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시끄러운 고독
보후밀 흐라발 지음, 이창실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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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시절 스쿨버스를 타고 통학을 했었는데, 아뿔싸 그날따라 늦잠을 자서 아슬아슬하게 스쿨버스 뒷모습과 일별하고 말았다. 어쩔수 없이 시내버스를 타고 학교에 가야 했다. 그런데 하필 그날따라 주머니에 500원짜리 동전 하나밖에 없었다. 버스 토큰(추억의!)을 사자면 370원 정도 했던 것 같은데... 문제는 5장 단위로 판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또 문제는 버스에 500짜리를 내면 거스름돈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었다.(지금 생각하면 왜 안된다고 생각했는지 모르겠지만... 암튼 그렇게 생각했던것 같다.)

500원의 내가 머리를 짜내 생각한 것은 토큰 파는 가게에 가서 500원을 내고 토큰 한장만 달라고 하며, 잔돈 100원만 남겨달라, 그렇게 하기 힘들면 그냥 토큰 한장만 달라 이렇게 딜을 하기로 한 것이었다. 그날따라 평소에 잘 보이지 않던 어느 허름한 구멍가게가 보였고, 허름한 만큼 30원을 남겨먹으며(?) 나에게 기꺼이 토큰 한장을 팔아줄 할머니가 있을거라 생각하며 스르르 문을 열고 들어갔다.

"500원짜리를 낼테니 거스름돈 100원만 주시고 토큰 한장만 주세요. 안되면 그냥 토큰 한장만 주세요...." 하고 용기를 짜내 말했다. 그런데 그 가게를 지키고 있던 사람은 상상했던 할머니가 아닌, 눈빛이 형형한 젊은 아저씨 였고, 아저씨는 무척 화를 내며 "학생이 솔직하게 500원을 주며 토큰 한장만 달라면 나는 정당한 가격을 치르고 줬을 것이다. 하지만 나를 농락하듯이 거스름돈 100원 운운하는 태도 때문에 학생에게는 토큰을 팔수없다!"고 하며 빨리 나가라고 소리쳤다.

어안이 벙벙..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나? 거스름돈도 덜 받겠다고 했던 건데, 아니면 그냥 500원에 토큰 한장만...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 사장님이 화가 났는지도 모른 상태에서 구멍가게에서 쫓기듯, 도망치듯 나왔다.

조금있다 학교가는 버스가 왔고, 나의 500원은 버스요금통에 "쨍"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그런데 예상치 않게 곧이어 부드러운 소리로 거스름돈이 "촥촥 촤르르~" 쏟아져 나왔다.(이럴건데 나는 왜 아침부터 쌩쇼를 하고 왔나?)

버스에 앉아 방금 나에게 무슨일이 일어난 것인가를 생각해 보았다. 아까 그 아저씨는 왜 나에게 그리 화를 냈는가? 그것보다 그는 허름한, 그래서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 동네 버스정류장 앞에 조그만 구멍가게를 하면서도 어떻게 그런 형형하면서도 투명한 눈빛을 가지고 있을수 있단 말인가? 저런 눈빛을 가진 사람은 적어도 대학 강단이나 판사석에 앉아 있어야 하지 않을까? 등등 아리송한 가운데 학교에 도착했다.

그 후로 가끔 그 아저씨를 생각했다.(물론 그 후로 그 가게 앞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쪼끄만 컴컴한 가게에 앉아있으면서도 양심과 통찰력과 자신의 줏대를 꿋꿋이 세우는 사람(잠깐 스친 인연을 내가 과하게 포장해서 해석한 면이 없지도 않겠지만... 큼큼.. 암튼..).. 그런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세상이 그를 몰라주고, 출사 하지도 못하고, 그저 하릴없이 파리떼 쫓으며 인생의 시간을 보내면서도 당당하게 살수 있는 사람...

그때는 세상의 모든 사람이 자신의 능력에 걸맞는 일을 할수 있을 것이라는, 누구에게나 기회는 공평할 것이라는, 꿈을 꾸면 꼭 이룰 수 있을 것이라는 순수한 마음에 때가 얹어지기 전이라서 그랬는지, 그가 안타깝고 왜 저렇게 밖에 살지 못하는지 혼자 속을 끊였었다.

