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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의 마지막 날까지 - 세계적 명상가 홍신자의 인생 수업
홍신자 지음 / 다산책방 / 2023년 9월
평점 :
오늘을 처음 사는 것처럼 춤추고 사랑하라!
홍신자의 데뷔 50주년 기념 특별 판이란다. 세계적인 아방가르드 무용가이자 대한민국 최초 전위 예술가이며 명상가이자 작가다. 1940년 충남에서 태어났다. 영문학을 전공하고 1966년 우리나라가 해외여행의 자유가 생기기 한참 전 미국으로 건너갔다. 무용이라고는 해보지도 않은 사람이 알윈 리콜라이라는 무용가의 공연을 보고 만 28세라는 늦은 나이에 무용을 시작했다.
진로에 대해 상담을 하던 코디는 너무 늦은 나이라고 취미로만 하라고 했던 무용을 시작해 <뉴욕 타임스>의 이례적 호평을 받으며 성공의 반열에 올랐다.
이후 인도로 떠나 오쇼 라즈니쉬의 제자로서 수행의 길을 걸었다. 3년 만에 다시 무용계로 복귀한 뒤에는 래핑스톤(웃는 돌) 무용단을 설립해 존 케이지, 마가렛 렝탄, 백남준 등 세계적인 예술가들과 함께 작업했다. 그리고 71세 늦은 나이에 독일인 베르너 사세 한국학 교수와 결혼했다. 정말이지 평범하지 않은 인생행로다.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예술가로 뽑히는 그녀는 자유로운 영혼의 몸짓을 춤으로 형상화하며 작품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70만 베스트셀러 작가이기도 한 그녀는 무용수인 만큼 작가로서도 유명해 <나도 너에게 자유를 주고 싶다.>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유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 <나는 춤추듯 순간을 살았다> <자유를 위한 변명> 등이 있다.
올해로 그녀의 나이 여든세 살이다.
잠시, 여든세 살의 동네 어르신을 생각해 봤다. 84세에 돌아가신 우리 엄마도 생각해 봤다. 생의 마지막 1년을 뇌출혈로 쓰러지셔서 혈관치매가 왔고 1년을 고통스럽게 버티다 가셨다. 그 때문일까? 나 또한 노년의 삶에 대해 고민이 많다.
여든세 살! 홍신자는 작년 제주에서 사뮈엘 베케트의 원작을 바탕으로 한 <크랩의 마지막 테이프>라는 공연에 출연했다. 이미 어르신 대열에 들어 돌봄을 받아야 하는 나이인데 그 나이에도 이렇게 열정적으로 공연을 할 수 있다니 참 대단하다.
얼마 전 읽고 리뷰를 올렸던 <나이가 든다는 착각>에 따르면 ‘연령인식’이라는 것이 한 사람의 노후에 큰 영향을 미친다더니 홍신자의 연령인식은 매우 긍정적이고 그의 삶을 여전히 이끌고 있나 보다. 정신세계가 대단한 여성이다. 나도 60년대 말부터 살았으니 그 당시 사람들의 문화적 감성이 어떻게 인간을 지배하고 있었는지를 조금은 안다. 시대를 앞서간 여성, 시대의 문화적 요소를 뛰어넘어 자신을 개척해 간 홍신자의 삶에 먼저 경의를 표한다.
그녀는 스스로를 이렇게 소개했다.
“누군가에게 나를 소개한다면 제일 먼저 무용수라는 정체성이 따라붙겠지만, 나는 나 자신을 무용수라고만 정의 내리지 않는다. 이제껏 무용을 해왔지만 나는 글을 쓰는 작가이기도 하고 명상가이기도 했고, 자연을 즐기는 자연주의자이기도 했고, 또한 소리로 나를 표현하고 싶은 사람이기도 했다. 나는 여전히 지금의 나, 홍신자로서 하나로는 정의할 수 없는 삶을 살고 있다. 내 삶을 다시 한번 뒤돌아봐도 내가 많이 살았고, 하고 싶은 것은 다했고, 가고 싶은 곳도 다 가보았으며, 다양한 사람도 만나보았다고 생각한다.”
홍신자는 미국으로 유학을 떠날 때까지만 해도 무용을 하겠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없었단다. 그때까지 현대무용을 제대로 구경한 적조차 없었고, 한국에서는 영문학은 유학 초기엔 호텔경영학을 전공으로 선택했었다.
그런 그녀가 ‘우연을 가장한 숙명’처럼 우연히 보게 된, 전위무용가 알윈 니콜라이의 공연을 보고 ‘저것이다!’라는 깨우침이 찾아왔다. 미국으로 건너간 지 1년 만의 일이었고 스물일곱이었다. 무용 카운슬러는 남들은 열 살도 안 되어 시작하는데 스물일곱 엔 좀 어렵지 않겠냐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녀에겐 다른 것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그날로 시작했다.
