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쟈 > 세계문학을 안 읽어도 되는 이유

아이를 데리러 피아노학원에 가기 전에 잠시 포털사이트를 둘러보다가 '세계문학을 안 읽어도 되는 이유'란 라디오 대담 녹취록을 읽어보았다. 김어준과 강유원의 30분짜리('배수의 진'이란 코너) '수다'를 녹취한 것인데 예전에 읽어본 '데리다를 안 읽어도 되는 이유'에 이어지는 것인 듯싶다(굳이 따지자면 '인생을 굳이 안 살아도 되는 이유' 같은 게 먼저 다루어져야 하지 않을까? 세상에 굳이 해야만 할일들이 과연 얼마나 될 것인가? 더불어, 데리다 대신에 헤겔을 읽어야 한다면 독자의 부담이 덜어지는 것인가?).

그러니까 시기적으론 2004년 이맘때인 듯싶다. 방송의 성격상 '웃자고 하는 얘기'의 성격이 강하지만(대담의 타겟은 '세계문학'에 대한 부르주아적 규준과 그에 대한 조롱이다. 더불어, 속물적인 무지의 정당화에 대한 아이러니이다) 프랑코 모레티의 책 이야기를 꺼내기 전에 워밍업 삼아 읽어보는 것도 괜찮을 듯싶다(녹취록의 문단들은 조정했지만 오자들은 따로 수정하지 않았다).   

김어준/강유원 대담: "세계문학을 안 읽어도 되는 이유"

김어준 : 코드 마음에 드십니까?

강유원 : 예, 마음에 듭니다.

김 : 예 지난주엔 저희가 삶의 모두스 비벤디(피식)에 대해 얘기하면서 철학을 삼십분에 쫙 정리해버렸는데,

강 : 아 그렇죠.

김 : 이번 주는 어떤 주제입니까?



강 : 혹시라도 노파심에서 말씀드리는데요, 철학 책을 사서 읽는다거나 하지 마십시오. 불필요합니다. 이번 주에는 세계의 문학. 이거 스트레스 받습니다. 고전이 얼마나 많은지. 그리고 얼마나 두꺼운지. 재미도 없어요. 사람 이름도 외우기가 힘들어요. 가령 러시아 작가들은 작가 이름도 어렵고 안에 들어가 있는 주인공들 이름도 어려워요. 특히 그런 주인공들 이름얘기하면서 마치 당연히 알지 이런 식으로 말 걸 때 당혹스럽죠. 뭐냐 가령 너 라스콜리니코프적이야 이렇게 말하면, 주인공 이름도 처음 들어보는데다가(김어준 폭소) 그녀석이 어쨌다는 건지 난감한데, 그러면 그게 뭔데 이렇게 물어볼 수는 없잖아요.

김 : 당연히 안다는 듯한 표정으로 얘기를 해야 하잖아요.

강 : 일단 세계문학 주제가 되잖아요, 그럼 아무 소리도 말고 가만있어야 합니다.

김 : 가장 좋은 방법은 가만히 있는다.

강 : 가만히 살살 웃다가 가끔 한번씩 호탕하게 웃어줘야 돼요. 한번씩 호탕하게. 그러면 사람들이 뭐가 있는 줄 알거거든요.

김 : 그렇죠.

 

 

 



강 : 세계문학의 본질에 대해서 들어가면, 일단 문학에 대해서는 아주 기본적으로 청취자 여러분께서 아시고 계셔야 되는 게, 문학 이전에 책, 책에 대해 편견을 버리셔야 돼요. 책을 많이 읽으면 유식해진다거나 책 많이 읽는 사람이 훌륭한 사람이라거나(하하하) 혹은 책이 사람을 만든다거나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 이런 표현 있죠? 이거 일단 버리셔야 돼요.

김 : 책을 많이 읽으면 유식해진다.

강 : 예.

김 : 책을 안 읽으면 무식해진다 이런 생각 버려야한다?

강 : 예. 안 버리면 영 괴롭습니다. 그게 어렸을 때부터 사실 그러거든요. 그런데 생각을 해보겠습니다, 한번. 이 지구상에 살고 있는 인구가 한 육십억 쯤 되죠. 그 인구 육십억 책 읽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일억도 안 되죠.

김: 아, 그래요?

강: 그렇죠, 1억도 안 되죠. 지금 우리 주변에 책 읽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됩니까. 꼽아보면 몇 명도 안돼요. 제가 직접 책을 읽고 쓰고 하니까, 제 형제들이 있는데 남동생만 둘이 있거든요, 제 형제들이 다 열심히 책 읽는 것 같지만 아니에요. 제가 작년 가을에 무슨 책을 하나 냈는데 책 표지가 노랬습니다. 제 동생이 와서 하는 말이 ‘어 형 책 냈네? 책표지 노랗고 이쁜데?’ 그러고 가더라고요. (김어준 폭소)



김 : 하하하. 책 표지 노랗고 이쁜데.

강 : 네. 이 정도니까 제가 제 동생을 비난할 수 없어요. 훌륭함의 정도는 저보다 제 동생이 나을 수가 있거든요. 일단 책 얘기가 나오면 이 대사를 알려드리자면, 우선 책의 본질부터 따져봐야 하지 않나 이렇게.

김 : (아하하) 세계문학을 논하기 이전에 책의 본질에 대해 알아봐야 하지 않나. 세계문학에 대해서 얘기가 나온다면.

강 : 예.

김 : 여기서 우선 기선제압용 맨트를.

강 : 네. 세계문학 하면 사람들이 하아~. 이번에 오스트리아에서 무슨 노벨문학상 받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오스트리아에서 누가 있는지 알게 뭐에요. (훗훗훗)모르죠. 모르죠. 모르니까 우리 오스트리아 하면 아는게 모차르트밖에 없어요. 모차르트는 알고 있을 만 하거든요. 그러니까 그것만 우선 생각하시면 돼요. 책의 본질부터 따져봐야 하지 않나.

