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 - 제10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천명관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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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다.

웃긴다.

황당무계한 무협지 같다.

맑고 순수함이 깃든 아름다운 판타지다.

우리 문화인 '한(恨)'도 느껴진다.


부커상 최종 후보에 오른 천명관 작가의 장편 소설을 읽으면서 느낀 점이다.

2004년 세상에 나온 고래가 20년이 지나 더 빛을 발하는 날이다.

부커상이 좋아하는 장르가 뭔지 모르지만 천명관 작가는 천부적인 이야기꾼이 맞고 소설 '고래'는 우리 삶의 희로애락(喜怒哀樂)이 두루치기처럼 잘 섞여 있다.


작가 소개

천명관(1964년 경기도 용인 출생)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20대에 골프용품 판매, 보험 외판원 등 여러 직업을 전전하다가 30대부터 충무로에서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충무로에서 떠돌았으나 나이 사십까지 영화 한 편 만들지 못하고 최종적으로 준비하던 영화까지 엎어지고 먹고살기가 너무 힘들어 동생의 권유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2003년에 곧바로 등단하였고, 연이어 2004년 문학동네 소설상을 수상한 장편 소설 <고래>가 비평적, 대중적 성공을 동시에 거두며 유명해졌다. 작품으로 유쾌한 하녀 마리사/문학동네, 고령화 가족/문학동네(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문학동네 등이 있다. 영화를 만들고 싶었던 그는 2019년  '뜨거운 피' 감독으로 입봉을 했다. 2023년 장편소설 <고래>로 부커상 최종후보에 올랐다.


 소설의 내용은 한마디로 여인 3대 이야기다. 그 속에서 만나는 사람들, 사건들이다.

한(恨)이 서린 국밥집 노파, 산골 소녀가 바다를 거쳐 도시로 진출하면서 성공하는 사업가 금복, 금복의 지체 장애가 있는 거구의 딸 춘희.

 근현대를 배경으로 하는 우리의 역사에, 얼마 전에도 텔레비전에 방영한 교도소 드라마 같은 이야기(폭력과 비리)에, 산속에 사는 도인인지 신령인지 헷갈리는 능력을 가진 애꾸의 이야기가 있다. 애꾸의 이야기가 무협소설의 냄새를 풍긴다.

뜬금없다. 딱 그 말이 맞다. 그런데 말도 안 되게 이야기가 재미있고 웃게 된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웃고 있다. 치아가 8개 이상 보이게 입술을 활짝 벌리고서. 이렇게 이야기하니 마냥 웃긴 코미디라고 생각할까 다시 말한다. 이 소설은 우리 조상들의 '한(恨)'이 서린 여인의 삶의 이야기다. 아프고 눈물 나고 서러운 이야기다. 여인들의 삶이라고 해서 여자만 나오는 게 아니다. 누아르 장르 같은 '남자'이야기도 있다.

우리 삶의 이야기니 남자, 여자, 아이, 계급, 자본주의, 사상 등이 다 들어있다. 코끼리가 등장하니 동물이야기도 되네. 코끼리 '점보'와  맑고 순수한 '춘희'와 판타지가 이루어진다. 이렇게 들으면 내용이 섞여 엉망진창 같은데  정신 사납지 않게 플롯을 잘 다. 혹자는 구성면에서 전문적인 요소가 부족하고 이야기의 힘으로 나간 소설이라고 하던데 독자가 읽기에 무슨 내용인지 쉽게 이해하면 구성도 훌륭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소설에서 화자는 3인칭 관찰자다. 화자의 언변은 조선시대에 많은 사람들의 주머니에서 돈을 술술 꺼내게 만드는 이야기꾼 '전기수'를 떠오르게 하고, 등장인물 중에 사람을 혹하게 만드는 '약장수'의 말솜씨를 가지고 있다. 아랫계급 사람들의 말솜씨라 천하다 생각하지 마시라. 다듬어지고 정형화된 언어가 아니라 날것에 가깝다는 말이다. 소설 속 판타지와 여인의 삶의 이야기는 우리의 마음을 따뜻하게 하고  위로하며 풍요롭게 한다. 야설은 본능적 감각을 깨운다. 빠져드는 소설이다.


