
직접 민주주의는 저 먼나라 이야기에 불과한 우리나라에서,
소수 엘리트가 권력을 독점하고 행사하는 짝퉁 민주주의 안에서,
"선거철이 지나면 인민의 가치는 휴지조각이 된다"라는
루소의 200여 년 전 말이 여전히 유효한 이 땅에서
믿기 힘들 정도로 성숙한 시민의식을 바탕으로
그 여름밤을 얼마나 아름답게 수놓았던가.
우리는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 '폭력'만 빼고 말이다.
정부 역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 '폭력'을 포함해서 말이다.
이쯤 되면 소위 말하는 진보개혁세력들은
'감탄'이 아니라 대안을 제시했어야 했다.
외신들과 똑같이 넋 놓고 감탄하고 있으면 어쩌자는 건가?
정부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모든 방어책과 대응책을 민중들 앞에
들이대고 있을 동안 그들이 한 건 도대체 무엇인가?
그저 계속되기만을 바라는 마음?
지금은 87년이 아니다. 혹시 그들이 정말로 혁명주의에 빠져
시위 군중들이 청와대에 들어가 대통령을 끌어내리기만을
바라고 있었던 건 아니었겠지?
2008년의 여름을 지나며 대중들이 얻은 건 냉소주의다.
마치 해방 후 9월 총파업과 대구 항쟁을 거치며 이루 말할 수 없는
탄압을 받으며 보수화와 동시에 냉소주의에 휩싸인
과거 우리나라의 농민들처럼 말이다.
"6월의 기억"은 이젠 그저 '향수'가 되었다. 그때를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현재에 대한 자괴감만 늘어간다. '우리가 정말 저랬구나. 다시 할 수 있을까.
안 될 거야. 바뀌지도 않는데 뭘.' 이렇게 될 동안 그들이 한 건 도대체 뭔가?
최장집은 이 책에서 "'촛불이 신화가 되길 바라는 이들'에게
나의 이 책은 실망스러울 것"이라고 말을 한다.
그는 결코 촛불의 낭만주의에 빠져 "다시 한번!"
이라는 케케묵은 구호를 남발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현재의 냉소주의를 걱정하며, 이에 대한 근본적 원인은
촛불'과 같은 한 번 씩 터지는 집단적 분출을 민중들에게서
유발할 수밖에 없게 하는 정치적 무능력, 현실 정치의 실패에 있다고 말한다.
역시 최장집은 민주주의의 위기를 '정치'에서 찾는다.
사실 이것은 가장 현실적인 개선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현실적인 정도와는 별개로 그것이 개선되기까지는
수많은 조건과 역량이 수반되어야 하겠지만 말이다.
이 책을 관통하는 하나의 커다란 키워드는 '갈등'이다.
"정치의 본질은 권력의 문제를 다루는 데 있다.
권력의 문제는 갈등의 문제로부터 불러들여 진다"
정치라는 세계가 참 미묘한 것이 인간관계에서 갈등은
그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무난히 풀 수 있는 방법이 있다.
툭 터놓고 술 한 잔 마시면서 서로 속마음을 내뱉으며 푼다던지,
옥신각신하면서 갈등의 감정이 중화된다던지 하는 것들로.
그러나 정치란 것이 어디 그런가?
정치에서의 갈등은 수많은 이해관계가 얽혀 있어
그 매듭을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지 모른다.
따지고 보면 인간관계의 거시적인 차원이 정치라지만
'인간의 본성'이라는 복잡 미묘한 것, 다시 말해 '권력'이라는
무시무시한 추상체가 갈등의 개념에 섞여 들어가면
매듭은 수없이 증가한다. 그 시작점을 모를 정도로.
이런 면에서 본다면 민주주의는 어쩌면 '유토피아'에 불과한 개념일지도 모른다.
