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지대 (리커버 특별판)
헤르타 뮐러 지음, 김인순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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젖소들이 꼴사납게 진흙덩어리를 발굽에 잔뜩 묻힌 채 대문에 들어선다. 젖소들의 배에서 풀 냄새가 난다. 일단 씹어서 삼 켜도 다시 목구멍으로 올라오는 풀덩어리는 내 가슴까지 아프게 한다. 멍하니 풀을 씹는 젖소들의 눈이 드넓은 풀밭에 취해 있 다. 저녁마다 젖소들은 이렇게 취한 눈으로 마을에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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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머니가 기침을 하자, 머리가 흔들렸다. 목에 자글자글 주름살이 잡혔다. 어머니의 목은 짧고 굵직했다. 그 목도 한때는 아름다웠을 것이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 언젠가는.
 내가 세상에 태어난 후로 어머니의 젖가슴은 탄력 없이 처지고, 내가 세상에 태어난 후로 어머니의 다리는 성치 않고, 내가 세상에 태어난 후로 어머니는 뱃살이 늘어지고, 내가 세상에 태어난 후로 어머니는 치질 때문에 화장실에서 고통스럽게 끙끙거린다.
 내가 세상에 태어난 후로, 어머니는 나더러 키워준 걸 고마워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눈물을 흘리고 한 손의 손톱으로 다른손의 손톱을 할퀸다. 어머니의 손가락은 투박하고 거칠게 갈라졌다.  
그 손가락은 오로지 돈을 셀 때만 거미줄을 치는 거미처럼 매끄럽고 유연하게 움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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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만의 방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30
버지니아 울프 지음, 이미애 옮김 / 민음사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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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쓰고 있습니다.

저는 이 책을 페미니즘의 고전 혹은 버지니아 울프의 대표작 정도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어느날 우연히 이 책의 한 구절을 인용한 글을 읽었습니다. 인용된 구절은
'서두를 필요가 없습니다. 재치를 번뜩일 필요도 없지요.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 되려고 할 필요도 없고요.'
였습니다.  

에이포로 9장 정도 분량의 소설을 쓰는 일은 여러가지로 결정해야 할 일들이 많았습니다.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무척이나 귀찮은 일이었습니다. 이래서 내가 그동안 4장을 못넘겼구나 싶었습니다. 그래도, 지금이 아니면 영영 뛰어넘지 못할 것 같아서, 그냥 했습니다. 살면서 그냥 하면 그냥 하게 되는 일들이 있다는 건 배웠거든요.

그러니까 어느 날 밤, 그냥 해도, 해도해도 안되던 어느 날의 밤, 머릿속에 이 문구가 '딩동'하고 초인종을 눌렀습니다.
'서두를 필요가 없습니다. 재치를 번뜩일 필요도 없지요.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 되려고 할 필요도 없고요.'

나는 소설을 잘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나 봅니다. 하지만 잘 쓴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러기 위해서는 제가 어떤 소설을 좋아하는지 부터 생각해야했습니다. 그리고, 나는 왜 소설을 쓰고 싶은지도요. 

'자기만의 방'을 읽어야겠다고 생각하고, 그날 밤 그냥 책을 폈습니다. 이 책은, '여성이 픽션을 쓴다는 것'에 대한 책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제 문체는 자기만의 방을 모방한 것입니다.)

