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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 - 지루함의 아나토미 ㅣ 자음과모음 하이브리드 총서 12
몸문화연구소 엮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3년 6월
평점 :
<권태> - 지루함의 아나토미, 몸문화연구소 엮음.
9명의 저자가 사회문화적 관점으로 권태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관철한 책으로 ‘권태라는 주제에 걸맞게 지루할 것’이라는 예상을 뒤엎고 엄청나게 흥미로웠다.
권태의 가장 주된 첫째 증상은 시간을 의식하는 데 있다. 이때 “시간”뿐 아니라 “의식”도 의식되는 것이다. 어떤 일에 흥이 오르면 거기에 심취해서 시간이 가는 줄을 모른다. 무엇에 너무 빠져있으면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도 의식하지 못하는 정도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권태에 잠기는 순간에 이러한 시간과 일, 의식의 관계가 역전된다. 이제 시간은 굼벵이처럼 느릿느릿, 그것도 오뉴월 엿가락처럼 축 늘어져 하품만 나게 한다. 시간이 시간으로서 의식되는 것이다. 더불어 권태의 주체는 그렇게 시간을 의식하는 자기 자신을 마치 타자라도 된 것처럼 낯설게 의식한다. 내가 시간의 무게에 짓눌리는 타자로서 현상이 되는 것이다. 나는 나이기를 못 견디는 타자가 된다.
어쩌다 주어진 여유가 행운이라면 일상화된 여유는 쇼펜하우어가 적절히 지적했듯이 지옥처럼 느껴질 수 있다.
현대인은 행복과 불행은 자신의 노력과 의지 그리고 선택의 결과라고 생각하며 재미없고 무미건조한 삶은 실패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누구나 영화처럼 삶이 흥미진진하고 기쁨으로 가득하기를 기대하고 추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대를 충족하면서 살 수 있는 사람은 아주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문제는 이러한 기대치가 없었다면 그럭저럭 괜찮았을 삶도 기대의 시선이 투영하는 순간에 견딜 수 없는 것으로 변질된다는 데 있다. 행복은 기대(혹은 욕망)와 반비례한다. 기대가 높을수록 불행을 더욱 예민하게 의식하는 것이다.
행복이 지속적으로 유지되는 기쁨이라면 쾌락은 순간적인 자극, 특히 관능적 자극으로 그러한 자극이 부재하는 상태가 권태다. 권태는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할 때에도 발생하지만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없는 경우에도 발생한다. 자기가 하는 일이 흥미로워 한다는 기대나 뭔가 흥미진진한 오락거리가 있어야 한다는 기대가 채워지지 않을 때 그 빈 공간은 권태의 몫이 된다.
다른 나라에 비해서 우리나라의 불행지수가 유난히 높다는 것은 이젠 상식이다. 그러나 불행지수가 높다는 사실을 무조건 부정적으로만 생각하면 안 된다. 불행에 대한 의식은 행복에 대한 기대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상관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와 같이 기존에 전혀 생각해보지 않았던 권태라는 개념과 우리나라의 한숨 나오는 자살률과 불행지수를 이런 관점으로 바라보는 것은 내게 너무나 흥미롭고 즐겁게 다가왔다.
낭만주의는 근대적 권태를 이해함에 있어 가장 중심적인 토대를 구성한다. ‘지루한’이라는 단어는 ‘흥미로운’이라는 단어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두 단어는 거의 동시에 유포되며, 거의 동시에 사용 빈도가 증가한다. 18세기 말 낭만주의가 도래하면서 비로소 삶이 흥미로워야 한다는 요구가 자기실현에 대한 일반적 주장과 더불어서 생겨난다.
권태라는 것이 꼭 권태로운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닐 수도 있으며 결국 행복을 추구하기 때문에 권태로운 것이다. ‘권태’와 ‘흥미로움’은 같은 시기에 생성되어 쓰이던 단어이며 낭만주의시대에 ‘권태’라는 개념이 크게 도래했다는 점은 많은 점을 시사한다는 부분에서 큰 공감을 할 수 있었다.
폭력성과 권태를 엮은 부분도 매우 인상적이었다. 인간 본성에는 누구나 폭력성을 갖고 있으나
그것이 적정수준에서 해소되지 못하고 억압되면 분노와 비슷한 권태로 인해 스릴감이나 쾌락을 느끼려고 폭력이나 범죄를 저지르곤 한다라는 주장에서 꽤나 개연성이 있는 얘기라고 들렸다.