김 : (배경음 깔리듯)기선제압용 맨트 나왔습니다, 책의 본질부터 따져봐야 하지 않나.

강 : 방금 전에 제가 말씀드렸던 거 있죠?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 중 책 읽는 사람 몇 안돼. 이러면 사람들 다 숙연해집니다(아하하). 50억 넘는 인간 중에 책 읽는 사람 1억인데 우리가 나머지 49억에 속한다고 해서 인생살이 괴로운 거 아니다. 거기다 덧붙이면, 인류가 생겨난 이래 책 읽은 사람이 몇 명이겠냐. (와하하) 숫자로 확 밀어붙이면요, 세계문학은 커녕 아무 책도 읽지 않아도 괜찮다는 그런 판단이 딱 깔리고 들어갑니다. 일단 이렇게 최저의 경계선을 밑으로 낮추어야 돼요. 낮추면은 사람들이 어 하거든요. 이때 세계문학을 얘기하기 시작하는 겁니다. 나도 책 좀 들여다 봤지만, (조그맣게) 열 권도 안 될지라도, 책 좀 들여다 봤지만 하면 본 것 같아요.

김 : 리드가 들어갔으니까,

강 : 끄트머리에 만으로 끝나는 문장 있죠, 이게 상대방에게 기죽이기 아주 좋아요. 가령, 이거는 직장생활하는 약간의 팁으로 말씀드리자면, 직장 상사가 어이 강유원 씨 왜 이따위로밖에 못해 이러면, 열심히 했습니다만... 하고 계속 이렇게 만 하고 있는 거에요. 그러면 말이 끝난 것 같기도 하면서 끝나지 않은 것도 같기도 하면서 계속 그러거든요. (하하하) 그럼 왜 이따위로밖에 못해 이러면, 계속 잘 하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만... 이렇게. 가령 메신저로 채팅을 할 때도, 되나 안 되나 테스트 한번 해보세요. 무슨 얘기하다가 알고 있습니다만, 만... 하면서 마침표 치지 않고 있으면, 상대방이 말을 안 해요. (아하하하) 그러니까 책에 대해서 말을 할 때도, 책을 좀 들여다봤습니다만, 이러면 사람들이 조용하거든요.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그냥 있으면 돼요. (대폭소) 그럼 저쪽에서 무슨 말로 상대해야 할지 굉장히 아리까리한 상황에 처하게 되거든요. 그렇게 할 때 이제 세계문학의 본질에 대해서,

김 : 책의 본질에 대해선 아까 얘기했으니까, 나도 책 좀 읽어봤습니다만.

강 : 세계문학이라는 건 사실은, 이때 단어 중요한 거 나옵니다, 이데올로기 이거 외우세요. (웃음) 이데올로기와 헤게모니. 이거 외우셔야 됩니다. 스펠링 모르셔도 돼요. 굳이 말한다고 해도, 우리말로 다섯 글자 세 글자니까. 이데올로기와 헤게모니. 세계문학이라는 게 이데올로기와 헤게모니의 산물 아닌가.

김 : (웃음) 키 문장 나왔습니다. 기선제압 문장 나왔고, 리드 문장, 책을 들여다봤지만, 핵심 문장, 세계문학이라는게 이데올로기와 헤게모니의 산물 아닌가.

강 : 네 그렇죠. 지금 우리가 이제 흔히,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이죠 그렇게 하면요, 약 1분 정도 분석을 해줘야 하거든요. 지금 세계문학이라고 불리는 것들이 죄다 잘산다는 나라의 문학 아니야, 이렇게 하면은 이게 이데올로기와 헤게모니의 산물이라는 게 바로 서포팅 돼요.

김 : 혹시 간혹 가다가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물어보는 사람들한테는.

강 : 또 이렇게 하죠. 세상을 사는 기본 단어가 안 들어있네. 이데올로기, 몰라? 허위의식. 딱 이렇게 하고, 헤게모니, 주도권. 단어 뜻 많이 알고 있으면 안 됩니다. 외우는 사람도 힘드니까. 그리고 이렇게 말이 많으면요, 상대방이 이 사람이 아는 게 적어서 변명이 많다 이런 식으로 알거든요. 딱 잘라서 단정적으로 얘기할 필요가 있어요, 이런 핵심단어들은. 세계문학이라는 게 이데올로기와 헤게모니의 산물 아닌가. 이데올로기라는 게 뭡니까, 이러면 이 사람, 쯧쯧쯧 이렇게 나가면서, 헤게모니라는 단어 알고 있어? 이렇게. 그 두 개의 단어를 갔다가 상대를 누르면은, 그게 중요하거든요.

김 : 자, 핵심 문장 하나 나왔고요.

강 : 그렇게 해서 내가 보기에는 세계문학 그래도 읽어야 한다면 말이지.

김 : 아 그 다음은.

강 : 그래도 읽어야 한다면 말이지, 이렇게,

김 : 네.