제 방 창가의 책상에는, 초록색 갓을 쓴 스탠드가 있고, 몇개 남은 바닐라 아이스크림 향이 나는 초가 있으며, 장시간 앉아도 그럭저럭 견딜만한 의자가 있습니다. 세를 들어 사는 집이지만 제가 원할 때는 언제든지 책상에 앉아 책을 읽거나 글을 쓸 수 있습니다. 연 500파운드를 제가 버는지 어쩐지는 잘 모르겠지만 (지금 시가로(?) 얼마일까요) 어쨌든, 이번 달 월세는 냈습니다.
책상에 앉아서 책에 밑줄을 그으며 깨닫습니다. 내가 메리 카마이클이구나.
책은 연결돼어 있으며 결코 외톨이로 탄생하지 않는다고 버지니아 울프가 말했습니다. 글 또한 그럴 것입니다. 좋아하는 소설이 있기 때문에, 그 소설에 받은 감동과, 읽으면서 받은 위로로 인해 저 또한 소설을 쓰고자 하는 것이니까요. 고립되지 않고자 쓰는 것이니까요. 버지니아 울프는 메리 카마이클에게 100년의 시간을 주자고, 그녀가 자신의 이야기를 모두 하고 반을 덜어내게 해주자고 말했습니다. 나는 어쨌거나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이제 반을 덜어내는 여정을 시작해야 합니다. 앞으로도 쓰고 싶다면 말이지요.
나는 울퉁불퉁 모가 난, 이제 막 여정을 시작한 돌덩이였습니다. 데굴데굴 굴러서 이것저것 떨구어야 할 것입니다. 떨구어야 할 것은 많고도 많습니다. 분노와 원망 슬픔같은 감정들이 제게도 가득합니다.  그런 감정들은 마음을 좁게 만듭니다. 버지니아 울프는 이 책에서, 좋은 글을 쓰려면 마음을 활짝 열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메리 카마이클의 과제는 오른쪽이나 왼쪽을 돌아보지 않고 가뿐히 울타리를 뛰어넘는 것이라 했습니다. 주저 앉으면 끝이라고, 비웃으려고 멈추기만해도 끝이라고. 그냥 내 길을 달려 울타리를 뛰어넘으라고.

세상은 제가 글을 쓰던 말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플로베르가 정확한 문장을 찾는지 마는지도 상관이 없는데 서울에 사는 메리 카마이클이라고 다를까요. 거의 100년이 지난 지금도 소설을 쓴다는 것은, 비웃음을 사거나 한심한 사람 취급을 받는 일이기도 합니다. (아니기도 하지요.) 하지만, 저에게는 궁금증이 있습니다. 무엇이 아름답고 무엇이 진실인지. 소설을 쓰면 어떻게 되는지. 게다가 계속 쓰면, 어떻게 되는지.(좋아는 지는지) 알고 싶다는 것은 그만큼 애정이 있다는 뜻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두려움보다는 사랑이 많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인생이 다 내뜻대로 되지는 않지만, 두려움을 조금씩 극복할 수는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나, 서울의, 메리 카마이클  Lee는, 나만의 방에 앉아서 '자기만의 방'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습니다. 
나는 뜨겁고도 치열한 심장을 가진 여러 여성 작가들이 기다려마지않은, '천재도 아니고, 돈과 시간, 여유 등의 바람직한 조건들을 충분히 갖추지 못한 첫 번째 소설을 쓰고 있는 무명의 여성'입니다. 
나는 성실하고 싶습니다. 글을 쓰면서 느끼는 즐거움을, 글이 막힐 때면 요정처럼 나타나 아주 조금 실마리를 선물하는 인생의 미스터리를, 계속 경험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왼쪽도 오른쪽도 보지 않고, 분노나 슬픔에 주저하지 않고 달려서 울타리를 넘고 싶습니다. 


(...)서두를 필요가 없습니다. 재치를 번뜩일 필요도 없지요.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 되려고 할 필요도 없고요.(...)
- P21

(...)인간이라는 유기체는 실상 마음과 몸, 두뇌가 함께 결합되어 있고, 앞으로 백만년이나 지나면 모를까 각각의 칸막이 속에 격리 수용된 것이 아니기에, 훌륭한 저녁 식사는 훌륭한 대화를 나누는 데 대단히 중요한 요인이지요. 저녁 식사를 잘 하지 못하면 사색을 잘할 수 없고 사랑도 잘할 수 없으며 잠도 잘 오지 않습니다. 쇠고기와 프룬을 먹고는 등뼈의 램프에 불이 켜지지 않습니다.(...) - P34