파리와 쥐떼가 들끊는 폐지압축 작업장에서 맥주를 들이마시며 홀로 35년째 일을 하는 늙은이가 있다. 그는 35년을 매일같이 그 컴컴한 지하 작업장에서 일을하며 일이 끝나면 동네 술집에 들러 술을 마시고 더러운 옷과 행색으로 냄새를 풀풀 풍기며 자신의 집으로 돌아간다.

겉으로 보았을땐 그는 그런 사람이다. 친구도 가족도 없이 혼자 더러운 지하작업장에서 일하는 늙은 하층노동자.

그런데 그에게는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는 심미안이 있다. 압축장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온갖 인쇄물 중에 눈에 띄는 반짝이는 보물들을 모아 독서를 즐기며, 자신이 만든 폐지압축덩이를 멋진 명화작품(모작이나 프린팅된 것들 이지만)으로 장식해 매일 아름다운 작품들을 세상에 선보이고 있다.

그는 때때로 노자와 예수와 만나 향유를 하며 자신의 작품을 세상에 강의하는 꿈을 꾸기도 한다. 그에게는 인류 철학자들의 선지식과 사상이 맥주 거품 흘러나듯이 흘러넘친다. 그의 보물같은 책들은 그의 작은 집을 꽉채우고도 넘쳐나 그의 침대 위에 설치한 책장에서도 흘러넘치며 그가 조금이라도 건드릴라치면 잠을 자다 보물들의 세례를 받으며 천국으로 갈 지경으로 책을 사랑한다.

더러운 작업복에 냄새나는 더러운 노동자의 눈속에 그런 보물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세상 누가 알 것인가?

그는 꿈을 꾼다. 35년을 함께 일한 압축기와 함께 은퇴하여(그러기 위해 압축기 살 돈을 모으기 위해 더욱 열심히 일하고 있다.) 매일 그와 함께 멋진 작품을 세상에 선보일 날을.

하지만 그는 일도 못하는 더러운 술주정뱅이로 낙인찍혀 그의 천국같은 작업장에서 쫓겨나 흰백지를 다듬는 공장으로 차출되었다.

세상에나! 아무 활자도 없는 백지라니! 그것은 아무 의미없는 공허한 세상으로의 출교와도 같다!

결국 그는 자신의 천국, 지하 압축 작업장에서 그의 사랑하는 압축기 안으로 들어가 압축기로부터 천국으로 인도되었다.

'너무 시끄러운 고독'은 체코 작가 '보흐밀 흐라발'의 작품으로 보흐밀은 프라하 카렐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했으나, 1차대전 당시 독일군에 의해 대학이 폐쇄되자 철도원, 폐지꾸리는 인부 등등과 같은 일을 전전하며 글을 썼다. 이 책은 1960년대 공산주의 체제하의 프라하를 배경으로 쓴 보흐밀의 자전적 성격이 강한 이야기다. 평생 힘든 노동으로 삶을 꾸리며 성실히 살아왔지만, 젊은 공산당원의 첨단의 폐지압축공장, 그들의 폐지 압축공장에는 보물도 없고 활자도 없고, 예수도 없고 노자도 없다. 그저 일과 성과와 휴가와 일상이 있을 뿐이다. 노동자의 노동으로부터의 소외, 철학과 낭만이 사라지는 시대. 보흐밀은 자신의 이야기를 빗대 그 시대상을 유려한 글로 멋지게 표현해 냈다. 거장의 작품은 어딘지 모르게 무슨이야기 인지 힘들게 읽히지만, 읽으면서 또는 읽고 난후 진한 감동을 남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예의 버스토큰 사건의 아저씨가 생각났다. 그러면서 이 책이 그 아저씨가 구멍가게에서 꾹꾹 눌러쓴 그의 소설 같다는 생각을 하며, 지금쯤 노자와 예수와 함께 행복한 인생을 만끽하시리라 바래본다.

#보흐밀브라발 #너무시끄러운고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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