강 : 주요 강대국들의 작품이 빤하긴 하지만, (아하하) 그 동안 거론됐던 세계문학 많거든요. 보봐리 부인이니 그런 것들 많은데, 그런 건 사람들 다 알아요. 그런데 우리 읽을 필요 없거든요. 읽어봐야 되게 재미없습니다. 그리고 읽다보면 짜증이나요. 우리가 그 분야에 불어불문학과 영어영문학과 다니는 사람 아니니까, 세익스피어의 햄릿같은게 세계문학에 들어가지 않습니까, 오델로 멕베스 이런거, 그런데 읽어보면 오바된 문장이 많아요. 그 시대하고 우리하고 다르기 때문에. 읽다보면 짜증이 나는데 이런 문장 읽을 필요가 없거든요. 도움도 안 되는데, 그런 걸 거론하면요 대화 상대방중에 분명히 아는 사람이 있거든요. 상세하게 분석 들어가면 우리, 우리 수준에서는, 그렇죠 우리 수준에서는 안 되는거지. 이럴 필요가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택도 없다고 생각할 만하지만 누구나 다 읽었을법하지만 나도 한번 읽었을 것들. 미국의 세계문학 작품, 톰 소여의 모험. 톰 소여의 모험. 네 이거 훌륭한 작품입니다. 이거 애들 동화책 아니에요. 동화책이 이게 원래 동화책이 아냐. 이게 사실 따지고 보면 등장하는 톰 소여라던가 허클베리 핀이라던가. 그 다음에 페인트칠하는 장면들 흑인들 이런게 나오니까, 이게 미국사회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준 작품이기 때문에, 톰 소여의 모험, 이 정도만 읽어도 세계문학입니다. 톰 소여의 모험. 네. 이거 하나면 됩니다. 마크 트웨인.

김 : 마크 트웨인.

강 : 톰 소여의 모험.

김 : 톰 소여의 모험.

강 : 이거 하나만 기억하시면 돼요. 그리고 미국이란 나라가 역사가 짧기 때문에요, 문학이라는 게 없어요,
짜잘한 나라거든요 사실. (아하하) 인류의 역사에서 세계적으로 볼 때 미국이 세계사에 편입되기 시작한 게 몇 년 안 되거든요.

김 : 그렇죠.



강 : 2,300년밖에 안된 나라에 무슨 문학이야? 미국이라는 나라의 영어라는 게 네이티브 언어가 아니거든요. 고유 언어가 아니잖습니까. 미국, 마크 트웨인, 톰 소여의 모험. 이거 하나 딱 기억해주시고요. 영국, 그럼 찰스 디킨스 아닙니까, 올리버 트위스트 다 읽었죠! 이거 세계문학입니다. (조용히 김어준이 ‘나는 안 읽었다’고 언급한 듯한 분위기에서)이게 세계문학인가 하면서 올리버 트위스트 안 읽어본 사람 있으면, 안 읽어도 됩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 외우시면 돼요. 영국, 영국 하면 우리가 먼저 떠올리는 게 산업혁명이죠. 산업혁명기에 사회 계급적 문제를 드러낸 작품이거든요, 올리버 트위스트가. 이렇게 외우시면 돼요. 산업혁명 계급문제 올리버 트위스트. 그렇죠. 이건 중학교 때 배우거든요. 영국 산업혁명 계급문제 올리버 트위스트. 이제 됐습니다. 그런데 3대 강국에 또 프랑스가 있잖아요. 프랑스 이거 까탈스럽습니다.

김 : 까탈스럽다(궁시렁)...

강 : 프랑스 이것저것 많이 건드리거든요. 이게 또 나름대로 문학의 나라라. 딱 그러면요, 이렇게 말하면 됩니다. 프랑스 문학 작품 하면 알베르 까뮈 뭐 이방인 이러잖아요. 이방인 까뮈의 상표를 딴 꼬냑 있죠.

김 : 그렇습니까?

강 : 있습니다. 그것만 기억하고 있으면 됩니다.

김 : 아, 까뮈 꼬냑.

강 : 네. 까뮈라는 이름의 꼬냑이 있어요. 프랑스 문학은 계속 변화하고 있기 때문에 이게 좋은 건지 저게 좋은 건지 어렵습니다. 프랑스 문학은 좀 따분하고 하니까, 글쎄 프랑스 문학은 워낙 변화가 심해서, 이렇게 하고 둘러대고 넘어가면 됩니다. (아하하) 같은 세계문학에 넣어주기가 어렵습니다. (아하하하 계속) 정체성 찾기가 어렵단 말야, 이러면서 넘어가면 됩니다. 거기까지 기억하실 수 있겠습니까? 이정도야 저도, 누구나 기억할 수 있죠, 마크 트웨인 톰 소여, 찰스 디킨스 올리버 트위스트, 미국 실상 그대로 영국 산업혁명, 다 외웠습니다. 흑인 나오거든요, 톰 소여 보면.

독일, 프랑스, 워낙 까탈스러워서, 아직도 정체성이 확실치 않아, 변화가 심해. 독일 그러면 헤르만 헷세 그런 게 나오거든요. 헤르만 헷세 그러면 이제 젊은 베르트르의 슬픔인지 뭐 그런 거 나오는데, 헤르만 헷세 하면 유리알 유희라고 머리에 쥐나게 생긴 소설 있어요. 고거 읽었다는 사람 있거든요. 그거 읽었다는 사람 나오면은, 과감하게, 독일도 외울 필요 없어요, 헷세가 있긴 하지만, 독일 작품은 워낙 형이상학적이라 문학이라 할 수 있을까, 이렇게 말하면 쫙 찔립니다.(와하하하) 독일 문학이라는 게 워낙 관념적이거든요. 칸트 헤겔 제가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지만 다섯 명 중에 두 명인데, 대단히 철학적이거든요. 독일사람 두 명, 그리스 사람 두 명. 독일 문학이 워낙 철학적이라.

김 : (끼어들며)토마스 아퀴나스는 어디 사람인가요?

강 : 아, 그 당시 중세는 어느 나라에 속했다고 말하기 어려운데, 이태리 사람이라고 보면 되죠. 네 그런데, 독일 문학은 워낙 철학적이라 문학이라 할 수 있을까.

김 : (중얼거리듯 따라하며) 문학이라 할 수 있을까.