(...)익명성이 여성의 핏줄에 흐르고 있습니다. 스스로를 베일로 가리려는 욕구는 아직도 그들을 사로잡고 있지요. 지금도 그들은 명성에 대해서 남자들만큼 신경 쓰지 않으며, 또 대체로 묘비나 길 안내판을 지나면서 거기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 넣고 싶은 억누를 수 없는 욕망을 느끼지도 않습니다. 앨프, 버트, 체스와 같은 남성들은 멋있는 여자 또는 개 한 마리라도 지나가는 것을 보면 "저 개는 내 거야."라고 중얼거리는 자신들의 본능에 따라서 그렇게 느끼겠지요. 물론 그것은 단지 개 한 마리가 아니라 땅 조각이거나 검은 고수머리의 남자일 수도 있을 거라고 나는 의사당 광장과 지게스 알레 그리고 그 밖의 거리를 연상하면서 생각했습니다. 아주 멋진 흑인 여자를 영국 여자로 만들고 싶다고 느끼지 않으면서 지나칠 수 있는 것은 여성만이 누리는 커다란 이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 P89

세상은 사람들에게 시나 소설, 역사를 쓰라고 부탁하지도 않고 필요로 하지도 않습니다. 세상은 플로베르가 정확한 단어를 찾든지 말든지, 칼라일이 이런저런 사실을 변밀하게 입증하든지 말든지 전혀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당연히 세상은 자신이 원하지 않는 것에 대해 보상을 치르지 않겠지요. 그래서 키츠나 플로베르, 칼라일 같은 작가들은 특히 창조적인 젊은 시절에 온갖 형태의 분열과 낙담을 경험합니다.(...)
키츠와 플로베르와 그 밖의 천재적인 남성들이 몹시 견디기 힘들어했던 세상의 무관심이 그녀에게는 무관심 정도가 아니라 적대감이었습니다. 세상은 남자들에게 말하듯이 "네가 원한다면 써라. 내게는 아무 상관도 없으니까."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글을 쓴다고? 네가 글을 쓰는 것이 무슨 소용이란 말이냐?"라고 말하지요. (...) - P91

(...)예술가의 마음은 자기 속에 내제한 작품을 흠 없이 완전하게 풀어놓으려는 엄청난 노력을 기울이기 위해서 셰익스피어의 마음처럼 작열해야 합니다. 그 안에 어떤 방해물이 있어서도 안 되고 태워지지 않는 이물질이 끼어서도 안 됩니다.
우리가 셰익스피어의 마음 상태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고 말하지만 그런 말을 하는 순간에도 우리는 그의 마음 상태에 대한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아마도 셰익스피어에 대해서 - 던이나 벤 존슨, 밀턴과 비교해 볼 때- 거의 알지 못하는 이유는 그의 원한이나 악의 반감이 우리에게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작가를 상기시키는 어떤 ‘계시‘에 의해 방해받지 않습니다. 항의하거나 설교하려는 욕구, 자신이 받은 모욕을 공표하거나 원한을 갚으려는 욕구, 세상을 자신이 겪은 곤경과 불만의 증인으로 삼으려는 욕구, 그 모든 욕구가 그에게서는 불타올라 소진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시는 방해받지 않고 자유로이 흐르는 것입니다. - P99

(...) 게다가 책이란 문장들을 이어 붙여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를 빌리자면, 아치나 둥근 지붕으로 지어진 것입니다. (...) 여성이 작가가 될 무렵 옛 문학 형식들은 모두 이미 굳어지고 결정된 형태였습니다. 소설만이 그녀가 다룰 수 있을 정도로 유연하고 새로운 것이었지요. 이것이 아마 여성이 소설을 쓰게 된 또 다른 이유일 것입니다. (...) 여성이 자유로이 팔다리를 사용할 수 있게 되면 틀림없이 그녀는 그것을 부수고 새로운 형태를 만들 것이며 반드시 운문이 아니더라도 자기 내면의 시를 전달할 새로운 수단을 제공할 것입니다. (...)
(...) 책은 어떻게든 육체에 적응해야 합니다.(...)
- P135