등장인물의 이름은 금복, 춘희, 수련, 몇 명을 제외하고 특징으로 표현된다.

칼자국, 트럭운전사, 애꾸, 노파, 춘희의 양부이자 벽돌을 만드는 문(文), 쌍둥이 자매, 국밥집 노파 등 특징으로 표현하니 많은 인물을 기억하고 읽기가 쉽다.


  책을 읽기 전에 다른 사람들의 평을 잘 보지 않는 편인데 천명관이 쓴 단편소설에 대한 짧은 댓글의 평을 보게 되었다. 전체적으로 천부적 이야기꾼이라는 찬사가 많았는데 다른 평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여성을 성적 도구화하고 허영심과 섹스를 위한 물건으로 본다는 시각이었다.


평대로 모여들었다. 목도꾼을 위시한 철도 인부들과 현장소장을 위시한 건설회사 직원들이 먼저 들어오고 그들을 상대로 한 술집과 음식점이 들어서자 뒤따라 몸 파는 여자들이 들어오고, 또 그네들을 상대로 한 도붓장수와 등짐장수, 방물장수가 들어오고, 마침내 일 년 뒤 기차가 마을 앞을 지나다니게 되자 일을 하다 다친 인부들을 치료해 줄 의원과 영혼을 치료해 줄 목사와 전도사, 신부와 중이 기차를 타고 한꺼번에 들어오고, 예배당과 성당과 절이 한꺼번에 세워지고, 다시 예배당과 성당과 절을 지을 인부들이 한꺼번에 들어오고, 다시 그들을 상대로 몸을 팔 여자들이 한꺼번에 들어오고, 이런 식으로 일거리를 찾아, 볼거리를 찾아, 기회를 찾아, 신도를 찾아, 짝을 찾아 먼 도시 또는 인근마을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었는데 훗날 평대의 향토사학자들은 이때의 갑자스런 인구팽창을 가리켜 '평대의 일차 빅뱅'이라 일컫었다. P148


 재미있게 읽어가다 잊고 있었던 댓글의 평가가 떠 올랐다. 건설 인부 다음에 가족이 따라 들어오지 않고 몸 파는 여자들이 먼저 들어올까? 건설 현장의 순서인가? 수컷의 본능을 해소해야 하는 중요한 문제라서? 남성 중심의 시대를 살았으니 그러했다고는 하나 여자인 금복이 성공하면서 남성이 되는 황당한 부분이 있다. 남자들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이야기인가? 성공한 사람은 남자여야 하는 건가? 이 시대를 사는 여자들의 권리와 영역이 넓어진 것이 원래의 것이 아님을 무의식 중에 인식시키고 싶은 걸까? 여자를 하대하고 역할에 한계를 짓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인공 3명이 다 여자인 건 신기하네. 이 작가의 생각은 뭘까? 수상소감을 읽으면서 이해가 되었다.


 작가는 여성들이 남성들보다 영적인 존재라는 생각을 한단다. 남성의 성기는 환하게 드러나 전혀 신비로울 게 없어 소설 속에서 희화된 모습이다. 여성은 우리 사회에서 여전히 마이너리티로 존재하고 아직 모든 게 밝혀지지 않았으며 그 신비가 다 드러나지 않아서 그 가능성은 아직도 진행형이라고. 이 소설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단지 젠더로서 여성뿐 아니라 우리 역사의 뒤편에 존재했던 마이너리티를 대표한다고 보며, 그들이 바로 지난 세기, 벽돌을 만든 사람이라고.

다행이다. 책 끝자락에 작가의 수상소감을 실어 그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서.


여행을 자주 떠나는 사람들 혹은 역마살이 있는 친구들이 공감할 말이 있다.

방랑벽이 있는 트럭 운전사가 사람들과 헤어질 때 자주 하는 말이 있다. 춘희에게도 말한다.

