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워요, 투우사여 ㅣ 암실문고
페드로 레메벨 지음, 임도울 옮김 / 을유문화사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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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쓴 개인적인 감상입니다*


책장을 펼치자마자 향이 먼저 끼쳤다. 싸구려 향수와 자수실, 그리고 화약 냄새가 뒤섞인 향. 산티아고의 가난한 골목에서 부자들의 식탁보에 꽃을 수놓으며 사는 '변두리의 여왕'의 방 안 풍경이 그렇게 코끝으로 먼저 다가왔다.


이 소설을 읽는 내내 나는 자꾸 숨을 참았다. 문장이 쉼표도 없이 길게 이어지는데, 그 호흡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인물의 머릿속에 들어가 앉아 있는 기분이 든다. 화려하고 과잉되고, 어딘가 키치한 문장들. 처음엔 적응이 더디지만, 이상하게도 그 장식적인 언어가 슬픔을 가리는 천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온다. 슬픔을 직접 말하지 않고, 비즈와 깃털 뒤에 숨겨두는 방식.


변두리의 여왕은 카를로스를 사랑한다. 처음 느껴보는 종류의 감정에 자신을 통째로 내맡긴다. 하지만 카를로스에게 그 집은 사랑의 자리가 아니라, 독재자 암살을 준비하는 동지들의 안전가옥일 뿐이다. 한쪽은 전부를 걸고, 다른 한쪽은 필요해서 곁을 둔다. 이 어긋남이 너무 또렷해서 가끔 책을 덮고 숨을 골라야 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피노체트와 그의 아내가 등장하는 장면들이었다. 거리에서는 사람이 끌려가는데, 같은 시각 대통령궁에서는 부부가 미용사 문제로 다투고 있다. 그 적나라한 병치 앞에서 나는 어떤 직접적인 비판보다 더 서늘한 기분을 느꼈다. 권력자의 사생활을 이렇게 가까이 들여다보는 시선이 가능하다는 것 자체가, 이 작가가 얼마나 두려움 없이 썼는지를 보여준다.


이 책에서 자꾸 떠오른 건 다른 시대, 다른 나라였다. 1980년대 한국. 군홧발 소리와 시위, 감시와 도청, 그리고 그 사이에서도 멈추지 않는 사람들의 생계와 사랑. 칠레 산티아고의 1986년이 낯설지 않았던 건 그래서였을 것이다. 억압이 개인의 가장 사적인 감정까지 침범할 때, 사람들이 어떤 방식으로 버텨내는지는 시대와 장소를 넘어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소설 후반, 변두리의 여왕이 던지는 한마디가 있다. "사랑해 카리뇨, 내 작전도 실패했다는 거 알아?" 이 문장 하나에 책 전체가 응축돼 있다고 느꼈다. 정치적 거사도 실패하고, 사랑도 결국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실패가 비극으로만 남지 않는다. 어딘가 따뜻하고, 동시에 시리다.


280쪽이라는 분량이 끝나고 나서도 한동안 책을 손에서 놓지 못했다. 라틴아메리카 퀴어 문학의 고전이라는 수식어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사랑 이야기로 시작해서, 한 시대의 공포 전체를 통과하게 만드는 소설. 마지막 장을 덮을 즈음엔, 시작할 때와는 분명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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