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아영엄마 > 잠시 딴 세상에 가 있었던걸까?
넉 점 반 우리시 그림책 3
이영경 그림, 윤석중 글 / 창비 / 2004년 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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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기가 엄마의 심부름으로 찾아 간 가겟집 앞 풍경과 방안의 모습...
그림을 보면서  "어, 저거! 우리 어렸을 때 많이 보던 건데!", "야~ 참 오랜 만에 보네! "하는 말들이 절로 나왔다. 요즘 아이들은 봐도 그것이 뭔지도 모르는, 그러나 어른들은 보는 순간 향수가 몰려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물건들이 그림 속에 지천으로 널렸다. 우선 문 앞에는 파란색, 하얀색 아이스케키 통이 두 개 놓여 있다. 자세히 보면 ‘석빙고’라는 글자가 어렴풋이 보인다. 아, 저 속에 든 하드 하나 사먹고 싶어서 얼마나 군침을 흘렸던지! 검은 고무 뚜껑을 열면 허연 김이 올라오는 통 안에서 맛난 아이스케키 하나 꺼내 먹으면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었는데... 요즘처럼 속에 든 빙과가 다 내비치는 투명한 유리문과는 참 많이 다르다. 그 옛날의 것은 속에 든 것을 드러내지 않고 감추고 있었기에 오히려 더 큰 욕망을 불러 일으켰다고나 할까.

방에서 라디오를 고치고 있는 가겟집 할아버지는 만물박사인가 보다. 육각형 통에 든 성냥도 보이고, 주판도 보이고, 윗 쪽 벽에는 부적과 작은 사진들을 다닥다닥 모아서 걸어 둔 액자도 보인다. 문에 붙어 있는 깨진 쪽유리가 땜질되어 있는 것이며 벽에 책자를 걸어둔 것까지, 예전 할머니네 집 방 안 풍경이랑 참 많이 닮아 있다. 그림을 살펴 보고 있자니 이젠 남의 집이 되고 모습이 바뀌었을 그 옛집이 너무나 그립게 여겨진다. 가겟방 풍경 중에 창호지를 바른 나무문은 아이들이 시골 외할머니 댁에서 가끔 보는지라 그나마 낯설지 않은 한가지이긴 하다.

아기는 엄마의 심부름을 온 모양인지, 영감님. 영감님~ 부르며 ‘시방 몇 시냐구요’ 묻고, 영감님은 ‘넉 점 반이다’ 하고 시간을 알려주신다. 아이들은 시간을 몇 시 몇 분이라 하지 않으니 낯설어서 왜 "점"이라고 하는지 궁금해 하는데 실은 나도 잘 모르는지라 "그냥 옛날에는 그렇게 말했는데, 숫자 옆에 점이 찍혀있어서 그런 거 아닐까?"하며 얼토당토않은 이유를 갖다 붙이기도 했다.-인터넷으로 검색해 본 바에 의하면 "점"은 조선시대에 밤의 시각을 세분화해서 나타낼 때 쓰이던 단위중의 하나로 현재의 "시"와는 다르게 쓰임- 그런데 가겟집을 나온 아이는 갈 길이 그다지 바쁘지 않는가 보다. 가겟집 앞에 매여 있는 닭이 물 먹는 것도 한참 구경하고, 길 가에 쪼그리고 앉아서 개미가 오락가락하는 모양새도 구경한다. 그래도 가겟집 영감님이 가르쳐 준 ‘넉 점 반’은 잊지 않으려고 “넉 점 반, 넉 점 반~” 우리 아이들도 잊어 버리지 않으려고 “넉 점 반, 넉 점 반~”

아기가 집으로 돌아오는 풍경으로 접어드니, 가로등에 불이 밝혀져 있고 먼 하늘에는 붉은 기운이 넘실거린다. 아이들에게 시간은 큰 의미가 없지 않을까? 우리도 어렸을 때 친구들과 노는 재미에 폭 빠져들어 주위가 어둑어둑해질 때까지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몰려다녔지 않은가. 그러다가 저녁 먹으라고 불러대는 엄마의 외침을 몇 차례 듣고서야 마지못해 집에 돌아가곤 했던 기억이 난다. 집에 돌아 온 아기의 두 손과 옷고름에는 늦은 오후에 나선 산책의 여흥을 짐작케 하는 빨간 붓꽃이 남아 있다. 방 안에서는 다른 아이들은 벌써 저녁을 먹고 있고 젖먹이 동생을 안고 있는 엄마는 해질녘이 되서야 들어온 아기를 "심부름 보냈더니 참 일찍도 다녀왔다."하는 표정으로 쳐다보고... 책을 본 우리 아이가 이상하단다. 내내 돌아다녔는데 아직도 넉 점 반이래! 아마 아기가 눈길 닿는 대로, 발길 가는 대로 노니는 동안에 세상은 여전히 넉 점 반으로 남겨져 있고, 아기는 잠시 딴 세상에 가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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