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이성부 지음 / 창비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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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번잡한 세상을 떠나 산에 묻히고 싶은 충동을 누구나 한번쯤 느껴보았을 것이다. 산은 현실의 피난처나 은신처가 아닌 마음의 또 다른 고향이다. 왠지 친근하고 포근한 기분이 들면서 위로 받을 수 있고 또 행운이 따른다면 세상을 이길 수 있는 새 힘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친한 동료들과의 산행보다 혼자 호젓하게 걸을 때 더욱 그러하다.

이성부 시인의 <지리산>은 오랜 산행 경험 끝에 얻은 귀중한 삶의 결정체요 보석이다. 산을 오르는 일은 사심을 버리는 일이다. 시를 쓰는 일도 사심을 버리는 것이다. 시인은 시를 버리고 산에 전념함으로써 다시 '지리산'이라는 연작시를 쓸 수가 있었다. 산으로 말미암아 다시 시를 되찾은 셈이다.

'지리산'의 빼어난 점은 산을 현실에 대한 단순한 도피처나 은일처로 바라보지 않는다는 점이다. 시인은 대성골에서 빨치산의 비트를 찾아내며, 이현상과 정순덕을 만나며 숱한 사람의 역사를 찾아낸다. 여기엔 '사람의 삶·풍속·인문·사상·언어가 있'고 산의 희로애락이 숨어 있다. 사람의 역사를 찾는 비결은 '산을 바라보는 요령'에서 비롯된다. '나뭇꾼이 먼산 바라보는 것과/ 선비가 먼산 바라보는 것이/ 어떻게 다를까/ 점필재는 산 바라보는 데에 요령이 있다고 말하였다'('유두류록이 헤아리는 산')

산의 모습은 결코 서두른다고 보여지는 것은 아니다. 산을 단지 오르고 정복하는 대상으로 바라볼 것이 아니라, '정신의 먹이를 찾는' 성스러운 곳으로 바라보며 한발짝 뒤로 물러날 때 산은 어느새 우리 곁에 친근하게 와 있게 된다. '지리산을 여러 차례 오르내렸는데 그 모습 모르고만 다녔다 이 골 저 골 이 등성이 저 등성이 많이 더투고 헤집고 돌아다녀도 그 산은 저를 보여주지 않았다 (중략) 사랑하는 것들 멀리 떨어져 바라보아야 더 잘 보이느니'('보석')

또한 산을 바라보는 요령에는 주체적 시각이 필요하다. 우리의 산천을 '산경표'에 의거한 마루금과 물줄기로 바라보며, 남명선생을 비롯 여암이나 점필재, 매천 도선국사의 사상을 되새겨보는 것도 선인과의 살아 있는 대화요 과거와 현재의 교감인 것이다. '하늘이 울어도 산은 울지 않는다는/ 크고 넉넉한 마음/ 벼슬길 마다하던 그 까닭 알겠거니/ 소인배 들끓는 세상에서는/ 군자가 저를 감추어 더/ 고요해지는 일 내 알겠거니'('남명선생')

시인의 시선은 한걸음 나가 지리산 계곡과 능선 곳곳에 묻혀있는 민중들의 아픈 역사와 처절한 투쟁에 주목한다. '오십년 전에도 백년 전에도 오백년 전에도/ 좌우 저 골짜기 속의 아비규환 피비릿내/ 이 봉우리는 굽어보며 얼굴을 찡그리다가/ 두 주먹 불끈 쥐다가 마침내 눈물을 쏟았을 것이다/ 오늘은 내가 땀 범벅이 된 얼굴로/ 그 울음에 내 볼을 비빈다'('통곡봉은 아직 울음을 그치지 않았는가') 시가 어찌 대자연의 아름다움만 노래한다해서 시가 되겠는가. 당대의 현실을 균형 있게 바라보는 안목이야말로 시의 또다른 미덕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시에서도 안일과 안정과 안주는 경계의 대상이듯이 시인이 산을 오를 때도 편안한 길보다는 암벽 같은 어려운 길을 더 선호하게 된다. 삶이든 문학이든 어려운 역경과 고난을 거쳐 열매를 맺게 될 때 희열은 배가되고 그 결과는 더욱 값진 것이 된다. 산을 좋아하는 이들이 산에 오르는 이유중의 하나가 여기에 있다.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지리산을 오른다. '지리산'을 배낭에 넣고서 큰산의 넉넉함을 배우는 심정으로 때로 육신과 심신이 고달플 때 정상에서 시를 펼쳐보면 내 마음 속 산 하나에 이르는 길이 아스라이 손에 잡힐 것이다.

올 가을엔 다시 지리산으로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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