(...)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에게 아무리 사소하고 아무리 광범위한 주제라도 망설이지 말고 어떤 종류의 책이라도 쓰기를 권하고 싶습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여행하고 빈둥거리며 세계의 미래와 과거를 성찰하고 책을 읽고 공상에 잠기며 길거리를 배회하고 사고의 낚싯줄을 강 속에 깊이 담글 수 있기에 충분한 돈을 여러분 스스로 소유하게 되기 바랍니다. 나는 여러분을 픽션에만 한정하는 것이 결코 아니니까요. 여러분이 나를(나와 같은 사람이 수천 명이나 있지요.) 즐겁게 해주고 싶다면, 여러분은 여행과 모험에 관한 책, 연구서와 학술서, 역사와 전기, 비평과 철학, 과학에 대한 책들을 쓸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여러분은 틀림없이 픽션 기법에 도움을 주겠지요. 책이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으니까요. 픽션이 시나 철학과 뺨이 닿을 정도로 가까워지면 훨씬 나아질 것입니다. - P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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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5-26 1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ㅋㅋㅋ 문체 거의 유사한 것 같아요 ㅋㅋ 재치있는 독후감 ^.^ 울타리를 훨훨 넘어가시길! 쓰시는 글 응원할게요!

kidordin 2019-05-27 1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너무나 따뜻한 응원 감사합니다. 훨훨 뛰어넘도록 단단해질게요. 힘이납니다. 좋은하루 되세요!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글 쏜살 문고
마르그리트 뒤라스 지음, 윤진 옮김 / 민음사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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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에 써내려간 글이 좋은 글이라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물론 한번에 써내려가도 고치는 건 수십 수백번이 되어야한다는 전제조건이필요하다. 나의 경우는 쓰는 동안 무척 낑낑 거리며 힘들었거나, 여러번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 글이 결국 그렇게 부끄럽지 않은 모양새를 갖추곤 했다. 이만하면 되겠지 하고 쓰는 글은 반드시 부끄러운 글이 되고 만다. 나의 경우, 쓰면서 얼마나 막막하고 길을 잃었느냐가 결국, 층을 만들었던 것 같다.  패스츄리의 층처럼, 그렇게 쓰는 동안의 어려움은 켜켜이 기꺼운 버터가 되어주었다.
작가가 들려주는 글쓰기 이야기는 좀체 질리지 않는다. 작가마다 하는 이야기가 같으면서도 다르다. 그런 것이 재미있다. 표현도 다르고 문체도 다르고, 내게 와닿는 부분들이 다 다르다.
마르그리트 뒤라스에게서는, 그녀의 뚝뚝 떨어지는 고독이 내 맘에 똑똑 닿았다.
내게는 몇시간이고 전화로 이야기를 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했던 시간들도, 제발 좀 혼자 있고 싶다고 기도하던 시간들도 있었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생각해보면, 그 지긋지긋한 고독이 필요한 사람이다. 그 고독이 없었을 때, 부족했을 때 관계가 삐그덕 거리거나 내가 흔들렸다. 글을 쓸 수 없었다.
글을 쓸 수 없으면, 나는 자주 내가 아닌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히곤 했다. 글을 쓸 수 없으면, 내가 아닌, 더 완벽한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할 것만 같다. 내가 나를 견딜 수가 없어졌다. 그렇게 다른 사람의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곤 했다.
고독과 의혹.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글’을 읽고서 노트에 적었다.
고독과 친해지고 의혹을 두려워하지 말기.
나는 의혹이 생기는 순간을 잘 못견디곤 했다. 그럴 때마다 내가 문제인가 생각했다. 이제는 그럴 것이 아니라 글을 써야겠다. 그녀의 말에 의하면 ‘의혹, 그것은 곧 쓰기’이니까.