그로부터 8년 동안 무용가라기보다는 운동선수로 살았단다. ‘근육을 찢었다.’라고 그녀는 표현했다. 태어나서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동작들로 인해 매일같이 근육을 펴고 팔도 찢고 다리도 찢고 목과 어깨도 찢고 허리도 찢었단다. 어느 날은 침대에서 일어나다 고꾸라져 화장실까지 기어가기도 했다니 놀라울 뿐이다. 그것도 경제적으로 도움 받을 데도 없이 어려운 시기였기에 밤이고 낮이고 지친 몸을 질질 끌며 푼돈을 벌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하는 시기였다.
한 사람의 집념은 뭔가를 이루어낸다.
무용 공부를 마치고 1973년 3월, 그녀의 첫 작품은 <제례>다. <제례>는 우리의 전통적인 곡소리를 내는 것으로 시작해, 장사 지낼 때 하는 일련의 의식을 변형해 구성한 정적인 무용으로, 하염없이 곡을 하다가 길고 검은 머리를 찬찬히 빗은 뒤 돌아앉아 등을 내놓고 옷을 갈아 입는단다. 그리고 화로에 종이를 사르고 촛불을 끄면 막이 내리는 작품이다.
뉴욕타이스가 호평하고 무용전문지들이 격찬한 이 데뷔작은 그해 가을 한국에서도 공연되었다.
<제례>는 그녀가 허무와 쓸쓸한 냄새가 깔려있다.
“나는 왜 허무를 주제로 삼았을까? 왜 그토록 지독한 허무를 내내 끌어안고 살았을까. 태생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는 사람인 걸까. 게다가 너무 일찍 알아버리고 말았다. 삶의 욕망들이 부질없음을. 어른들 옷자락이나 붙들고 다닐 법한 어린 나이에 인생의 그림자를 보았다.”라고 그녀는 회상한다.
해방 전 그녀의 가족은 만주를 오갔고 사람들과 헤어지는 일을 반복했다. 적응하면 떠나고, 정들면 헤어지는 일을 반복했다. 이는 어린 그녀에게 슬픔과 허무였고 공포였다. 해방 후의 삶은 죽기보다 살아남기가 더 힘들었단다. 전쟁의 한가운데서 삶과 죽음의 경계선을 넘나들던 시절, 나는 주로 책으로만 읽어온 그 시간들이 실감이 나지 않는다.
그즈음, 그녀의 언니가 10여 년 병을 앓다 이혼당하고 서른여섯 살이라는 나이로 죽음을 맞이했다. 그녀의 <제례>에는 가족들의 역사와 짧은 인생을 살다 일평생 꽃도 채 피우지 못하고 사라져 버린 한 여자의 한을 절절이 담아냈다.
이후 그녀의 삶은 <제례>의 삶이었다.
극단의 허무와 극단의 자유를 고독하게 살아낸다. 갑자기 찾아온 춤에 대한 회의감과 두려움, 그리고 삶에 여러 의문들을 인도로 떠나 도를 깨우쳐 보겠다는 마음으로 온갖 것을 한다. 며칠씩 잠을 안 잔다거나, 여러 날을 맨발로 걷거나 송장들 속에서 명상을 한다거나, 괴로운 단식을 하고 또 하고 도통에 좋다는 고행이란 고행은 다 했다. ‘누군가는 삶에 대한 진지함이 이 정도에 이르는구나.’라는 생각을 하며 읽었다.
젊은 시절 홍신자는 ‘결혼 같은 것은 하지 않겠다.’였다. 하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았던 탓에 자유로운 삶을 살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마흔이라는 늦은 나이에 결혼을 하게 되고 아이를 낳고 끔찍한 가난에 시달린다. 어쩔 수 없이 6개월 된 아이를 한국 시댁으로 보내고 1년 후 엄마를 잊어버린 아이, 엄마를 거부하는 아이를 만나며 또다시 고통한다. 우리 인간은 애착의 굴레를 벗어나고 싶어 하면서도 왜 또 굴레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걸까?
아무튼 홍신자의 삶은 ‘자유’를 향한 삶이었다.
한 인간이 아무것에도 메이지 않고 자유롭게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일까를 생각하면서 읽었다. 그건 과연 가능하기나 할까? 구도자도 아닌 그녀가 삶에서 보여주는 정신적 자유!
자유롭게 살고 싶어 하는 많은 이들이 그녀에게 묻는다. 어떻게 하면 자유롭게 살 수 있는지, 그녀가 이렇게 대답했다.
“솔직해지면 됩니다. 용기가 필요하지요.”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은 솔직하게 살고 있지 못한 것을 의미한다고 그녀는 말했다. 눈치를 보느라 싫은 것도 좋은척하고 누군가가 원하는 대로, 또 잘 보이기 위해...
그래, 우리가 원하는 자유를 산다는 것은 용기를 내는 일이다.
이 책을 자유를 갈망하는 모든 이들에게 기쁘게 권한다. 그리고 용기를 내자고 초대한다. 그녀처럼 자기 삶의 책임은 자기에게 있듯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