공감하는 문장이라 적어본다.

이봐, 벙어리. 이 벽돌을 다 팔아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으라고. 하지만 언제 오겠다는 약속은 못 해. 내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게 바로 약속이거든. -P377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고  '에필로그 하나.'를 읽다가 빵 터졌다.

기적의 건축술이라는 둥 금세기 최고의 건축물이라는 둥 우리 건축학의 수준에 세계가 놀랐다는 둥 언론의 유난스러운 호들갑과 모든 공을 이름 없는 한 벽돌공에게 돌린 건축가의 겸손. 그녀가 죽은 지 이미 오래되었지만 이쯤 되면 뭔가 훈장이라도 하나 추서해야 되는 게 아닌가 하는 관리들의 관습적인 반응, 훈장을 주긴 주되 산업훈장을 줄 것이냐, 아니면 문화훈장을 줄 것이냐를 두고 벌인 부처 간의 논쟁, 뒤이어 쏟아진 벽돌을 주제로 한 수많은 학술회의와 연구논문..........
 이윽고 대극장을 지은 모든 원인을 제공한 남북회담. 그러나 호텔 직원이 방을 잘못 배치하는 바람에 극장이 보이는 반대편에 투숙하게 된 북쪽의 특사들. 그래서 실은 아무것도 못 보았다는 믿을 수 없는 후일담. 호텔 직원의 해고와 의전 담당자의 문책. 춘희와 벽돌에 관련된, 봇물처럼 쏟아져 나온 서적과 드라마의 제작. 원래는 주인공의 몸무게가 백 킬로그램이 넘지만 스타를 캐스팅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사십팔 킬로그램으로 줄여야 했던 방송 작가의 고민. 여주인공을 맡은 배우가 벽돌보다는 도자기가 더 예쁘지 않느냐고 해서 할 수 없이 도자기를 굽는 주인공으로 바꿔야 했던 대대적인 윤색작업. 다시 이름이 촌스럽게 춘희가 뭐냐고 해서 마지못해 주인공의 이름을 애니로 바꿔야 했던 대대적인 수정작업. 남자 주인공을 맡은 배우가, 직업이 씨팔, 가오 상하게 트럭 운전사가 뭐냐고 해서 어쩔 수 없이 다시 재벌 2세 사업가로 바꾼 대대적인 밤샘 작업. 그렇게 해서 결정된 사십팔 킬로그램의 가난한 도예과 여대생과 재벌 2세의 신분의 벽을 뛰어넘는 슬픈 로맨스. 시청률과 대중성의 법칙. 이미 예정된 드라마의 대히트와 대중들의 무의미한 눈물......  p415

 왜 웃는지 모른다면 이 책을 다 읽으면 알 거다.


개인적으로 인상적인 문구를 더 적어본다.

 이쯤 해두자 진실은 모두 사라졌다. 이제 그 모든 호들갑은 우리의 주인공 춘희의 인생과 아무런 상관도 없어졌다. 그녀는 영웅도 아니었고 희생자도 아니었다. 그녀는 뚜렷한 목표를 가진 장인도 아니었으며 숭고한 예술가는 더더욱 아니었다. 그녀는 뚜렷한 목표를 가진 장인도 아니었으며 예술가는 더더욱 아니었다. 우린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며 살았는지 어떤 삶을 원했는지 알 수 없다. 그녀는 우리와 달랐으며 다르다는 이유로 평생 고독 속에서 살았다. 춘희를 둘러싼 한 많은 얘기들은 제 스스로 생명을 얻은 아메바처럼 무한히 확장해가고 있지만 정작 진실은 그 옛날 지상에서 사라진 무림비급처럼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그녀는 세상에 벽돌 남겼을 뿐이다. P.416


에필로그 둘

우린 어떻게 되는 거지? 우린 사라지는 거야. 영원히 하지만 두려워하지 마. 네가 나를 기억했듯이 누군가 너를 기억한다면 그것은 존재하는 것과 마찬가지니까. P.421


 천명관 작가의 소설은 처음 읽었다. 고령화 가족이라는 영화는 봤었다. 그의 작품인지 작가 자료를 찾아보면서 알게 됐다. 그의 동명 소설이 영화로 만들어졌고 시나리오 각색도 그가 했다. 박해일, 윤여정, 윤제문, 공여진 등의 배우들이 나왔다. <고래>를 읽고 다시 기억해 보니 천명관의 색이 확실히 있는 영화다.

