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바다 성산포
이생진 지음 / 동천사 / 198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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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바다 성산포> 전편을 관통하는 주제는 그리움과 고독과 외로움이다. 하지만 그것은 칼로 물을 베듯 시를 읽고 나면 그리 오래 기억되지 않는다. 바다를 비롯한 대자연은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듯이 언제나 인간에게 인자한 것이 아니라 때로는 무자비한 것이며 선망의 대상이자 두려움의 대상인 것이다. 간혹 바다로 인한 슬픔이나 죽음에 대해 시적 화자가 말하는 것도 깊이를 알 수 없는 저 푸른 바닷물처럼 망연하고 태연자약해서 도무지 눈물이 나지 않을 정도이다. 간간이 시집 속에 나오는 삽화처럼 하나의 대상처럼 보일 뿐이다.

70년대 말 그 암울했던 시기를 생각해보면 누구나 한번쯤 술병을 차고 세속을 떠나 바다와 같은 대자연 속에 은일하고 싶은 충동도 있었을 것이다. '술은 내가 마시는데 / 취하긴 바다가 취하고'('술에 취한 바다')라는 구절에서 주체와 객체가 전도된 상황이 단순히 취중의 상황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행간의 숨은 뜻도 있으련만 시적 호흡의 너무 완만하여 독자의 생각이 거기에 미치는 것을 애써 파도처럼 지워버린다.

시집 후기에서 시인 자신이 밝히고 있듯이 작가는 해마다 여름이 되면 책 몇 권과 그림도구를 지닌 채 여러 섬을 여행했는데, 바다를 바라보며 망망대해 같은 많은 세월 동안 파도와 맞서 견뎌온 기암절벽을 보고서 자신이 그 바위와 같다는 생각을 많이 했으며 그 때의 주체할 수 없었던 감정을 시로써 나타낼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이런 시인의 형용할 수 없는 감정과는 달리 <그리운 바다 성산포>는 의외로 4·4조의 기본 리듬을 바탕으로 짧은 행으로 정갈하게 마감된 시편들이 많다. 우선 시적 리듬을 살릴 수 있어 좋고, 암송에 적당한 분량이며 적절한 여백처리가 바다처럼 여유 있게 보인다. 아마 이 점이 이 시집이 지니는 장점이 아닐는지 모르겠다. 또한 비슷한 유형의 이미지를 이용하여 감정의 가파른 기복을 없애면서 읽는 이의 부담감도 줄이고 있다. "해도 달도 바다에 눕고나니 / 밤이 된다 / 하는 수 없이 나도 / 바다에 누워서 / 밤이 되어 버린다"('낮에서 밤으로') 평범하면서도 무리하지 않는 작시법이 앞서 말했듯이 단점이 되어 부메랑처럼 돌아온다.

우리네 인생사도 삶의 기복이 있고, 때론 슬플 때와 기쁠 때가 있는 법, 대자연인 바다도 파도가 흉용할 때가 있는가 하면 거울 같이 잔잔할 때도 있는데 <그리운 바다 성산포>는 너무나 목가적이고 자연적이다. 그러기에 시를 읽노라면 마음이 상쾌하고 후련하지만 읽고 난 후엔 마음 속 깊이 오랫동안 메아리치는 잔잔한 감동이 없다.

성산 일출봉에서 우도를 바라보며 읽는 시가 바다에 뿌려져 바다에서 나오는 시가 될 것이 아니라, 성산읍 쪽을 바라보며 제주 잠녀들의 아픈 속내와 '순이 삼촌'의 슬픈 역사도 한 잔 술에 얘기할 수 있는 시가 되면 좋으련만,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기엔 지나온 세월이 무심하다. 초판이 간행된 지 20여 년이 지난 지금 세월의 간극이 크다할지라도 넘어야 할 제주의 역사는 여전히 숙제로 남아 있다.

다시 무더운 여름 휴가철이다. 시집 몇 권과 노트북을 들고 조용한 산사를 찾겠다는 당초의 생각을 접고 저 세간의 저자거리로 내려간다. 평생의 화두가 저자거리에 있는 것을 또 어찌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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