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타일
김금희 지음 / 창비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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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허물어지고 물러지고, 그랬다가 다시 차곡차곡 쌓이고 비로소 굳어지는 과정을 오롯이 느끼게 하는 김금희의 소설. 이번에도 역시 그랬다... 이런 글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큭큭 웃었다가 찡했다가 귀여웠다가 짜릿했다가...

<우리는 페퍼로니에서 왔어>가 여름의 마음이라면, <크리스마스 타일>은 겨울의 마음.
크리스마스를 앞둔, 혹은 맞이한 사람들이 지나간 시간의 기억과 상처를 돌아보고 비로소 다시 앞을 바라보게 되는 과정을 그린다. 가끔씩은 다시 뒤돌아보고, 그때마다 또 아파하고 후회하겠지만 그래도 이제는 천천히 걸어나갈 수 있겠지. 살아갈 수 있겠지.

앞으로의 여름과 겨울에는 꼭 이 두 소설을 다시 꺼내게 될 것 같다.
일 년을 마무리할 이 겨울에 읽는다면 너무너무 좋을 소설. 마음을 담아 추천합니다!


+가제본 서평단에 당첨되어 창비에서 책을 제공 받았습니다.


달려나가는 마음을 멈추지 못하는 스물네살의 야콥과 그 다가섬을 마다할 이유가 없는 스물셋의 예후이, 비슷한 이유로 포기라는 걸 고려하지 않는 동갑의 윤슬까지. 그 모든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샹강의 수천그루 귤나무가 해를 거듭해 자라고 노을이 강물을 물들이며 바람이 새들의 작은 머리를 쓰다듬고 지나가는 것처럼. - P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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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는 숲속의 소녀들 - 신경학자가 쓴 불가사의한 질병들에 관한 이야기
수잰 오설리번 지음, 서진희 옮김 / 한겨레출판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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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투적인 생각과 오래전에 이미 잘못된 것으로 밝혀진 이론들'(287쪽)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심인성 장애는 많은 사람들에게 '진짜 병'으로 인정받지 못하곤 한다. 신경학자인 수잰 오설리번은 전 세계의 심인성 장애 사례들을 탐사하여 우리에게 들려줌으로써 심인성 장애에 대한 해묵은 오해를 걷어내려 한다.


"미친 거지 진짜 아픈 게 아니라"(267쪽)거나 흔한 꾀병이라는 유구한 사회적 낙인 때문에, 심인성 장애 환자들은 쉽게 진단을 받아들이지 못하며, 존재하지 않는 다른 답을 찾아 오랜 시간 헤매기도 한다. 특히 취약한 환경에 놓인 환자들은, 이 병의 불가사의한 속성을 이용하려는 사람들(주로 음모론자...)에 의해 더 큰 고통을 받기도 하고... 

 

비교적 증상이 약하고, 환자가 쉽게 통제할 수 있으며, 나약한 내면에서 비롯된다는 것이 심인성 장애에 대한 가장 흔한 오해들. 그러나 "많은 이에게 심인성 장애는 저절로 계속되는 현상"(187쪽)이고, 단지 개인의 내면적인 문제라기보다는 복잡한 요소들이 맞물려 발생한다. 사실 심인성 장애를 비롯한 모든 질병은 생물학적/심리적 요소를 비롯해, 그 사람이 처한 사회/문화/정치적 상황이 복합적으로 상호작용하여 발생할 수밖에 없는 것이므로.


어쨌거나 내 마음인데도 마음대로 가눌 수 없고,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데도 이렇게나 큰 물리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게 참 신기하다. 마음이라는 건 정말 뭘까 자꾸 생각했고... 

전혀 모르고 있던 분야라서 이 책 정말 흥미롭게 읽었다.

 



따라서 뇌졸중을 앓는 어떤 사람이 기질적인 뇌 질환이라고 하면 ‘진짜‘ 마비된 것으로 생각하지만, 심인성 혹은 기능성 장애라고 하면 ‘진짜‘ 마비된 것은 아닐 것이라 여긴다. 심인성(기능성) 장애가 있다는 의미가 그런 식으로 해석된다면 사람들이 그 진단을 거부한다 해서 놀라울 게 뭐가 있겠는가? - P175

육체적 고통만큼 심리적 고통에서 긴급한 도움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다른 이들로부터 이해받기는 정말 쉽지 않다. - P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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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부수는 말 - 왜곡되고 둔갑되는 권력의 언어를 해체하기
이라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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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사회학 연구자인 이라영이 던지는 21개의 화두의 중심에는 '말'이 있다. 왜 어떤 말은 뱉어지기까지 너무나 쉽지만 어떤 말은 그토록 어려운지, 왜 어떤 사람을 말하기만 하고 어떤 사람은 듣기만 하는지, 왜 어떤 말은 빠르게 잊히는지를 면밀하게 분석한 책이다.