글쓰기의 고독은 그것 없이는 글이 만들어지지 않는, 혹은 더 써야 할 것을 찾느라 피 흘리며 부스러지고 마는 그런 것이다. 글이 피를 잃으면 쓴 사람마저 그것을 알아보지 못한다.(...)

책을 쓰는 사람은 언제나 주변 사람들과 분리되어야 한다. 그러니까, 고독해야 한다. 저자의 고독, 글의 고독. 자신을 둘러싼 침묵이 무엇인지 자문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집안에서 한 걸음 옮길 때마다, 하루가 흘러가는 매시간, 밖에서 들어오는 빛이든 켜 놓은 전등 불빛이든 어느 빛에서나, 정말로 그래야 한다. 몸이 처한 그러한 실제의 고독, 그것은 침범할 수 없는 글의 고독이 된다. 이 말은 아무한테도 한 적이 없다. 처음 고독 속에 칩거하던 그 시기에 이미 내가 해야 할 일은 글 쓰는 것임을 깨달았다. 레몽 크노가 확인해 주기도 했다. 그는 단 한 마디로 말했다. "다른 것 다 관두고, 써요." - P11

내 방은 침대가 아니다. 이 집에서도, 파리에서도, 트루빌에서도 그렇다. 오히려 창문이고, 탁자고, 늘 쓰던 검은색 잉크고, 어디였는지 찾기 힘든 잉크 자국이고, 그리고 의자다. 그리고 지금까지 남아 있는 습관들이다. (...) 책을 쓰는 여자들은 자기 책을 연인이 읽지 못하게 해야 한다. 한 장을 탈고하면 나는 연인이 보지 못하도록 감췄다. 정말이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하는지, 여자인 데다 연인 혹은 남편이 있을 때 어떻게 하는지 잘 모르겠다. (...) - P12

고독은 만들어진 상태로 찾아지는 것이 아니다. 고독은 만드는 것이다. 아니, 저절로 만들어진다. 나는 그렇게 했다. 이곳에 혼자 있어야 한다고, 책을 쓰기 위해서 혼자여야 한다고 결심했다. 그랬다. (...) - P13

(...)남자들이 잘 감당하지 못하는 것, 바로 글 쓰는 여자. 남자에게는 잔인한 일이다. 모든 남자에게 어려운 일이다. (...) - P14

살다 보면 찾아오는 한 순간이 있다. 아마도 운명적인, 피할 수 없는 순간일 것이다. 모든 것에 대해 의혹이 드는 순간이다. 결혼, 친구들, 특히 부부의 친구들, 모두에 대해서. 아이는 아니다. 아이에 대해서는 단 한 순간도 그렇지 않다. 그런 의혹이 사방에서 점차 커 간다. 그 의혹은 혼자다. 그것은 고독의 의혹이다. 의혹은 바로 거기서, 고독으로부터 태어난다. 이미 그렇게 부를 수 있다. 내 이야기를 감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아마도 그래서 누구나 작가가 되지는 못하는 것 같다. 그렇다, 바로 그것이 차이점이다. 그것이 진리다. 다른 건 없다. 의혹, 그것은 곧 쓰기다. 그러므로 작가이기도 하다. 그리고 작가와 함께, 모두 글을 쓴다. 우리가 늘 알고 있던 일이다. - P18