강 : 이렇게 하면은 이제 외워야 하는 작품 두개밖에 안되죠. (아하하하) 톰 소여의 모험과 올리버 트위스트.
그리고 프랑스는, 하긴 이 나라들이 지금까지 세계문학을 주도해 왔으니까, 지금까지 걔들이 세계라고 했잖아요. 그 다음에 이제 러시아 문학이 많이, 러시아가 남았는데 아 이거 괴롭거든요. 프랑스 워낙 변화가 심해서 독일 워낙 철학적이어서. 그런데 러시아 문학 남았거든요. 아, 러시아 문학, 이거 괴롭거든요.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라스콜리니코프. 도스토예프스키가 쓴 러시아 문학. 일단 이름이 외우기 어렵습니다. 러시아 문학에 보면 라스콜리니코프가 죄와 벌의 주인공인데, 그 이름 외우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라스콜리니코프적 인간 그러면 그 인간이 어떻게 살았는지 내가 알게 뭡니까. 러시아는 좀 더 지켜보자고! (대폭소) 딱 이래버리면은 작품 두개 외우고, 그 다음에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다섯 개 국가, 딱 잡힙니다.

김 : 러시아는 좀 더 지켜보자고.

강 : 아, 좀 더 지켜보자 이렇게 얘기하면 됩니다. 작가 이름을 외우기도 어렵거니와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간들이 워낙 꼬여있어요. 악령이라던가 그런 작품들 읽고 감동받았다는 그런 사람을 보면 오히려 그런 감동스러울 정도로 어려우니까 읽지 마시고, 그 다음에 주변부 국가들이 있는데 아르헨티나라던가 보르헤스라던가 이런 요즘 작품들이 있거든요. 이런 작품들이 거론되면 지난시간에 제가 알려드린거 있죠? 문학의 역사가 워낙 기니까 좀 더 지켜볼 필요가 있는 신생아들이라고 하는겁니다, 역시. 아, 그런다음 우리가 국내에서 얘기할 때는 이렇게.

김 : 국제적 대처방안도?

강 : 국제적 대처방안도 있죠. 국제적 대처 이거 굉장히 중요한데요, 외국인들이 혹시 외국인하고 얘기를 하게 됐다, 아, 외국인과 얘기하는 경우라면 확실하게 물건을 만들 수 있습니다. 가령 프랑스에 갔다, 그럼 프랑스 사람들이 영어를 잘 못하니까 영어로 합니다.(푸훗) 서로가 외국어기 때문에 기죽을 필요 없거든요, 프랑스 사람들이 프랑스 문학에 대해서 막 얘기를 하면서 자기네 문학의 성취라던가 플로베르라던가 알렉상드로 뒤마라던가 이런 얘기를 하거든요. 그럼 아 그런 작품들이 있었군요, 하면서 일단 띄워줍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언제적 사람들이냐, 1800년대 사람들이거든요. 1800년대 사람들이면 아 그러냐 해요. 한국에서 세계문학이라고 내놓을만한 게 있느냐, 그러면 사실 문학이라는 게 어떤 게 우월하고 어떤게 우월하지 않느냐 하고 평가할만한 기준이, 객관적 기준이 없어요. 그죠? 그럴땐 우리가 딱 객관적으로 내놓을 수 있는 기준이 있습니다. 얼마나 오래되었느냐. 있다 한국에도. 한국에도 박경리의 토지가 변억되었다 그런 거 다 쓸데없는 짓이에요. (폭소) 읽지도 않아요. 그 두꺼운 책을, 아이고, 할 일이 없어요? 읽지 않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느냐, 한국에 아주 오래된 문학이 있다. 서기 700년 무렵에 신라라는 나라가 있었는데, 향가가 있다. 그럼 서기 700년에 너네 뭐했냐, 그럼 한 일이 없거든요. 걔들. 아스테릭스 시대에요 그때가.(둘 다 큭큭거림) 그럴 때 이제 제망매가 같은 거 외우기 쉽거든요. 토지 같은 거 읽기도 어렵고 스토리 요약도 어려운데, 열 줄밖에 안 되니까 외우기 쉬워요. 딱 한 마디 읊어줍니다. 우리나라 한국에는 서기 700년경 이런 문학이 나왔다. 니네 서기 700년에 뭐했냐.

김 : 영어공부부터 먼저 해야겠네요, 저같은 경우는. 영어로 얘기를 하는 상황이니까.

강 : 다 그럴 필요 없죠. 제망매가 안 외웠으니까 모르거든요. 제망매가 딱 한 구절만 제가 소개해드릴게요. 이른 가을에 (김어준 한 마디씩 따라함, 이른 가을에) 흩어지는 낙엽처럼 (흩어지는 낙엽처럼) 한 가지에 나서도 (한 가지에 나서도) 어디로 가는지 모르겠구나. (어디로 가는지 모르겠구나) 누이동생을 갖다가 안타까워하면서, 죽은 누이동생을 안타까워하면서 부른 노래거든요. 그런 구절은 어디서나 공감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핵심은 뭐냐, 서기700년에 이미 한국에는 문학이 있었다. 요거만 딱 하시면 됩니다.

김 : 저희가 벌써 시간이 다 됐는데, 미국은 마크 트웨인 톰소여의 모험, 영국은 찰스 디킨스 올리버 트위스트, 프랑스는 워낙 변화가 심해서, 독일은 워낙 형이상학적이라서, 러시아는 좀 더 지켜보자고, 세계문학은 이데올로기와 헤게모니의 산물 아닐까, 키 문장 나왔고요, 마지막으로 이런 거 어떻습니까. 노벨문학상을 거론하는 사람들, 노벨문학상 수상작 제목들 거론하면서,

강 : 아, 그거 중요하죠. 노벨은 화학 공학자인데 웬 문학. 이러면 딱 얘기 끝납니다. (웃음) 화학 공학자거든요, 노벨이 엄밀한 의미에선. 노벨 문학상은 노벨의 참뜻에 어긋나는 상이야. 간단하시죠?

