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대로 모여들었다. 목도꾼을 위시한 철도 인부들과 현장소장을 위시한 건설회사 직원들이 먼저 들어오고 그들을 상대로 한 술집과 음식점이 들어서자 뒤따라 몸 파는 여자들이 들어오고, 또 그네들을 상대로 한 도붓장수와 등짐장수, 방물장수가 들어오고, 마침내 일 년 뒤 기차가 마을 앞을 지나다니게 되자 일을 하다 다친 인부들을 치료해 줄 의원과 영혼을 치료해 줄 목사와 전도사, 신부와 중이 기차를 타고 한꺼번에 들어오고, 예배당과 성당과 절이 한꺼번에 세워지고, 다시 예배당과 성당과 절을 지을 인부들이 한꺼번에 들어오고, 다시 그들을 상대로 몸을 팔 여자들이 한꺼번에 들어오고, 이런 식으로 일거리를 찾아, 볼거리를 찾아, 기회를 찾아, 신도를 찾아, 짝을 찾아 먼 도시 또는 인근마을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었는데 훗날 평대의 향토사학자들은 이때의 갑자스런 인구팽창을 가리켜 '평대의 일차 빅뱅'이라 일컫었다. P148
이봐, 벙어리. 이 벽돌을 다 팔아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으라고. 하지만 언제 오겠다는 약속은 못 해. 내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게 바로 약속이거든. -P377
기적의 건축술이라는 둥 금세기 최고의 건축물이라는 둥 우리 건축학의 수준에 세계가 놀랐다는 둥 언론의 유난스러운 호들갑과 모든 공을 이름 없는 한 벽돌공에게 돌린 건축가의 겸손. 그녀가 죽은 지 이미 오래되었지만 이쯤 되면 뭔가 훈장이라도 하나 추서해야 되는 게 아닌가 하는 관리들의 관습적인 반응, 훈장을 주긴 주되 산업훈장을 줄 것이냐, 아니면 문화훈장을 줄 것이냐를 두고 벌인 부처 간의 논쟁, 뒤이어 쏟아진 벽돌을 주제로 한 수많은 학술회의와 연구논문.......... 이윽고 대극장을 지은 모든 원인을 제공한 남북회담. 그러나 호텔 직원이 방을 잘못 배치하는 바람에 극장이 보이는 반대편에 투숙하게 된 북쪽의 특사들. 그래서 실은 아무것도 못 보았다는 믿을 수 없는 후일담. 호텔 직원의 해고와 의전 담당자의 문책. 춘희와 벽돌에 관련된, 봇물처럼 쏟아져 나온 서적과 드라마의 제작. 원래는 주인공의 몸무게가 백 킬로그램이 넘지만 스타를 캐스팅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사십팔 킬로그램으로 줄여야 했던 방송 작가의 고민. 여주인공을 맡은 배우가 벽돌보다는 도자기가 더 예쁘지 않느냐고 해서 할 수 없이 도자기를 굽는 주인공으로 바꿔야 했던 대대적인 윤색작업. 다시 이름이 촌스럽게 춘희가 뭐냐고 해서 마지못해 주인공의 이름을 애니로 바꿔야 했던 대대적인 수정작업. 남자 주인공을 맡은 배우가, 직업이 씨팔, 가오 상하게 트럭 운전사가 뭐냐고 해서 어쩔 수 없이 다시 재벌 2세 사업가로 바꾼 대대적인 밤샘 작업. 그렇게 해서 결정된 사십팔 킬로그램의 가난한 도예과 여대생과 재벌 2세의 신분의 벽을 뛰어넘는 슬픈 로맨스. 시청률과 대중성의 법칙. 이미 예정된 드라마의 대히트와 대중들의 무의미한 눈물...... p415
이쯤 해두자 진실은 모두 사라졌다. 이제 그 모든 호들갑은 우리의 주인공 춘희의 인생과 아무런 상관도 없어졌다. 그녀는 영웅도 아니었고 희생자도 아니었다. 그녀는 뚜렷한 목표를 가진 장인도 아니었으며 숭고한 예술가는 더더욱 아니었다. 그녀는 뚜렷한 목표를 가진 장인도 아니었으며 예술가는 더더욱 아니었다. 우린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며 살았는지 어떤 삶을 원했는지 알 수 없다. 그녀는 우리와 달랐으며 다르다는 이유로 평생 고독 속에서 살았다. 춘희를 둘러싼 한 많은 얘기들은 제 스스로 생명을 얻은 아메바처럼 무한히 확장해가고 있지만 정작 진실은 그 옛날 지상에서 사라진 무림비급처럼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그녀는 세상에 벽돌 남겼을 뿐이다. P.416
우린 어떻게 되는 거지? 우린 사라지는 거야. 영원히 하지만 두려워하지 마. 네가 나를 기억했듯이 누군가 너를 기억한다면 그것은 존재하는 것과 마찬가지니까. P.421
사람들은 말한다. 이제 소설이 현실을 포착해 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그리고 질문한다. 현실이 이미 거대한 허구가 된 마당에 그 허구의 허구를 보태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냐고. 서사는 멈춰 섰고 시간은 흩어졌다. 새로운 것은 이미 새로운 것이 아니다. 숙주를 찾아 헤매는 에일리언처럼 작가의 영혼은 아득한 우주 공간을 떠돈다. 그리고 다시 증식을 꿈꾸며 유일한 숙주로 남은 자신의 육체마저 먹어치운다. 그들은 끝내 살아남기 위해 죽기를 각오한 전자의 장수처럼 비장하다. 이 시대에 소설가가 된다는 건 행복한 일일까, 아니면 불행한 일일까? p454
졸고를 뽑아주신 심사위원들께 감사한다. 그분들은 나의 생각을 너그럽게 용인해 주었다. 나에게 사랑을 주신, 그래서 그 사랑이 나에게 있게 하신 부모님, 처음 소설 쓰기를 권했던 나의 동생, 언젠가 내가 무언가가 되기를 바랐던 친구들, 모두에게 감사한다. 모든 게 쉽지 않았지만 그래도 다행이다. 그리고 다시, 이야기는 계속된다. p.4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