재미중독시대, 인간의 사이보그화. 기계화를 논하며 나르시시즘적인 데카르트적 주체에 대한 부분을 읽으면서도 큰 공감을 할 수 있었다. 점점 모든 쾌락의 경계가 무너지고 있다는 기분이 들 때가 많기 때문이다. 성 상품화, 늘어나는 강력 범죄들 또한 이런 것의 연장선상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또한 가상현실이 현실과 거의 흡사해지는 순간부터는 타인이 필요하지 않을 거라는 점이 무섭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아직 그런 시대는 오지 않을 거라 믿는다.
사람은 쾌락을 추구함과 동시에 도넛처럼 가운데가 뻥 뚫리는 공허함에 시달리며
진정 어린 관계에 목마를 것이기 때문이다.
쾌락이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자극이라면 행복은 개인 자신이 생산하는 기쁨이다. 전자의 개인이 수동적이라면 후자는 능동적이다. 수동적으로 삶이 관리당하는 사람은 끊임없이 권태의 위협에 노출될 수 밖에 없다. 권태는 우리의 삶이 얼마나 우리의 고유한 것인지를 가리켜주는 바로미터라 할 수 있다.
삶이 고유한 주체, 삶이 관리 당하지 않는, 기계화가 되지 않고 쾌락에 중독되지 않은 이들이 분명 어디에나 있고, 그들이 세상을 그렇게까지 치닫게 만들지 않을거라고 생각한다.
권태에 대한 철학을 말하는 부분도 인상적이었다.
스피노자는 경이를 정서가 아닌 일종의 상상(표상)으로 본다. “경이는 어떤 실재에 대한 상상으로, 여기서 정신은 고착된다. 왜냐하면 독특한 상상은 다른 것들과 아무런 연관도 맺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경이가 정서가 아닌 이유는 이것이 그 자체로서는 아무런 역량의 변이도 낳지 않기 때문이다. 곧 경이는 우리가 새롭게 마주치는 어떤 대상으로부터 생겨나는 상상이어서 우리에게 어떤 기쁨이나 슬픔을 주지 않고 따라서 우리의 존재역량을 증대시키거나 감소시키지도 않는다. “
반면 경멸은 경이와 같은 유로서 정반대 상상이라고 말해도 될 것이다. 왜냐하면 경멸은 “정신이 어떤 사물의 현존에 의하며 그 사물 자체 안에 있는 것보다 오히려 그 사물 자체 안에 없는 것을 상상하게끔 움직여질 정도로 정신을 거의 동요시키지 못하는 어떤 사물의 상상”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에 대한 경이와 경멸은 하나의 상상, 혹은 착각에 불과하다.
현대인들은 주위에 사람들이 없거나 대화를 나눌 상대가 없어 권태를 느끼는 것이 아니다. 그와는 정반대의 상황이다. 바딜은 인터넷에서 수많은 사람과 접속하고 이야기를 주고받지만 권태의 하품을 참을 수가 없다. 양적으로 풍성한 대화에 정작 알맹이가 없다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혼자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생기는 감정이 따분함이라면 사람들에 둘러싸여 분주한 가운데 찾아오는 텅 빈 것 같은 진공상태가 권태다.
권태의 배후에는 보다 충일하고 보다 행복한 삶에 대한 요구가 버티고 있다. 더욱 아름다운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우리는 그냥 주어진 현실에 적응하면서 만족하는 법을 배우게 될 것이다. 권태를 경험한다는 것은 우리가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고 무미건조한 일상을 재주술화해야 한다는 요청인 것이다.
여러모로 과잉자극과 놀거리가 넘쳐나는 지금 이유없는 권태에 시달리는 현대인에게 권해주고 싶은 책이다. 홀로 있는 시간은 권태롭지 않게, 생산적으로 보낼 수 있는 독립적이고 행복한 현대인이 되려면 우선 자신의 증상인 ‘권태로움’ 이 어떤 것에 기인한 것인지 알아야 하지 않을까.
한 권의 책을 읽었지만 주제와 관점이 각각 다를 뿐 아니라 다른 책 내용의 인용도 잘 어우러져 마치 다양한 책을 한꺼번에 읽은 느낌이었다. 뇌를 뒤적이고 주위와 뒤를 돌아보게 만드는.
마음에 쏙 드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