나를 분노하게 하는 말도 있지만, 나를 부끄럽게 만드는 말들이 더 많다. 나 역시 빈번히 무심한 폭력을 저지르는 주체가 되므로. 몰랐던 것들을 새로이 알고 배우는 것은 분명 큰 기쁨이지만, 동시에 내가 옳다고 믿어온 것들이 무너지는 일이고, 그럴 때마다 나는 자꾸만 부끄러워진다. 내가 뱉었던 말들이 나에게 돌아와 나를 가차 없이 때리는데, 그럼에도 지금 내가 아는 것은 티끌에 불과하다는 사실 때문에 더 괴롭다.


그래서 나는 저자가 말하는 '아름다움'이 오래 마음에 남았다. 저자는 시몬 베유의 '아름다움은 선에 대한 우리들의 갈망을 반추하는 거울과 같다'라는 말을 인용하며, 아름다움은 '고통과 연대하고 권력에 저항하며 정상성에 균열을 내어 세상에 충격을 주는 행위'(9쪽)라고 말한다. 그리고 인간이 가진 아름다움에 대한 동경이 '나 이외의 타자와 동등하게 연결되고자 하는 마음으로 연결'(362쪽) 되기를 소망한다. 그러므로 섣불리 비관주의에 잠식되지 않고, '어쩔 수 없는 문제들을 어쩔 수 있는 것으로 바꾸'(288쪽)려 부단히 노력하기. 또한 이것이 아름다움에 가까워지는 행위임을 기억하기. 완벽하고 매끄러운 아름다움이 아닌, 울퉁불퉁하고 땀 흘리는 아름다움을 향해서라면 한없이 부끄러워지더라도 다시 올려다볼 수 있을 것 같다.

언제나 고통에 대한 생각이 멈추지 않는다. - P7

고통을 외면한 채 우리는 아름다움을 맞이할 수 없다. 타자의 고통을 마주하고 사랑과 아름다움이 주는 힘과 그것의 정치성에 대한 무한한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 세계를 아름다움으로 이끌 것이다. 아름다움은 살아가는 모든 것에게 애쓰는 마음이며 동시에 죽어간 모든 것에게 애도를 잃지 않는 마음이라 생각한다. - P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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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의 미친 여자
샌드라 길버트.수전 구바 지음, 박오복 옮김 / 북하우스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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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쉬운 내용은 아니라 술술 읽히진 않지만, 내용이 너무 흥미로워서 읽는 내내 감탄하게 된다. 1970년대에 영미 여성문학을 가르치던 두 여성이, 19세기 여성 작가들의 작품을 페미니즘을 통해 비평하고 있는데 도무지 흥미롭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긴 하지만...


당시 여성 작가들이 겪어야 했을 차별은 얼핏 짐작할 수 있었지만, 실제적인 텍스트로 보면 그 비난의 수위가 견디지 못할 만큼 악랄하고 유치했음을 알 수 있다. ‘생각하는 여자는 자연을 거스른다고 간주되’고(155쪽), ‘굴복하지 않는 여자는 그저 신경증적인 여자일 뿐이라’는(163쪽) 것이 당연히 여겨졌던 시대에 어떻게든 펜을 들어 글을 써낸 여자들. 전적으로 남성이 지배하던 ‘문학’이라는 가부장적 공간에서 이 여성들은 어떻게 글을 썼을까. 


1부는 당시 문학장이 얼마나 여성 작가(독자)들에게 배타적이었는지를 보여주고 앞으로 이어질 내용을 가볍게 예고한다면, 2부부터 5부까지는 제인 오스틴, 메리 셸리, 에밀리 브론테, 샬럿 브론테, 조지 엘리엇의 소설들을 직접 다룬다.


읽다 보면 내가 작품을 정말 겉핥기로만 읽어왔다는 것을 깨달을 수밖에 없다. 이를테면 <오만과 편견>에서 엘리자베스와 레이디 캐서린이 실은 굉장히 닮아 있고, 고로 캐서린이 어쩌면 ‘엘리자베스에게 어울리는 어머니’라는 것. ‘엘리자베스는 꺾이지 않는 용기를 지닌 캐서린을 닮아 있다. 결국 이들만이 이 소설에서 진정한 분노를 느끼고 표현할 수 있는 여자’(338쪽)라는 것은 엘리자베스와 캐서린을 일종의 대결 구도로만 봤던 나로서는 전혀 포착할 수 없었던 부분이었다. 


