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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락사 논쟁 ㅣ 책세상총서 16
제럴드 드워킨 외 지음, 석기용.정기도 옮김 / 책세상 / 1999년 10월
평점 :
절판
최근 황우석 교수가 성공한 배아줄기세포 복제기술과 같이하여 생명 윤리에 관해서 안락사는 또다시 뜨거운 감자가 되어버렸다. 앞으로 이 안락사에 대해서 논해보고자 한다.
안락사(安樂死:euthanasia)는 어원적으로 ‘수월한 죽음(an easy death)’를 의미한다. 즉, 죽음이 임박한 병자의 고통이 심할 때 그 고통을 덜어주어 안락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을 의미한다. 예로부터 이 안락사는 종교, 도덕, 법률 등에서 그 찬반이 논쟁되어 왔다. 안락사가 도덕적으로 허용될 수 있다는 견해는 소크라테스, 플라톤, 스토아 학파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통적인 크리스트교에서는 살인을 하면 안 된다는 교리를 바탕으로 안락사를 반대해왔다. 현대에 들어 안락사를 합법화시키기 위해 1935년 C.K 말라드가 <안락사 합법화를 위한 자발적인 모임>을 만들면서 그 논쟁은 계속되어져 오고 있다.
위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안락사의 찬반이 영원한 평행선을 긋듯이 계속되어져 온 이유는 사람을 인위적으로 죽음으로 몰고 간다는데 있어서 그것이 살인인가 아닌가 하는 논점에 있는 것이다. 안락사 반대의 경우 사람이 당사자의 찬성이 있더라도 자연적 죽음이 아닌 인위적 죽음은 살인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핵심이고, 안락사 찬성의 경우는 죽음보다 더 한 고통을 그저 윤리적 입장에서 방관하는 것이 제 2의 살인이라고 여기는데 그 의견 차이가 극명히 드러난다.
그러나 환자나 보호자가 겪는 고통이나 환경을 생각해 볼 때 단지 인위적인 죽음에 이르게 한다는 이유로 인간의 존엄성을 해치는 살인이라고 단정할 수 있을 지는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 한다. 피터 싱어는 그의 책 ꡔ삶과 죽음을 다시 생각하며ꡕ에서 일반적으로 뇌 기능이 치명적으로 상실되었을 경우 죽음을 선고받는 것이 현재의 일반적인 기준이지만 무뇌아의 경우나 일부 뇌 기능의 경우 뇌 피질이 죽었을 때에도 계속 활동한다는 점을 들어 새롭게 인지, 각성, 감정반응 등 “인간다움”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능력을 기준으로 죽음 선고해야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여러 나라에서 뇌 피질기능 상실환자로부터 생명유지장치를 제거한 사례를 분석한 결과 죽음을 결정한 큰 요인은 “삶의 질”에 대한 판단이었다고 분석했다. 그는 삶에 대한 권리는 그가 인간의 육체를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다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면서 안락사를 지지한다.
실로 말기 암 환자의 경우 그 고통은 죽음의 공포까지도 뛰어넘는 다고 한다. 허버트가 말했듯이 말기환자의 대부분이 우울증에 걸린 비슷한 정서적 상황에 처하게 되는 것은 공감이 가지만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이라고 의사들이 증언하는 치유 불가능한 말기 암환자의 고통 속에서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이 정말로 죽음뿐일까 하는 의문이 든다. 위에서 말한 “삶의 질”이 더 이상 인간다운 삶을 유지하지 못할 정도가 되고 소생 가능성이 없다고 판정되는 환자에게 단지 도덕적 문제를 들이대면서 그 고통을 죽음 직전까지 고스란히 환자와 그 보호자에게 떠 안기는 처사는 치료나 인간 존엄성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의료서비스를 제공해주는 이에게 돌아올 비난만을 면해 보고자하는 일종의 “방관”이라는 또 다른 도덕적 문제를 야기 시킬 수 있다.
1976년 동경에서 있었던 제 1회 안락사 국제회의에서는 “우리는 인간의 권리와 자유를 확신하며 품위 있는 죽음을 책할 권리를 보유한다. 죽음은 피할 수 없는 필연이다. 사람이 어떤 죽음을 선택하는가는 스스로의 결정에 맡겨질 문제이다. 그것은 사별에 따르는 슬픔 이외에는 주위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런 의미에서 개인의 희망 표명 또는 살아있는 사람의 의지는 인간고유의 권리로서 존중되어 마땅하다”고 선언되었다.
이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안락사 반대입장에서 주장하는 혹시 기적 같이 치유될 수도 있고 그러한 사례가 있다는 점과 식물인간이 깨어날 수도 있다는 점등은 일부 특수한 예이지 모든 상황에 적용될 수 있는 보편성이나 일반성을 가지지 못한다. 그러한 특수한 사례를 바탕으로 환자나 보호자의 선택을 배제하고 자연적 죽음에 이르기까지 방치하는 것은 “방관”이자 일종의 “학대”임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
본문에서 말한 바와 같이 환자나 보호자의 인간다움을 유지할 수 있는 마지막일수 있는 선택을 우리는 단지 탁상공론일 수 있는 도덕적 문제를 들이대면서 배제하고 그 고통을 “방관”내지는 “학대”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