김 :
알겠습니다. 기선 제압용으로는 책의 본질, 그때 허허허 한번 웃어주시고, 알겠습니다, 그리고 최초의 기선제압용으로 책의 본질에 대해서 아나, 하고, 가만히 있다가 얘기를 시작할 때 나도 책 좀 들여다 봤지만, 하고 뜸 1분 가량 들인 다음에, 사람들이 쳐다보면 세계문학이라는 게 이데올로기와 헤게모니의 산물 아닌가. 하고 또 뜸 좀 들이겠죠? 그리고 미국은 마크 트웨인 톰 소여 대모험, 실상.

강 : 흑인이 나옵니다,

김 : 네 흑인, 그리고 올리버 트위트스, 산업혁명, 계급, 프랑스 독일 러시아는 각각 변화가 심해서 철학적이라서 좀 더 지켜보자, 이렇게 해서 저희가 세계문학의 주제가 등장했을 경우 어떻게 그 상황에서 얼굴을 세울 수 있나, 당황하지 않고, 외워주시기 바랍니다.

강 : 감사합니다.

김 : 고맙습니다.

06. 11. 16.

 

 

 

 

P.S. 해서 결론적으로 읽어야 할 세계문학은 <톰 소여의 모험>과 <올리버 트위스트> 두 권으로 압축된다. 나머지는 너무 까탈스럽거나 너무 철학적이고, 또 좀 기다려봐야 한다로 정리된다는 것. 예전에 '최근에 나온 책들'로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소개하면서 한번 인용한 적이 있는데, 영국시인 오든오든(W. H. Auden)의 흥미로운 평문 '허크와 올리버'에는 이런 내용이 지적돼 있다. 한번 더 간추린다.

오든은 두 작품, 즉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의 모험>과 디킨스의 <올리버 트위스트>를 현대 영미문학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거명하면서 두 주인공 허크와 올리버를 비교한다. 그는 자연에 대한 태도, 현실에 대한 태도, 그리고 시간과 돈에 대한 태도를 기준으로 하여 이들을 대조하는데, 가령 유럽(영국)인에게서 자연이 어머니의 품 같다면, 미국에서의 자연은 야성적이라는 식이다.

그러면서 그는 유럽인들이 읽기에 <헉핀>은 매우 슬픈 소설이라고 말한다. <올리버 트위스트>의 끝장면에서 올리버가 사랑이 있는 가정에 입양되면서 그의 꿈을 실현하는데 반해서 유사한 모험들을 겪게 되지만 허크는 그의 친구 짐과 결국엔 헤어질 것이며 다시는 못나게 되리라는 걸 독자가 알게 되기 때문이다. 또, 사건에 대한 태도에 있어서 유럽인들은 새로운 요소를 보지 못하는 반면에(사건들은 '반복'으로 의미화된다) 미국인들은 반복의 요소를 보지 못한다(사건들은 언제나 새로운 것으로 지각된다. 이런 경우 프로와 아마추어의 구분은 의미가 없다).

돈의 경우도 대비되는데, "올리버의 경우, 그것은 법적 상속권에 의해 그에게 주어진다. 허크의 경우에는 그것이 순전히 행운일 뿐이다." 오든은 거기서 조금 더 나간다: "미국에서 돈은, 자연이라는 용(龍)과의 전투를 통해 빼내는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에 곧 성인의 표증을 상징한다. 미국인에게 중요한 것은 돈을 갖는 것이 아니라 돈을 버는 것이다... 유럽의 단점은 탐욕과 인색이며, 미국의 단점은 이 양적인 돈이 성인의 표증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어디에서 중단해야 될는지 알기 어려운 데서 기인하는 근심이다... 사실 미국인들은 물질에 대해서 별로 연연해하지 않는다. 충격적인 것은 미국의 소비일 뿐이다. 마치 유럽의 미국인들에게 충격적인 것이 유럽의 탐욕이듯이." 음미해볼 만한 견해이다.(프랑코 모레티의 책 얘기는 분량상을 다른 자리에서 다루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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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pometree > 주변부에서 끊임없이 낚시질하기
미국의 송어낚시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리차드 브라우티건 지음, 김성곤 옮김 / 비채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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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처드 브라우티건의 소설 <미국의 송어낚시>는 근자에 읽은 소설 중에서 가장 신랄하고, 발랄한 작품이었다. 미국사회의 부조리한 문제들과 환경오염에 대한 그의 냉철한 시각은 읽는 이로 하여금 자세를 곧추세우게 한다. 그의 문체는 시니컬하고, 간결하다. 그가 이 소설에서 말하고 싶었던 주제는 과히 무겁고 진중한 것이지만 브라우티건은 이 책을 가볍고, 통통 튀는 언어로 채워 넣었다. 이것이 그의 상상력을 더욱 돋보이게 했고, 읽는 이로 하여금 이 책에 대한 호감을 일으키게 만드는 매력을 발산시킨다고 생각한다. 난 이 책을 읽는 동안 내내 마음 한구석이 편치 않았다. 비단,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허황된 아메리칸 드림, 환경오염과, 인간성의 상실문제가 1960년대의 미국만의 문제겠는가. 오늘날, 이런 문제들은 조금씩 변형되고 심화되면서 우리 곁에서 뿌리를 더욱 깊게 자리매김하고 있다. 단지, 우리가 그런 문제들에 무뎌졌기 때문에 올바른 인식을 하기가 버거워졌을 뿐. 그런 점에서 작가란, 세상을 올바로 볼 수 있는 예리한 시각과 정서를 겸비한 사람으로서 사회의 선각자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리처드 브라우티건은 다른 누구보다 이런 역할을 충실히 해내고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하지만, 선각자라는 말의 권위적인 이미지를 그는 거부할 것 같다.


