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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홀 ㅣ 사계절 1318 문고 78
박지리 지음 / 사계절 / 2012년 7월
평점 :
무언가 창의적인 생각들을 불러올 것만 같은 겉과는 다르게 속은 어둡고, 외롭고, 서글픈 이야기가 담겨 있다. 아버지로부터 가정폭력이라는 고통을 안고 혼자가 되어버린 소년의 이야기가 현재와 과거를 넘나들며 빠르게 전개된다.
주인공인 소년은 하루가 멀다하고 엄마와 누나, 자신에게 손을 대는 아버지로부터 도망치는 일이 일상이었다. 너무나도 증오스러워 '아버지'가 아니라 '그 사람'이 되어버린 남자와 매일 맞으면서도 반항 한 번 하지 않고 다음날이면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아침밥을 해다 바치는 엄마를 진저리 칠 정도로 미워하며, 소년에게는 오로지 네살 위의 누나만이 위안이었다. 같은 고통을 느끼며 아버지와 엄마를 향해 함께 증오의 말을 내뱉는 것만이 소년과 누나에게는 위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고, 폭력을 피해 안전하다고 생각되는 '맨홀' 아래의 수로관이 둘에게는 유일한 안식처가 되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이를 먹자 소년이 유일한 편이라고 여겼던 누나마저 변해 전처럼 소년과 맨홀 안으로 들어가 손을 꼭 붙들고 증오의 말을 뱉어내는 대신, 집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연극의 일부라고 상상하며 다른 안식처를 찾아 그것에 몰두하게 된다. 그러다 연극을 하겠다며 집을 나가서는 3년 후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집으로 돌아온다.
집에서는 폭군처럼 굴며 가족들에게 폭력을 행사했지만, 밖에서는 다른 사람의 목숨을 구하는 소방관이었던 아버지. 그 아버지가 갑자기 화재 현장에서 열여섯명의 사람을 구출하고는 사망하게 된다. 훌륭한 일을 하다 숨진 아버지를 추모하는 행렬들로 장례식을 북적이는 와중에도, 예전에는 그렇게도 증오해 마지않던 누나가 "아버지"를 부르며 오열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소년은 그저 이제야 평안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는 생각과 변해버린 누나에 대한 배신감으로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장례를 치룬다. 집에서는 그토록 끔찍한 사람이었던 아버지가 밖에서는 의롭고 훌륭한 사람으로 평가되는 것이 소년에게는 우습게 생각되었던 것이다. 그래도 아버지는 아버지라며 예전에 엄마가 했던 말을 똑같이 하는 누나를 보며 분노를 느끼는 동시에 죽음이라는 게 그 모든 고통스러운 기억과 증오를 다 잊게 할만큼 강한 것인지 소년은 좀처럼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소년은 가정폭력으로 인해 가질 수 있었던 많은 것들을 얻지 못했다. 편안함을 느껴야 할 집과 사랑받는다는 느낌들, 그리고 행여 은연중에라도 가정폭력의 그늘이 드러날까 친구들과도 거리를 두어 그 흔한 친구도 가지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한 기회에 한 무리의 친구들 사이에 끼게 되어 함께 어울려 다니다 네팔인 외국인 노동자 살인사건에 휘말리고, 소년이 그토록 증오해하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다른 아이들의 형량에 훨씬 못 미치는 벌을 받게 된다. 재활센터에서 16주를 보내고 나와서는 1년 보호관찰이 전부. 사람을 죽인 살인죄를 저지른 범죄자에게는 한없이 가볍게 느껴지는 재판 결과였다. 재활센터에서 16주의 시간을 보내고 나온 소년은 집으로 돌아가 검정고시 준비하며 시간을 보낸다. 얼마 후, 느닷없이 자기 아들이지만 두렵다며 오열하는 어머니를 두고 집을 빠져나온다. 모두에게 작별을 고하는 소년의 마음 속 말로 글이 마무리가 되는데, 죽음을 암시하는 듯해 마음이 많이 안 좋았다.
가정폭력이 가져온 다른 가족들의 불행한 삶을 보면서 화도 나고 동시에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누구보다 가까워야 할 아버지를 증오하는 것이 어린 소년에게 얼마나 큰 고통이었을까. 엄마가 불쌍하게 느껴지면서도 밉고, 아버지를 마지막까지 용서할 수 없었던 소년에게 가정이라는 울타리는 가장 감추고 싶고, 끔찍한 악몽이었다. 아버지의 폭력을 피해 숨어들었던 맨홀 아래의 어두운 수로관만이 이 소년에게 안정을 줄 수 있었던 것이다.
보호 받고 사랑 받아야 할 나이에 집이 가장 공포스러운 곳이라면 어떨지. 읽는 내내 소년의 마음이 전해져 가슴이 아팠다.
가정폭력 속에서 자란 사람들이 범죄를 저지르거나 정신적인 고통으로 괴로워하는 경우를 종종 미디어 매체를 통해 봐왔다. 어쩌면 먼 이야기가 아니라 내 주변에도 이런 고통을 받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타인에게 받은 폭력이라면 밝히고 치료를 받을 수 있겠지만, 가정폭력은 그 수치심때문에 숨어들고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치료를 받을 수가 없으니 그것이 나중에 더 큰 문제가 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린 소년의 눈과 마음을 통해 본 가정폭력의 그 그늘은 말로 다 설명할 수도 없는 고통과 슬픔 그 자체였다. 어렸을 때 받은 상처가 쌓이고 굳어져 깊게 박혀버렸는데, 다 성장한 후 심리적 치료를 통해 치유한다고 완전히 없던 일처럼 치유될 수 있을까?
이런 슬픈 일이 어떻게 해야 사라질 수 있는 것이지. 잘 모르겠다.
그저 이런 고통을 받는 아이들이 없어졌으면 하는 바람만 맴돌았다.
오랜만의 묵직한 소설이었다.
가슴이 먹먹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