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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을 알면 영어가 산다 - 번역 방법론
김옥수 지음 / 비꽃 / 2016년 9월
평점 :
<한글을 알면 영어가 산다>는 저자의 공력이 살아있는 책이다. 이 책은 한국인이 영어를 한글로 옮길 때 부닥치는 문제들을 정갈하게 해소시켜준다. 책 속에는 당연히 예문이 많이 등장한다. 영어에서 모습을 바꾼 한글 번역문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맵시를 자랑한다. 책을 읽으면서 ‘그렇군’ 하면서 감탄한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저자 김옥수는 영어 전문번역가다. 스무 살부터 영어에 빠져서 10년을 보내고 이후 30년 동안 영어를 우리말로 번역했다. 이렇게 번역한 책이 300여권. <한글~>은 이 같은 세월에다 원숙기 무렵 한겨레문화센터에서 영한번역수업을 진행했던 경험을 오롯이 담았다. 김옥수가 옮긴 한글 번역문은 쉽고 뜻이 분명하다. 덕분에 마치 우리에 내재한 ‘한글 DNA’에 착착 감겨드는 듯하다.
책갈피 어느 곳일지라도 조금이라도 어색한 데를 찾지 못했다. 저자는 번역생활 25년에 들어서면서 본격적으로 한글공부를 시작했다고 한다. 오랫동안 100여 편이 넘는 번역 관련 논문과 서적을 탐독했다.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저자는 영어만 잘 하지 않고 우리말도 잘 하는 것이다. 이쯤에서도 책제목이 전하는 주장을 고스란히 실증하는 셈이다. 빠트릴 수 없는 요점을 정리해 보자. 영어는 명사 중심이고 우리말은 동사 중심이다. 그래서 영어는 형용사가 발달하고 한글은 부사가 발달했다. 영어는 열두 시제가 발달했다면 우리말은 시제 대신 시간부사가 발달했다. 이러한 이론적 바탕을 실천에 옮긴다면 좋은 번역문이 나온다. 일례로 “많은 사람들”이 영어식이라면, “사람이 많다”가 우리말다운 표현이다. ('많다' 자체가 복수, '들'은 뺀다)
이와 관련하여, 감탄했던 예문 하나를 꼭 적고 싶다. <크리스마스 캐롤>에 나오는 원문이다.
The ancient tower of a church, whose gruff old bell was always peeping slily down at Scrooge out of a Gothic window in the wall, because invisible(...)[105쪽] 명사 ‘성당종탑’을 기다란 문장이 수식한다. 이를 어떤 ‘전문가’는 이렇게 옮겼다.
-고딕양식 창문사이로 스크루지를 몰래 내려다보던 거칠고 낡은 종이 있는 오래된 성당 종탑도 안 보일 만큼 말이야.
결코 오역이라고 할 수가 없다. 다만 왠지 숨이 가빠지고 눈에 안 들어올 뿐이다. 저자가 똑같은 문장을 동사 중심으로 바꾸면 이렇게 된다.
-오래된 교회 첨탑에서는 낡고 묵직하게 생긴 종 하나가 고딕 창문 너머로 스크루지를 언제나 은밀하게 내려다보는데, 지금은 (짙은 안개에 가려서 하나도) 안 보인다. 문장 전체가 말쑥하여 그만큼 이해도 빠르다.
번역의 정확성은 출발어에 충실한 정도를, 문장의 가독성은 도착어에 충실한 정도를 말한다. 따라서 출발어 내용을 번역가가 정확히 도착어 특징에 맞도록 담아내야 한다. 이 점에서는 직역이 당연히 좋다. 이때 직역이란 명사 중심 언어를 동사 중심 언어로 바꾸는 것까지 포함한다. 그래야만 이해는 물론 원작자 특유의 문체와 향기까지 느낄 수 있다. 소유격 ‘의’는 되도록 안 써야 한다. ‘~하지 않는다’는 장형부정을 너무 많이 쓴다. 대표적인 번역어투다. 우리말은 ‘~안 한다’, ‘~못한다’는 단형부정이다. ‘~에의’, ‘~와의’ 같은 겹조사도 정체불명이다. 조사는 명사를 꾸미고자 쓴다. 조사로 조사를 수식할 수 없다. 영어는 전치사가 발달했고 우리말은 후치사(조사)가 발달했다. 조사가 지닌 함의도 전치사에 못지않다.
우리말은 현재형 중심 언어다. 현재완료형은 과거형으로 바꿔도 충분하고, 시제 대신에 오늘, 모레와 같은 시간 명사와 이미, 벌써, 바야흐로, 마침내 같은 시간부사를 활용한다. 영어가 시제일치 원칙을 지켜야 한다면 우리는 ‘시제불일치 원칙’이다. 주절-종속절 문장인 경우, 영어는 시제를 통일해야 하지만 우리말은 모두 현재형을 쓰고 주절의 동사 하나만 시제를 준다. (쓰임새가 높다) 물론 그밖에도 많다. 무생물 주어와 관계대명사 번역이라든가, 대명사 바꾸기, 동명사와 To 부정사 다루기, 뉘앙스 찾기, 감정 싣기 따위다. 저자의 주장에 모두 공감하면서 책을 읽었다. 한국인이 한글을 떳떳하게 사용한 기간은 겨우 70년 남짓이다. 한문에다 일어, “영어에 짓눌리면서도”(286쪽) 꿋꿋하게 버티어왔다. 우리말에 한글이 가장 적합하기 때문이다.
책 제목만을 보면 어딘지 우리말 순결주의랄까 폐쇄적인 분위기를 느낀다. 그렇지 않다. 김옥수는 영어와 한국어를 동등하게 인정하며 도착어에 근거하여 영어 표현방식을 탐구한다. 다양함과 함께 단순명쾌함을 좋아한다. 특히 문학작품에서 한글 번역문은 쉽게 다가오면서 감칠맛을 준다. 한걸음 더 나아가 저자의 접근방식을 유럽인도어군에 적용해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