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채식주의자 : 한강 연작소설
한강 지음 / 창비 / 2014년 7월
평점 :
판매중지


무척 기운 빠지고 당혹스러운 작품이었습니다

 

"고기 때문이야

너무 많은 고기를 먹었어.

그 목숨들이 고스란히 그 자리에 걸려 있는 거야.

틀림없어.

피와 살은 모두 소화돼 몸 구석구석으로 흩어지고, 찌꺼기는 배설됐지만, 목숨들만은 끈질기게 명치에 달라붙어 있는 거야"

 

 

이 부분을 읽을 땐, 정말 명치에서 목까지 뭔가가 다닥다닥 달라붙어 꽉 막힌 것처럼 가슴과 목이 메어 왔습니다

전철 안에서 이 부분을 읽다가 환승역에서 갈아타려고 에스컬레이터에 서 있는데... 정말이지 잠깐은 숨을 쉬는 것조차 부담스러울 정도였어요

 

 

 

끔찍하고 가슴이 먹먹해 지는 이야기이지만, 어딘가 현실과 맞닿은 곳이 있어 더 몰입하게 되었던 거 같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평범한 여자로 보이는 그녀와 결혼한 것은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예쁘다거나, 총명하다거나, 눈에 띄게 요염하다거나, 부유한 집안의 따님이라거나 하는 여자들은 애초부터 나에게 불편한 존재일 뿐이었다.

내 기대에 걸맞게 그녀는 평범한 아내의 역할을 무리 없이 해냈다."

 

 

없는 얘기 아니잖아요!

평범한 배우자의 역할을 무리 없이 해내는 성실한 배우자

불꽃 튀는 열애 끝에 결혼한 커플도 결국엔 "평범하고 성실한 배우자"로 안착하는 것!

그래서 더욱 영혜의 세상과 현실 사이의 거리는 가깝게 느껴지고 가슴이며 목이 콱 막히는 메임이 있었던 거 같습니다

 

 

폭력이 난무하는 환경에서 다름을 인정받지 못 하고 자라, 결국엔 그 모든 걸 거부하게 되는 여자 영혜

고기뿐 아니라 일체의 음식을 거부하는 데까지 도달하게 된 건, 모든 폭력과 역할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강렬한 열망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그제야 그는 그녀의 표정이 마치 수도승처럼 담담하다는 것을 알았다.

지나치게 담담해, 대체 얼마나 지독한 것들이 삭혀지거나 앙금으로 가라앉고 난 뒤의 표면인가, 하는 두려움마저 느끼게 하는 시선이었다.

단지 옷을 벗고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한폭의 춘화를 보듯 그녀를 보았던 자신을 그는 자책했다."

 

 

보는 이로 하여금 가졌던 욕망마저도 잊게할 정도의 담담함

그것은 거저 나온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 남편의 형태만 다른 폭력들로부터 오랜 기간 지속되어 온 자신의 존재감에 대한 무시?를 벗고자 하는 강력한 의지에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었을까요

그런데 그 시작은 반항도 악다구니도 타협도 아닌, 자해를 동반할 정도의 극단적인 거식과 탈의라는 제3의 길이었습니다

모든 폭력과 제약으로 부터 벗어나려는,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매너와 인간 사회의 보편적 習에 대한 거부!

 

 

"모든 욕망이 배제된 육체, 그것이 젊은 여자의 아름다운 육체라는 모순, 그 모순에서 배어나오는 기이한 덧없음, 단지 덧없음이 아닌, 힘이 있는 덧없음.

넓은 창으로 모래알처럼 부서져 내리는 햇빛과, 눈에 보이진 않으나 역시 모래알처럼 끊임없이 부서져내리고 있는 육체의 아름다움....

몇마디로 형용할 수 없는 그 감정들이 동시에 밀려와, 지난 일년간 집요하게 그를 괴롭혔던 성욕조차 누그러뜨렸던 것이었다."

 

 

집요한 성욕조차 누그러뜨릴 정도의 위력을 가진 덧없음이 깃든 (욕망이 배제된) 육체

그것은 단호할 수 밖에 없었던 선택에 의한 결과였습니다

그럴 수 있었던 건 나이가 먹도록 엉덩이 한쪽에 남아있던 몽고반점처럼 그녀 안에 희미하게 내재된 또 다른 원초적 힘이었습니다

 

 

"약간 멍이 든 듯도 한, 연한 초록빛의 분명한 몽고반점이었다.