글을 쓰면 원시적이 된다. 삶 이전의 야생 상태에 이르는 것이다. 여전히 그런 상태를 만날 수 있는 곳이 있다. 숲의 원시성, 시간만큼이나 오래된 원시성이다. 모든 것이 두려워지는, 삶과 구별되지만 삶과 나뉠 수 없는 원시성. 악착같이 매달린다. 육체의 힘이 없으면 쓸 수 없다. 글쓰기에 다가가려면 자기 자신보다 강해져야 한다. 자신이 쓰는 것보다 강해야 한다. 이상한 일이다, 그렇다. 그저 글쓰기, 써진 글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짐승들이 밤중에 내지르는 울음이다. 모든 사람의, 당신들과 나의 울음. 개들의 울음이다. 사회의 집단적인, 절망적인 저속함이다. 고통이며, 또한 그리스도, 모세, 파라오들, 유대인들, 유대의 어린아이들. 행복, 가장 폭력적인 행복. 언제나,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 P20

절망을 버티며 쓰기. 아니, 절망을 품고 쓰기. 그 절망의 이름은 모르겠다. 이전에 쓰인 것을 옆에 두고 쓰는 것은 이전의 것을 망가뜨리는 것이다. 하지만 받아들여야 한다. 망친 것을 망가뜨리기, 그것은 다른 책을 향해, 바로 그 책의 가능한 다른 상태를 향해 가기다.
- P24

(...) 책의 글쓰기, 써진 글은 그렇다. 결국 다 내맡기고 놓아 버리게 된다. 자신의 고독 속에서 혼자다. 언제나 받아들이기 힘들다. 언제나 위험히다. 그렇다. 밖으로 나가 외칠 용기를 냈기에 치러야만 하는 대가. - P26

(...)절대 울지 않는 것은 사는 것이 아니다.

울기, 우는 일도 일어나야 한다. - P45

나의작은 오빠는 일본과 전쟁 중일 때에 죽었다. 무덤도 없이 죽었다. 공동 묘혈 속으로, 방금 전에 던져진 다른 시체들 위로 던져졌다. 생각하면 너무 끔찍하고 너무 잔혹해서 참을 수가 없다. 직접 겪어 보지 않고는 가늠할 수조차 없다. 시체가 된 몸들이 뒤섞인 게 아니다. 절대 그렇지 않고, 그 몸이, 수북이 쌓인 다른 몸들 속으로 던져진 것이다. 그의 몸, 바로 그의 몸이 죽은 이들의 구덩이 속에, 아무 말 없이, 한마디도 없이, 던져진 것이다. 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 외에는 단 한 마디도 없이
- P53

그런 것들이 아니었다면 글쓰기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언제든 울부짖을, 눈물 흘릴 태세로 글쓰기가 버티고 있어도 그것을 쓰지 않는다. 바로 그런 차원의 강렬한 감정들, 지극히 섬세하고 더없이 심오하며 무척이나 육체적인, 또한 본질적인, 전혀 예측할 수 없는 그런 감정들이 삶들을 온전히 육신안에 품어 부화시킬 수 있다. 그게 바로 글쓰기다. 글의 행렬이 몸을 거쳐 간다. 몸을 관통한다. 바로 그것이 말하기 어려운, 너무도 낯선, 하지만 한순간 우리를 사로잡는 그 감정들에 대해 말하기 위한 출발점이다. - P71