"민주주의와 이론과 제도는 갈등의 타협을 통해 잠정적으로
해소될 수 있다고 보는 관점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유토피아에 도달하기까지의 여정이 너무나도 힘들기때문에
엘리트, 권력자들은 편한 방법을 간혹 선택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유토피아를 실현했다고 믿는다.
갈등 없는 무균질 사회, 청정 민주주의를 실현했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것은, 즉 갈등의 요소를 원천 봉쇄한 그 사회를
우리는 '전체주의'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그래서 우리 사회에는 '갈등'이 필요한 것이다.
우리 사회가 갈등이 없다고는 말 할 수 없다.
오히려 현재 우리 사회는 갈등이 난무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어느 사회보다도
민주주의의 발전 조건에 더더욱 가까운 것이 아닌가?
그럼에도 현재 우리 사회가, MB정권이 점점 더 민주주의와
멀어져가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최장집은 그것은 "갈등의 사회화"라는 것의 취약성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갈등의 사회화는 보다 많은 이해 당사자들을 정치에 관여하게 함으로써
정치과정에서 이루어지는 권력의 행사를 부당하게 만들며,
법 앞의 평등을 포함하는 법 적용과 집행의 보편성을 구현하는 데도 기여 한다"
우리 사회는 갈등까지는 충분히 차고 넘치지만
이러한 갈등이 '사회화' 되기까지는 터무니없어 보인다.
왜 그런 것인가? 대의제 민주주의에서 갈등의 사회화는
오로지 정당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소수 엘리트의 '갈등'은 한나라당과 민주당 등
소위 말하는 메이저 정당을 통해 구현된다.
국회를 보라. 매일 싸우지 않는가.
서로 자신들의 입장을 내세우면서 갈등을 조장하지 않는가.
그러나 일반 민중들의 보편적인 입장에 귀 기울이고 대변하는
순수한 의미의 '좌파'정당은 우리나라에 전무할 뿐더러 좌파를 표방하는 정당,
즉 민주노동당이나 진보신당의 국회에서의 파워는 너무나 약하다.
아니 근본적인 문제는 그들 정당들이 진정으로
민중의 입장을 대변하는 정당이 아니라는 점이다.
노동자들은 민주노동당을 지지하지 않는다.
이것은 '정치의 무관심'과 '냉소주의'라는 민주화 이후
한국 현대사의 전통적인 습성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그만큼 민주노동당이 대중들과의 교감에 서투르고 대
중들의 요구에 무지하다는 것을 반증하는 현상이다.
최장집은 말한다.
"민주주의는 사회 균열로부터 발생하는 갈등을 억압하기보다는 민주적인
방법으로 표출하고 해소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발전하는 정치체제"라고 말이다.
그러나 "한국 사회의 지배적 담론, 교육, 사회화의 규범이 되는 내용들은
대체로 갈등을 부정하면서 사회 통합을 강조하는 덕목과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바로 이것이 문제인 것이다.
시민사회의 발전, 풀뿌리 민주주의가 근본이 되어
발전한 민주주의가 아니라 국가가 중심이 되어,
국가가 그 모든 것에 선행해서 존재한 이후 발전한 민주화,
민주주의 국가는 필연적으로 국가에 예속될 수밖에 없다.
국가에 예속된다는 것은 '통합'을 뜻하고 그것은 갈등의 원천적 뿌리를 봉쇄한다.
우리는 '국가'라는 커다란 존재 아래 갈등 요소들을 꾹꾹 눌러 담고 휩쓸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민주화의 가장 큰 문제점은 이런 것이 아니다.
'국가'는 언제나 늘상 인민보다 선행되어 왔다.
최장집은 한국의 민주화에 있어 가장 큰 문제점은 '시민사회의 분리'라고 말한다.