<폭풍의 언덕>에서의 캐서린과 히스클리프의 관계성을 분석한 부분도 진짜 재밌었다. ‘히스클리프는 캐서린의 채찍이고, 또 다른 자아이자 분신이며, 캐서린의 존재를 보충하는 부가물이’므로, ‘캐서린은 히스클리프와의 결합을 통해 완벽한 양성적 존재가 된다’(484쪽)는 건 흥미로움을 넘어 뭔가 짜릿하기까지 했음.


6부에서는 19세기 여성 시인들의 작품들을 분석한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건 에밀리 브론테의 작품들에 쓰인 ‘거미줄’과 ‘바느질’에 대한 해석. ‘거미의 기예와 그것이 상징하는 여성 예술의 모호한 속성’, 그리고 거미줄과 여성 예술 둘 다 ‘검열관 같은 주부의 빗자루에 쉽게 사라’질 수 있다는 것. 나아가 이는 거미와 여성의 바느질로 연결되며, 브론테가 시 속에 직접 써넣은 대시(-)가 ‘분열된 생각을 솔기마다 접합시켜주는 섬세한 바늘땀’(1081쪽)처럼 보이기도 한다는 해석은 정말 재밌음. 더불어 에밀리 브론테의 작품을 접해보지 못한 나로서는 그의 작품이 왜인지 맑고 차분할 것이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예상치 못한 강렬하고 분노하는 시들을 많이 만나볼 수 있어서 좋았구...


여성 작가들이 시대와 장르를 넘나들어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았다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지만, 글로 읽으니 더 좋다. 시대적 한계로 인한 불편한 부분들이 있다는 이유로 고전 작품을 자주 읽지는 않았는데, 이 책을 통해 새로운 의미를 발굴해 내는 독서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다. 쉽게 외면하지 않고 어떻게든 다른 시각으로, 다양한 자세로 읽어보는 것. 그래야지 내가 디딜 수 있는 땅이 더 넓어지겠지, 이 책을 쓴 두 여성이 여성 문학의 땅을 단단히 다져 주었듯이. 


분량도, 내용도 어려웠지만 완독하고 보니 '필독서'라는 간명한 추천사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여성은 남성의 ‘펜’에 의한 창조물로서 ‘감금되었다.’ 여성은 남성이 내뱉은 ‘문장’으로 (사형이든 징역형이든) 형을 ‘선고받았다.’ 남성은 여성을 ‘창조했을’ 뿐만 아니라 여성을 ‘기소했다.’ 여성은 남성이 ‘만들어놓은’ 사고에 따라 남성의 텍스트, 그림, 그래픽 속에 갇혀 있었으며, 여성은 남성의 우주론 속에서 (죄 많은 결함투성이로) ‘날조되었다.’ - P89

예술의 마력은 남성의 신화에 의해 죽임을 당한 여성들을 다시 살려내기 때문에, 여성에게는 광적인 것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는 걸까? - P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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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울어진 미술관 - 이유리의 그림 속 권력 이야기
이유리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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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캔버스를 찢고 나온 여자들>를 흥미롭게 읽었었기 때문에 더 기대되었는데, 역시 좋았다. <캔버스를 찢고 나온 여자들>이 남성 중심 예술계에 의해 의도적으로 지워졌던 여성 예술가들을 집중적으로 조명한다면, <기울어진 미술관>은 권력에 의해 가려졌던 소수자들을 망라하여 다룬다는 점에서 같은 궤에 있으면서도 다른 책. 


'예술이 돈과 권력을 떠나 독립하기는 너무나 힘들'기 때문에(7쪽), 한 폭의 그림일지라도 그것은 필연적으로 '시대를 증언'(8쪽)하게 된다. 그저 아름답다는 감상을 넘어, 그 안에 얽힌 사회적 맥락과 권력의 작동을 읽는 것은 오늘날 우리를 돌아보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슬프게도 그 '기울어짐'은 여전히 우리 사회에 영향을 미치고 있고, 우리는 그 안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에.

그림에 대해 하나도 몰라도 술술 읽힐 만큼 쉽고 재밌게 쓰인 글이다. <캔버스를 찢고 나온 여자들>과 나란히 읽어보는 것을 추천.

그래서 이 책은 의도치 않게 시대를 증언한다. 화가 스스로는 의식하지 못했겠지만, 필연적으로 자신이 살던 시대의 공기를 작품 안에 담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중략) 이렇게 그림은 당대의 문화적 편협함과 무지를 드러내는 선명한 징후였다. - P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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