-그녀는 죽어야 했어요. 하지만 그러지 않았죠. 여전히 살아갈 거예요.
-그녀는 살아가요. 죽지 않아요. 나중에 죽죠. 한 남자의 포로이면서 동시에 그 남자를 사랑한다는 환상으로 죽어요.
하지만 죽는 날까지 바로 그 환상으로 살아요.
알기에 사는 거죠. 사랑이 아직 있음을, 온전히, 비록 부서졌을지언정 그대로 있음을 알기에, 그 사랑이 여전히 매 순간의 고통임을, 하지만 여전히, 온전히, 더 강하게 있음을 알기에 살아요.
그리고 그래서 죽어요. - P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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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거 : 몸과 허기에 관한 고백
록산 게이 지음, 노지양 옮김 / 사이행성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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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다니엘 페낙의 소설 <몸의 일기>를 읽은 후였습니다. 록산 게이의 <헝거>를 읽기 시작한 것은.
 <몸의 일기>는 한 남자가 소년 시절부터 죽기까지 자신의 몸에 대해 쓴 일기 형식의 소설이었습니다. 남성이 말하는 남성의 몸에 대해 읽었으니, 여성이 쓴 여성의 몸에 대한 책을, 이야기를 읽고 싶었습니다. 단순한 궁금증으로, 이렇게 독서를 하면 재미있겠다라는 생각에 <헝거>를 읽었으나 재미를 떠나서 이건 피로 쓴 글이구나 절감했습니다. 매일매일 자신의 피를 뽑아서 그 피를 잉크삼아 종이에 사각사각 쓴 것 같은 절실함과 용기를 느꼈습니다. 픽션과 논픽션이라는 장르의 차이를 감안하더라도 그랬습니다. 록산 게이의 몸은 여성이기도 하며 또한 고도비만이라는 소수성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고도비만이 되기로 선택한 결정적인 이유는 (그는 의도적으로 살을 찌웠습니다.) 그녀가 여성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남자들에게 매력적으로 보이고 싶지 않았고, 매력적으로 보일 때 (평생을 쫓아다니는 폭력을 경험했고)위험을 느꼈기 때문이니까요. 남성이 자신의 몸에 대해서 말하는 것과 여성이 자신의 몸에 대해서 말하는 데에 이렇게 큰 차이는 무엇일까 생각해보았습니다. 여성이 자신의 몸에대해서 말하는 데에는 더 큰 용기와 각오, 인간승리가 필요한 것 같았습니다.읽으며 많이 울었습니다. 
 
 특히나 록산게이의 <헝거>를 읽으며 눈물이 났던 대목은, 그녀가 절망과 자기 혐오를 묘사하며 고백할 때였습니다. 사실, 그녀의 고백에서 저의 것을 보았습니다. 내가 침묵했던 것, 수치를 느꼈던 것, 혼란스러웠던 것들. 그녀의 고백은 저항이었습니다. 지긋지긋했던 침묵에대한 용서가 이니었을까 생각합니다. 12살 소녀를, 엉망진창이었던 20대를, 완벽하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끌어안는 몸짓이 아니었을까 생가합니다. 
 이것은 폭력을 경험하고 소수자로 사는 사는 여성의 몸에 고백이면서 마음에 대한 역사였습니다. 그녀는 '폭력의 역사'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때론 무심하고 객관적이고 이성적인 글이 담아낼 수 없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록산 게이는 단어를 고르고 표현을 고심하며 정확한 문장을 쓰려 노력합니다. 그녀가 평소에 이 문제와 감정과 얼마나 씨름했는지가 느껴집니다.
  

 침묵을 쓰고싶다고 생각합니다. 
 <헝거>의 마지막 페이지를 읽고서 나를 알려면, 사랑을하려면, 내가 원하던 것들을 시작하고 자유로워지려면 나의 목소리로 말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됩니다. 이제 객관적인 추상은 지극히 주관적인 구체화가 되어야 합니다.
 
 '나는 이해받고 싶은 사람'이니까요.


굳이 내 이야기를 공유하려는 이유는 폭력의 역사를 공유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도 나 개인의 폭력의 역사를 말하기는 주저했으나 그 역사는 지금의 나라는 인간, 내가 쓰는 글의 내용, 내가 글 쓰는 방식에 대해 너무나 많은 것을 알려준다. 내가 어떻게 이 세상을 헤쳐가고 있는지도 알려준다. 내가 어떻게 타인을 사랑하고 타인에게 나를 사랑하도록 허락했는지를 알려준다. 폭력의 역사는 모든 것을 알려준다.
- P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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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02 00:3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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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02 22:4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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