  이 소설을 옮기고, 해설을 한 김성곤 교수의 수고가 없었다면 끝까지 이 소설을 읽을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문체나, 문학적 표현도 뛰어나긴 하지만 작가가 의도했던 사회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나 풍자가 은유적이고 상징적인 방식으로 소설 속에 녹아나고 있기 때문에 이런 이해를 도울 수 있는 각주와 해설이 없었다면 이 소설에 대한 이해도는 많이 떨어졌을 것이다. 작가 자신이 직접 아내와 딸과 함께 송어낚시를 떠난 경험을 바탕으로 빚어내서 그런지 소설 속의 이야기들은 하나같이 생생하고 진솔했다. 무엇보다 목가적인, 우리가 잃어버린 생태주의 적 삶의 소중함을 밑바닥에 깔고 현실의 부조리를 낱낱이 파헤치고 비웃으면서, 느껴지는 통렬함은 이 작품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매력이 아닐까.


  화자인 ‘나’는 끊임없이 좌절하면서도 끊임없이 탐색한다. 하나의 장을 시작할 때는 통렬한 비판을 가하고, 허무하다고 심정을 토로하는데 다음 장으로 넘어가면 그는 어느새 또 다른 송어낚시에 도전하고 있다. 상실, 허무, 좌절의 감정들은 이 소설의 음영을 넓게 드리우며 비극적인 현대인의 삶을 깊게 색칠한다. 거기에서 우리는 뼈저린 반성과 현실적인 자각의 장을 마련할 수 있다.


이런 상실과 좌절의 감정이 가장 잘 드러난 장은 <영원의 거리에서의 송어낚시>다. 바로 화자가 어린 시절 한 노파의 집에서 어린 아이치고는 꽤 많은 일들을 해주고, 조금의 보수를 받는 이야기가 있다. ‘나’는 노파의 집에서 일을 해주다가 어느 날 우연히 노파의 남동생이 써 놓은 일기장을 보게 된다. 뜻밖에도 그 일기장은 노파의 남동생 알론조 하겐의 송어낚시 일기였다. 알론조 하겐은 참 꾸준히도(마치 우리의 화자 ‘나’처럼) 송어낚시를 한다. 재미있는 것은 그가 7년동안이나 낚시를 갔는데 단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그가 일기장에 써 놓은 것은 다 그가 놓쳐버린 송어들에 대한 기록이다. 이 부분을 보면서 참으로 안타까우면서도, 송어낚시를 멈출 수 없었던 인간의 끊임없는 목가적 삶에 대한 동경, 본질적인 것으로의 회귀의 모습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송어낚시 일기 마지막에 알론조 하겐은 이렇게 적는다. “이러한 좌절과 당혹스러움에도 나는 믿는다. 놓친 송어의 총계를 생각해볼 때, 그것이 매우 흥미로운 실험이었음을. 그러나 내년에는 다른 어느 누군가가 또 송어낚시를 하러 가야만 할 것이다. 다른 어느 누군가가 그곳으로 가야만 할 것이다.”

이 부분을 읽기 전까지, 난 작가에 대한 질문 하나를 마음속에 품고 있었다. 왜 그는 비판만 하고 새로운 대안을 내 놓지 않는 거지? 작가라면, 좀 더 우리에게 희망적인 메시지를 주어야 하는 것은 아니야? 하지만 이 부분을 읽는 순간, 나는 리처드 브라우티건이 이 소설을 통해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깨달을 수 없었다. 그는 좌절하지만, 계속 어떤 고행처럼 이어지는 송어낚시 여행은 바로 우리에게 희망이 보이지 않더라고, 언젠가는 잡힐 수 있는 단 한 마리의 송어를 위해 계속 나아가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소설 속엔 극명하게 대립되는 두 존재가 양립한다. 어른 - 아이/ 송어와 하천이 상징하는유연함- 금속과 동상으로 상징되는 경직이 바로 그것이다. 양 날을 세우며 끊임없이 이 두 세계를 관찰하고, 비판하고, 동경하면서 한 장 한 장 책을 읽다보면 어느새 내가 잊고 지낸 것은 무엇인지... 앞으로 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깊은 생각에 잠기게 된다. 막연하긴 해도 우린 끊임없이 사회와 나, 사회 속에서의 나, 더 큰 테두리 안의 환경과 인간관계 속에서 어떤 세계관을 가지고 살아나갈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기를 멈춰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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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전체주의를 다시 생각한다

토요일밤에 올겨울 들어 눈다운 눈이 처음 내렸고, 덕분에 학회 뒷풀이를 마치고 늦은 귀가길을 재촉하는 마음도 그럴 듯했다. 하지만 그런 즐거움도 잠시 가벼운 폭설에 대한 감상을 몇 자 적으려고 컴퓨터를 켰건만 악성 바이러스의 공격을 받은 탓인지 인터넷이 먹통이었다. 진종일 복구하느라 애를 썼지만(물론 애를 쓴 건 집사람이고 나는 욕만 먹었다) 성과는 없어서 결국 당분간은 노트북에 연결해서 쓰기로 했다(해서, 이 페이퍼는 노트북으로 작성하는 첫 페이퍼이다).

 

 

 

 

기분도 무거운 김에 첫주제를 '전체주의'로 잡았다. 예상했던 일이지만 탄생 100주년을 맞은 해의 끝물은 아렌트의 <전체주의의 기원1,2>(한길사, 2006)가 장식하게 됐기 때문이다. 이 테마와 관련해서는 이전에 쓰거나 옮겨온 '한나 아렌트 르네상스' '두 개의 전체주의' '정치적 기획으로서의 테러리즘' 등의 페이퍼들을 참조할 수 있다. 이번에 '전체주의'를 검색하다가 박노자 교수가 몇 년전에 쓴 칼럼을 발견했는데, <예루살렘의 아이히만>과 함께 아렌트의 명성을 각인시켜준 이 노작을 읽기 전에 미리 읽어봄 직하다.