"민주주의 공고화 과정에서 나타난 민주화운동의 중요한 특징은
정치적 문제나 사회경제적 문제에 있어 중산층적 관심사에 초점을 둔
지식인, 전문가 중심의 시민운동과 노동자, 농민 같은 생산자 집단 중심의
민중운동이 분화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시민운동이 '갈등의 사회화'라는 민주주의의 커다란 발전 요소를
체계화 시킬 수 있는 활동이라는 점에서 커다란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시민운동에 있어서 계급적 분화는 결국 민중들의 '갈등'을
'사회화'시킬 수 있는 길을 원천봉쇄하는 최악의 상황을 만들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최장집의 결론은 무엇인가.
"민주주의를 발전시키기 위해 민주주의의 제도화된 정치 과정을 이해하고
이를 바탕으로 정치적 힘을 조직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결론은 이것이다.
너무 원론적이라고? 어쩔 수 없다. 그 무엇이든지 이론은 이론일 뿐이다.
어차피 현재 우리 사회에서 어떤 말을 한들 원론적이지 않을 이야기가 있을까?
지금은 '원론'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것은 케케묵은 '담론 투쟁'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민주주의의 기본권이 위협되고 있는 이 시점에서 우리는 별로 논쟁할 건덕지가 없다.
두 지도자의 과거 민주정부 시절
우리가 논의한 대상은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논쟁이었다.
비록 입장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서로의 공통적인 목표는
'더 나은 사회로의 발전'이었던 것임은 분명하다.
지금 역시 우리는 '더 나은 사회로의 발전'을 꿈꾸고 있다.
그러나 누군가 우리에게 현재 한국 사회에 바라는 것이 있다면?
이라는 질문을 했을 때 저런 추상적인 대답은 많이 나오지 않을 것이다.
'서민경제의 발전'이라는 대답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 대답 중의 하나일 테고,
과거 10년과 지금 저 물음에 대한 대답의 예상 답안 중
추가될 것이 있다면 '민주주의 가치의 정립'이라는 답안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것은 진정한 '독재'를 경험해보지 못한
20대들의 조급한 판단에서 나오는 치기어린 생각에 불과한 것인가?
나는 결코 그렇지 않다고 본다.
'진정한 독재'를 경험해 본, 그리고 지금 20대들의 민주주의 조루증을
조롱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그들'이 간직하고 있는 '특권의식'은
자신들의 20대 시절의 현실을 최대한
절망적으로 해석하는 데 그 바탕을 두고 있다.
그 시대에도 우리는 뱃지를 떼고 길거리로 뛰어나가 민주화를 부르짖었다며....
그래서 뭐?
그것은 당신들이 민주화에 대한 특정한 DNA를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이아니라
단지 그 시대의 시대적 상황에 젊은이들이 대응해야 했던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이다.
니들이 지금 그렇게 한심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20대들 역시
니들과 같은 상황에 처해있다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이 말이 억지 같고 졸렬한 자기위안에 불과한 것 같다고? 뭐 좀 그러면 또 어떤가?
"80년대 그 청년들이 오늘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의 9할을 주었다"며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낭만주의에 빠져서 끊임없이 자기네 세대들을
신격화 시키는데 여념 없는 김규향 같은 인간도 있는데 우리 처절한 이 시대에
나 같은 20대 하나가 니들 세대를 빗대면서 우리 세대를 자위한다고 문제 될게 있나?
결론적으로 우리 사회는 '갈등'은 많은데 제도화가 부족하다.
우리는 우리의 목소리를 내고 싶은 정당을 필요로 한다.
아무리 원론적인 이야기를 한다고 지겨워하면 뭐하나. 바뀌는 것이 하나도 없는데.
그래서 이 책에서도 이어지는 최장집의 [민주화...] 이후의
동어반복이 '여전히'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나는 더이상 최장집의 똑같은 말을 보고 싶지 않다.
지겹다.
언제나 똑같은 이야기 뿐이지 않은가.
이제 이런 원론적인 이야기만 반복하는 책은 그만 나와야 한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언제나 이러한 똑같은 이야기에 귀 기울여지게 만들고 있다.
과거보다 현재가 더욱 더.
이것이 우리사회의 가장 큰 비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