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덩이 창비청소년문학 2
루이스 새커 지음, 김영선 옮김 / 창비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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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구덩이'를 몇 년 전 추천받았지만 읽지 못했다. 좋은 책이라는 건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지만 그냥 읽을 결정적 이유가 없었는지 모르겠다. 다른 책들이 먼저였다.

최근 책을 읽게 된 건 중3 아들이 읽고 나서다. 학교에서 읽었다고 읽어보란다.

아들과 책과 주제로 이야기를 가끔 하는데 아들을 좋아하는 엄마인 나는 책을 구했다.

두꺼운 책도 아닌데 몇 달이 걸려 읽었다. 처음 책을 있는데 주인공 스탠리가 억울하게 재판을 받고 사막 한가운데 있는 캠프에 가게 되었기 때문이다.


속상했다. 짜증 났다. 이 착한 아이가 자신이 잘못하지 않은 일에 왜 누명을 써야 했는지.

읽기 싫었다. 이 더러운 세상...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뉴스에서 접하는 사건이 생각나기도 하고.

소설인데 너무 공감했다. (작가가 훌륭한 분임이 틀림없다. 리얼하게 동요했다.)

그래도 아들이 읽었으니 읽고 이야기를 하고 싶은 마음이 이겼다. 읽어나갔다. 결국 다 읽었다.


소년원 대신 택한 캠프에서 아이들은 사막에서 구덩이를 판다. 자신의 키만큼. 최소한의 물과 도시락은 지급된다. 하루에 하나의 구덩이를 파지 않으면 일과를 마치지 못해서 쉬지 못한다.

구덩이는 세 가지의 이야기가 엮어져 있다. 플롯을 참 잘 짰다. 소설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의 구조만큼 세밀하지 않지만 참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있다. 백 년의 흐름을 눈치채지 못하게 현재의 시간을 읽는 느낌이다.


구덩이를 읽으며 현대를 사는 우리 모두가 각자의 구덩이를 파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자신의 크기만큼 파면되는데 어떤 이는 자신의 키보다 더 크게, 어떤 이는 더 작게, 결국 자신이 판 구덩이에서 허우적거리도 하고, 불만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물론 만족감도 있겠다. 내가 판 구덩이라 알아서 내가 나와야 한다. 지나가는 사람이 도와줄 수 있지만 그때가 언제인지 마냥 기다릴 순 없다. 지나가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신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라고 했다.

내가 신이라도 그럴 것 같다. 노력하고 도전하고 무언가를 하려는 자가 이쁘지 않겠나?

빈둥빈둥 놀면서 기도만 하는 자가 예쁘지는 않을 것 같다.

소설 속 주인공 스탠리와 제로는 함께 역경을 이겨내고 집으로 돌아간다.

이제 고생할 만큼 고생한 우리들도 집으로 돌아가자.

지금까지 살아낸다고 고생했잖아. 잠시 쉬어도 된다. 좀 많이 쉬어도 된다.

에너지를 충전할 만큼 쉬자.

그래야 다시 구덩이를 팔 수 있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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