작가는 시조의 운율처럼, 힙합의 라임처럼 이야기마다 생식(生殖)의 법칙, 거지의 법칙, 자연의 법칙, 감방의 법칙 등 '법칙'이라는 말을 넣었다. 정작 그의 소설은 법칙보다는 변칙을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다.

글쓰기의 변칙.  소설이 이렇게 재미있기? 이건 반칙.


 아주 좋아하는 작가가 있다. <망원동 브라더스>, <불편한 편의점>의 호연 작가다. 나이는 1974년 생으로 천명관 작가와 10살 차이다. 공통점은 영화계에서 먼저 일을 시작했고 천명관 작가처럼 소설을 수상하면서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김호연 작가는 2013년 <망원동 브라더스>로 세계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했다. 유쾌하고 위트 있는 문장으로 독자를 즐겁게 한다. 꾸질꾸질한 삶이지만 그 속에 애환이 있고 희열이 있다. 사람 사는 냄새가 나는 소설이라는 점에서 두 사람이 비슷한데 좀 다른 색이다. 김호연 작가의 글은 노랑과 연두색, 파랑과 회색이 들어가 있다면 천명관의 소설은 보라와 군청색, 흰색, 검은색 들어있다는 느낌이 든다. 등장하는 인물은 인간 내면의 본능에 가깝다. 날 것에 가깝다.  천명관 작가는 문학 공부를 한 적이 없다고 하는데 김호연 작가는 고려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김호연 작가가 정돈된 정원이라면 천명관 작가는 마구자란 숲 속의 정원이다. 김호연 작가의 <망원동 브라더스>라는 한 권의 책을 시작으로 팬이 되어 다른 책들도 줄줄이 읽었다. 천명관 작가의 <고래>도 그렇다. 그의 다른 책들도 읽고 싶어졌다.


천명관 작가의 문학동네 소설상 당시 수상 소감.

사람들은 말한다. 이제 소설이 현실을 포착해 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그리고 질문한다. 현실이 이미 거대한 허구가 된 마당에 그 허구의 허구를 보태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냐고. 서사는 멈춰 섰고 시간은 흩어졌다. 새로운 것은 이미 새로운 것이 아니다. 숙주를 찾아 헤매는 에일리언처럼 작가의 영혼은 아득한 우주 공간을 떠돈다. 그리고 다시 증식을 꿈꾸며 유일한 숙주로 남은 자신의 육체마저 먹어치운다. 그들은 끝내 살아남기 위해 죽기를 각오한 전자의 장수처럼 비장하다. 이 시대에 소설가가 된다는 건 행복한 일일까, 아니면 불행한 일일까? p454
졸고를 뽑아주신 심사위원들께 감사한다. 그분들은 나의 생각을 너그럽게 용인해 주었다. 나에게 사랑을 주신, 그래서 그 사랑이 나에게 있게 하신 부모님, 처음 소설 쓰기를 권했던 나의 동생, 언젠가 내가 무언가가 되기를 바랐던 친구들, 모두에게 감사한다. 모든 게 쉽지 않았지만 그래도 다행이다.  그리고 다시, 이야기는 계속된다. p.455


이 작가의 겸손이, 감사함이 능력에 더해 상을 수상한 원동력이 되지 않았을까?

2023년 부커상 최종 후보에 오른 지금, 그는 작은 행운이라 생각하고 담담하다고 한다.

응원한다. 수상이든, 아니든. 이번 기회에 멋진 작가를 알게 되어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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