한겨레21(03. 11. 06) 누가 진짜 '전체주의'인가

독일인 의사로 북한에서 의료 봉사활동을 하다 북한 체제 비판으로 추방당한 뒤 최근 남한과 미국을 무대로 “북한 체제 전복” “북한 주민 해방”을 부르짖으며 이색적인 행동으로 자주 스캔들을 일으키는 폴러첸(Norbert Vollertsen)이라는 사람이 있다. 그의 인터뷰를 보면 그는 북한 체제를 ‘나치 정권’과 비교하고 그 체제에 ‘전체주의’라는 딱지를 붙이곤 한다. 북한에 대한 어떠한 포용책도 히틀러에 대한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이전의 영국·프랑스 등의 일관성 없는 유화정책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옛 동독의 멸망이 대량 피난으로 시작되었듯, 북한 체제 붕괴도 중국으로의 대량 피난으로 시작돼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폴러첸은 나치 정권·옛 동독·북한은 동질적인 ‘전체주의’이며, 자신은 ‘전체주의에 맞서는 자유의 투사’로 여기는 듯하다.

 

 

 

 

 

 

 

 

 

북한을 포함한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을 송두리째 나치와 동일하게 보는 것이 폴러첸뿐인가 냉전의 발발(1946~47년)부터 오늘날까지 소련식의 체제를 ‘나치식 전체주의’로 규정하고 ‘미국식 자유주의 사회’와 대조하는 것이 구미 보수언론들의 기본 논조다. 사회과학을 독자적으로 학습한 적이 없는 폴러첸이나 ‘악의 축’ 망발로 누명을 쓴 부시 현 대통령도 이 논조를 충실히 따를 뿐이다.

보수 신문이나 방송만으로 ‘상식’을 배우고 독서할 줄 모르는 부시와 같은 ‘지도층’으로서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그들이 최근의 사회과학 저서를 한번이라도 본다면-소수의 극우·우파 편향적 학자들을 제외한- 대다수 전문 학자들이 현실 사회주의의 억압성과 경직성을 인정하면서도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과 나치를 동일시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전체주의’(totalitarianism)라는 용어의 사용 자체를 자제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세계의 어떤 독재의 잔혹성을 강조할 때-특히 나치 독일의 파트너이던 일제 말기 총동원 사회 경험을 바탕으로 한 동아시아 개발 독재(1980년대 말 이전 남한·대만 정권)를 이야기할 때- ‘파시스트적’이라는 용어가 쓰인다. 그리고 ‘매우 억압적인 사회’라는 의미에서 ‘전체주의적’이라는 수식어도 보편적으로 사용된다. 그러나 사회학적 범주로서 전체주의라는 용어는 요즘 일반적으로 사용되지 않는다. 왜 그런가 보수언론들이 반세기 넘게 이용해온 ‘전체주의’ ‘나치와 소련 사회주의 동질론’등의 담론들이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그리고 학술적인 입장에서 어떤 결함을 내포하고 있는지가 밝혀져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기 때문이다.

냉전 초기인 1940년대 말~50년대 초, 당시 미국 사회과학 학계에선 두 가지 중요한 측면이 나타났다. 미국 학계에 새로운 역동성을 가져온 독일계의 자유주의적 망명 지식인들은 그들의 고향 독일이 왜 파시즘과 전쟁을 맞이하는가에 대해 뼈저리게 고민하고 있었다. 또 한편으로, 소련과 중국이라는 생소한 ‘미지의 세계’들이 미국의 주적이 됐기에 관(官) 주도의 ‘지역 연구’가 붐을 이루었다. 안보기관과 각종 재벌기금의 전례 없는 지원과 미 중앙정보국(CIA)과 국무성의 끈질긴 ‘지도’ 아래 1946년 콜롬비아대학의 러시아연구소, 1947년 하버드 대학의 러시아연구센터 등이 각각 설립됐다.

학생 시절부터 안보기관의 연구비를 받고 소련이나 중국을 인류의 숙적으로 알고 있던 ‘지역 연구기관’ 출신의 관 학자들에게는 공산주의의 본질적 악질성을 증명하는 이론이 필요했는데, ‘최고의 자유 지성’으로 인정받던 독일 계통의 망명 학자들로 인해 그 이론을 제공할 수 있었다. 비극적인 것은 이 과정에서 자유주의적 지성인들의 고뇌가 생각지 않은 방향으로 이용당한 것이다.

공산주의의 악마화에 ‘황금의 기회’를 준 것은 독일계 유대인 여성 철학도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75)가 발표한 <전체주의의 기원>(The Origins of Totalitarianism, 1951)이었다. 그 후 ‘전체주의’라는 용어는 이론적 권위를 얻을 수 있었다. 정통 자유주의자 아렌트는, 자신을 망명객으로 만든 독일 파시즘을 ‘전체주의’의 모범으로 파악했다. 소련을 ‘전체주의 국가’의 명단에 넣었던 그녀는 1968년 <전체주의의 기원>을 재판(再版)할 때 “소련은 더 이상 전체주의 국가로 불리면 안 된다”고 명시하는 등 애써 파시즘과 공산주의의 차별성을 강조했다.

그는 전체주의 사회의 특징으로 핵화(核化)돼 무기력해져 천편일률적 지배 이데올로기에 의존하는 ‘기 꺾인 개인’ 등을 삼았는데, 이는 1950년대 초 소련 사회와는 거리가 있었다. 이웃 공동체가 아직 해체되지 않고 향촌 사회에 대한 중앙의 통제가 완벽하지 않았던 당시의 소련과, 전통 공동체의 관계가 그대로 잔존하는 오늘의 북한에 ‘개인의 완전한 고립’과 같은 테제를 적용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그녀에게 이 책은 주로 독일의 역사적 경험에 대한 반성의 의미를 가졌음에도 미국의 수많은 관학자들은 이 <전체주의의 기원>을 발판 삼아 현실 사회주의에 악마의 얼굴을 씌우기 시작했다.

