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1 흡혈마전
김나경 지음 / 창비 / 2020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931 흡혈마전

김나경

창비

곱게 보이는 것도 아니고, 공부를 잘하거나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듣는 모습도 아니지.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자기 스스로의 의지대로 삶을 살아가는 자세야. 당연해 보이지만 연습이 필요한 일이기도 하고 말이야.

- P.133

때는 1931년 경성, 식민지 조선.

진화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 희덕과 사감 선생으로 새로 부임한 계월이 마주하며 이야기는 시작된다.

누군가의 시선을 피해 학교 안으로 들어온 계월은 흡혈마, 사람의 피를 빨아 먹기 위해 상대를 기절시키고, 기억을 지우는 능력을 희덕에게 들키고 만다.

모두에게 통하는 이 능력이 희덕에게만은 불통이라 계월은 심사가 뒤틀린 듯 불편하다.

"그들은 쓸데없이 활기가 넘치고, 떠들고, 아무것도 아닌 일에 울거나 웃고, 겁이 많고, 한편으론 겁이 없고, 귀찮게 굴었다."

학교에 부임하던 날 학생들에 대한 표현을 이리도 정확히 한다. 십대 학생이란 자고로 작은 것을 크게 만드는 능력이 있지 않은가. 십대인 희덕에게도 누구에게도 밝힐 수 없는 호기심이 증폭되어 가는데, 그건 계월의 정체.

누군가를 알아간다는 건 다 그렇듯, 밀착하여 알아가게 되면 될수록, 계월의 세월이 애달프다. 그런 계월을 도와야 할 것 같다.

"그분은 단지 그 자신일 뿐이에요."

희덕은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그 사람들이 원하는 바가 무엇이고, 어떤 대답을 기대하는지 대강은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계월에게 중요한 것이나, 희덕에게 중요한 것들은 조금 다른 것이리라. 그것을 그들은 절대 알아차릴 수 없고, 설명해 보았자 알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 P.278

계월이 지키려는 것은 무얼까,

아무나 들락거리지 않는 학교 다락방에서 동무들이 숨죽여서 읽어야만 했던 도서들은 무엇일까,

사연많은 계월이 산자와 죽은자 경계에 있음을 단박에 알아챈 백송은 무얼 하는 사람일까,

굶주리고 오갈곳 없는 어린 여자아이들을 돌보는 화란이 꿈꾸는 조선은 무얼까,

일본 앞잡이를 자처한 아버지와 다른 길을 걷고자 하는 경애와 일균 남매의 삶은 어떻게 흘러가는가,

상상초월의 힘을 지닌 백작의 존재는 또 무엇인가.

묘한 긴장감이 읽는 시작부터 내내 이어지며 이들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될지 궁금해 손에서 놓을 수 없다.

마지막 장을 덮을 땐, 가슴 한구석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내 안에 '성장이 고팠던 십대의 나'가 툭 튀어 나올지 모른다. 그때의 내가 희덕과 계월, 그리고 백송과 하란, 또 경애와 일균의 성장을 응원하게 될 것이다.

"계월을 덜컹이는 창문에 어깨를 기댔다.

그리고 살짝 미소를 지은 채, 새의 너울거리는 움직임이 작아져 더 이상 눈에 보이지 않을 때까지 지켜보았다."

독자분들이 이 소설을 읽으며 상상력이라는 징검다리를 건너, 앞서간 이들의 숨겨진 발자취를 따라가 볼 수 있다면 좋겠다. 한국 근현대 여성의 작가들의 작품에서 각 장의 제목을 빌려 온 것은 충분히 조명 받지 못한 시절과 사람들을 기억하기 위한 작은 노력이다.

- 작가의 말 중에서

 

독자분들이 이 소설을 읽으며 상상력이라는 징검다리를 건너, 앞서간 이들의 숨겨진 발자취를 따라가 볼 수 있다면 좋겠다. 한국 근현대 여성의 작가들의 작품에서 각 장의 제목을 빌려 온 것은 충분히 조명 받지 못한 시절과 사람들을 기억하기 위한 작은 노력이다. - P288

월을 덜컹이는 창문에 어깨를 기댔다.그리고 살짝 미소를 지은 채, 새의 너울거리는 움직임이 작아져 더 이상 눈에 보이지 않을 때까지 지켜보았다 - P28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