그것이 태고의 것, 진화 전의 것, 혹은 광합성의 흔적 같은 것을 연상시킨다는 것을,

뜻밖에도 성적인 느낌과는 무관하며 오히려 식물적인 무엇으로 느껴진다는 것을 그는 깨달았다."

 

 

그리고 그 힘은, 경우에 따라 섬세하고 예민해서 그 힘을 느낄 수 있는 사람에게 전염되기에 이릅니다

 

 

"그가 그녀의 안으로 들어갔을 때, 짓무른 잎사귀에서 흐르는 것 같은 초록빛 즙이 그녀의 음부에서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향긋하면서도 씁쓸한 풀 냄새가 점점 아릿해져 그는 숨을 쉬기 어려웠다.

절정의 직전에 가까스로 몸을 빼냈을 때, 그는 자신의 성기가 온통 푸르죽죽하게 물들어 있는 것을 알았다.

그녀의 것인지 그의 것인지 모를 싱그러운 즙으로 그의 아랫도리와 허벅지까지 시퍼런 풀물이 들어 있었다."

 

(설마.... 물감이잖아~ ... 이럴 분은 안 계시겠죠? ^^ㅋ)

 

 

"무슨 거인 같은 게 번적 들어올려서 다른 세계로 옮겨 놓은 것 같"이, 그 힘에 전염된 형부 역시 사회적 선을 넘어서고, 언니 내외의 관계는 파국을 맞게 됩니다

 

 

영혜는 종국에 나무가 되기를 꿈꿉니다

형부가 그려준 그 꽃이며 이파리, 줄기 그림이 그녀의엉덩이에 남아있던  푸른 몽고반점과 어우러져 그녀 안에 내재되어 보관되던 정체성?에 대한 갈구를 깨워 냅니다  (미쳐?가는 속력에 가속도가 붙는...)

 

"이렇게 하고 있으니까 꿈을 꾸지 않아요. 나중에 지워지더라도 다시 그려주면 좋겠어요"

 

가고 싶은 방향을 찾아낸 영혜는 더 이상의 망설임 없이 나무가 되겠다는 생각을 굳히게 되죠

 

 

 

 

앞의 두 챕터에 비해 세 번째 <나무 불꽃>은 비교적 거리를 두고 담담하게 읽을 수 있었던 거 같은데요~

 

 

저는 그 부분을 읽으면서, 저는 제 주변 사람들을 돌아 보았습니다.

20대 초반까지는 모두 고만고만 비슷하더니 마흔을 넘어가니 저마다 제 나름의 다양한 사연 하나씩들을 안고도 대견하게 살아내고 있는 제 친구들 말예요

파혼, 부도, 신용불량, 암투병, 이혼, 사별, 싱글맘, 그리고 단어로 규정할 수 없는 아픔이라는 亡子까지...

길에서 마주치는 평범한 아줌마, 직장인들인데 영혜의 언니처럼 인생의 사건 사고 속에서도 상처를 짊어지고 꿋꿋이 살아낸 내 자랑스런 친구들

 

 

누군가 하나 자세히 들여다 보면 짧막한 소설 한 편은 묻고 살 법도 해 보입니다

그래서 소설 속 이야기는 때로 현실보다 더 현실같은 느낌을 받게 되고 때로 전율하게 되는 걸까요?

 

 

같은 환경에서 자랐지만, 영혜와 다른 타협을 선택한 "언니"의 삶도 그리 녹록치는 않았습니다

좀 비겁할진 몰라도 살아내야 하는 절박함에 "언니"와 같은 선택을 하며 살고 있을지도 모르는 현실의 모습이 조금쯤은 불편해집니다

하지만 어쨌든 세상엔 "영혜"보다 더 많은 "언니"들이 살고 있습니다

 

 

"문득 이 세상을 살아본 적이 없다는 느낌이 드는 것에 그녀는 놀랐다.

사실이었다.

그녀는 살아본 적이 없었다.

기억할 수 있는 오래전의 어린시절부터, 다만 견뎌왔을 뿐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선량한 인간임을 믿었으며, 그 믿음대로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았다.

성실했고, 나름대로 성공했으며, 언제까지나 그럴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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