 

 

 

 

이 일에 가장 앞장선 자는, 미국중앙정보국과 국방분석연구부(IDA)의 지원으로 운영되던 대표적인 ‘지역연구’ 기관인 콜롬비아대학교 부속 공산권문제연구소 소장이던 브레진스키(Zbigniew Brezezinski, 1928년생, 카터 대통령의 국가안보 보좌관이 됨)였다. 그의 <전체주의적 독재와 전제(專制) 정치>(1965)에 따르면 소련 정권은 나치와 동질적이고, 무차별적 공포정치, 언론 완전 장악, 무력 수단, 국가의 철저한 경제 통제 등의 특징을 안고 있었다. 스탈린과 그 후계자들, 북한과 같은 ‘약소 사회주의 국가’ 지도자들의 실리주의적 대외정책, 스탈린 죽음(1953년) 이후 대사회적 억압은 지속돼도 ‘무차별적 공포정치’가 거의 종언을 고한 점 그리고 정부의 무기·경제·통신수단에의 관여 내지 부분적 통제가 대다수 근대국가들의 특징이라는 점 등은 철저히 무시됐다.

브레진스키류의 관 학자들에 의해 왜곡돼버린 아렌트의 ‘전체주의 이론’은 극우들에게 전가의 보도처럼 됐지만, 1960년대 말 좌파는 물론 실사구시적 접근법을 고수하려는 수많은 자유주의적 학자들은 노골적인 편향과 현실에 대한 무지로 점철한 ‘전체주의 담론’의 허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전문적인 파시즘 연구자인 캘리포니아대학의 사우어(Wolfgang Sauer) 교수는, 자본주의의 선진화 과정에서 신분을 상실한 소시민적 낙오자를 중심으로 한 독일이나 이탈리아의 파시즘이라는 극우운동이 후진 지역의 선진화를 목적으로 하는 ‘좌파적 극단적 개발주의’인 볼셰비즘과 정반대 위치에 섰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입증했다.

 

학계에서 주류가 된 이 주장을 이론화한 학자는 폴란드 출신으로 현실 사회주의를 체험한 영국 리즈대학교의 바우먼(Zygmunt Bauman) 교수였다. 그에 따르면 선진 지역의 ‘천민 극우 근대주의자’인 파시스트들이 식민지에서 대량학살 경험을 유럽에 이식시켜 홀로코스트 등을 저질렀고, 후발 근대화 지역의 볼셰비키 등의 ‘좌파적 근대주의자’들은 대중으로부터 정통성을 인정받기 위해 전통적 기제들(조국사랑, 지도자의 가부장적 이미지 조작, 간부층과 노동자층의 대가족적 관계 강조 등)을 이용해 상당히 공고한 ‘합의’를 바탕으로 하는 독재를 구축했다는 것이다.

 

 

 

 

오늘날 상당수 학자들의 북한 사회 이해 역시 ‘전통주의적 기제들과 일부의 일제 시대의 통제 메커니즘을 이용하고 근대 주권국가 건설·방위를 강조하는 개발주의’ 학설을 중심으로 한다. 물론 북한 사회가 일제 말기의 총동원 사회로부터 이어받은 일부분의 파시스트 연한 요소(육탄정신 찬양, 천황제를 이은 듯한 수령제의 종교화 등)를 내포한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힘들다.

그럼에도 소수 우파 학자를 제외한 대다수는 역사적 형성 과정과 정통성 부여 방식, 대외정책 방향이 이질적인 나치 독일과 북한을 전면적으로 단순비교하는 것을 학술로 보지 않는다. 문제는 구미 지역의 주요 보수언론들이 극우의 구시대적 견해를 십분 활용하면서 ‘전체주의’와 같은 수사적 어휘를 마치 학술용어인 듯 구사하는 데 있다. 결국 40~50년 전 미국중앙정보국 지원으로 만들어져 언론자본에 의해서 계속 재생산되는 전체주의의 담론이 지금 폴러첸의 모험주의적 대북 행동과 부시의 세계적 횡포를 받쳐주고 있는 것이다.

전체주의 담론에 대항할 수 있는 설득력 있는 접근은 무엇인가 북한 사회의 구성요소들을 구체적으로 해석, 규명해 북한 사회의 성격에 대한 객관적 정론이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 북한 사회를 이끄는 ‘극단적인 좌파적 근대주의’의 기원이 규명되는 동시에, 북한식 ‘합의 독재’와 ‘위로부터의 근대화’의 어두운 면도 과감하게 밝혀져야만 한다. 전체주의 담론을 붙잡는 극우들이 북한 인권 문제를 비방의 도구로 이용하지만, 남북의 민중 모두에게 엄청난 희생을 강요한 20세기 근대주의에 대한 남북의 경계를 초월하는 해부·해체 작업이야말로 ‘민중을 위한 21세기’를 열어갈 수 있게 할 것이다.(박노자 | 오슬로국립대 교수 · <아웃사이더> 편집위원) 

06. 12. 18.

P.S. <전체주의의 기원>에 대해서는 아직 리뷰들이 뜨지 않고 있다. 알라딘의 '새로나온 책'에서 발견했을 뿐 나도 아직 실물로는 보지 못했다(대신에 나는 하코트에서 나온 원서를 갖고 있다). 한편, 박노자 교수의 글을 읽다가 새삼 생각난 건 폴란드 태생의 걸출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1925- )의 주저들이 국내에 소개돼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물론 두어 권의 책은 소개돼 있다). 가령, <모더니티와 홀로코스트> 같은 책. 더불어 포스트모더니티에 관한 그의 몇몇 책들. 나도 고작 몇 권을 갖고 있을 따름이지만, 내년에는 바우만의 책들이 적어도 아렌트만큼은 소개되었으면 한다. 해가 가고 오는 게 다른 의미를 갖는 게 아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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