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 왼쪽 날개를 펴다 - 사회주의 페미니스트 35인의 여성/노동/계급 이야기
낸시 홈스트롬 엮음, 유강은 옮김 / 메이데이 / 2012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사회주의 페미니스트 철학자인 낸시 홈스트롬(Nancy Holmstrom)이 편집한 󰡔페미니즘, 왼쪽 날개를 달다: 사회주의 페미니스트 35인의 여성/노동/계급 이야기󰡕(The Socialist Feminist Project: A Contemporary Reader in Theory and Politics, 2002)는 󰡔아름다운 외출󰡕이 기록한 시기로부터 100년이 지난 후인 1980년대 후반에서 2000년까지 쓰여진 35편의 글을 모아놓은 책이다. 󰡔아름다운 외출󰡕은 1950년대 후반부터 일어난 2세대 여성운동과 “페미니즘이 뒤흔든 20년”(1970년대-80년대)의 토대가 된 시절을 기록하고 있다. 󰡔페미니즘, 왼쪽 날개를 달다󰡕는 1970-80년대에 여성억압을 둘러싸고 제시된 다양한 분석을 사회주의 페미니즘 관점에서 재정리하면서 1990년대 이후 진행된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가속화를 분석하고 사회운동과 페미니즘의 쇠퇴에 전면적으로 대응하려는 여성들의 움직임을 담고 있다.

 

󰡔아름다운 외출󰡕이 영국과 미국에서 자신들의 꿈에 쫓겨 고달프지만 열정적인 여성들의 행동을 보여주면서 우리가 직면한 문제를 해결해갈 첫 걸음이 무엇인지를 질문한다면, 󰡔페미니즘, 왼쪽 날개를 달다󰡕는 사회주의 페미니즘에는 기나긴 투쟁과 이론화의 역사가 있음을 상기시킨다. 또한, 최근 20여년간 우리가 겪어 온 일을 분석하고 현재 상황에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강조하는 다양한 목소리를 들려준다.

 

홈스트롬은 서문에서 “계급과 성뿐만 아니라 인종/민족이나 성적 지향같은 정체성의 다른 측면까지도 통합하는 일관되고 체계적인 방식으로 여성의 종속을 이해하려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라고 규정한다(9-10). 필자가 보기에 정의라고 하기에는 그 범위가 너무 넓은 규정이긴 하지만, 홈스트롬의 이러한 규정은 1970년대 여성억압 분석을 둘러싼 여러 논쟁과 그 이후 진행된 페미니즘 이론과 정치의 산물이기도 하다. 즉, 홈스트롬이 정의한 사회주의 페미니즘은 여러 억압이 서로 복잡하게 맞물려 작동하며 계급이 분명 억압의 핵심을 구성하긴 하지만 성과 인종을 통한 억압이 경제적 착취로 환원되지 않는 복잡성을 포착해온, 최근 몇 십년간 페미니즘 운동과 지식생산의 결과이기도 하다. 이러한 노력은 20세기 페미니즘의 전개는 다양한 인종출신과 비서구지역에서 살아가는 여성들의 공헌에 힘입었다는 점을 뜻하기도 한다. (이 책의 저자들은 30%가 비백인여성이다).

 

홈스트롬은 1970년대 서구에서 진행된 여성억압 분석을 둘러싼 여러 논쟁을 간략하게 요약하면서 이렇게 언급한다. 경제문제가 다시 많은 페미니스트의 의제에서 중심을 차지하는 “지금이야말로 사회주의 페미니즘을 적극적으로 재평가하기에 딱 맞는 때이다. 세계화라는 야만적인 경제현실 덕분에 계급을 무시하기가 힘들어졌고, 페미니스트들은 1970년대에 사회적 차원에서 던졌던 커다란 질문을 이제 지구적인 차원에서 제기하고 있다”(23).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 남북 아메리카 등 전지구를 아우르는 우리 시대의 문제를 거론하는 35편의 글을 편집한 홈스트롬의 목적은 전지구적 자본주의에서 작동하는 상이한 형태의 억압이 서로 어떻게 관련되는지를 명징하게 분석하기 위해 “사회주의 페미니즘 기획이 가진 이론적 정치적 힘과 자원을 보여주면서”(10) “현재 진행형 기획”으로서 사회주의 페미니즘이라는 공통된 기획 안에서 토론과 대화가 이루어지도록 다양한 자료를 제공하는 것이다.

 

󰡔페미니즘, 왼쪽 날개를 달다󰡕는 여성해방은 사회주의 투쟁을 수반하며, 젠더, 인종, 계급, 국적, 성적 실천을 가로지르는 연대를 필요로 한다는 점을 논증한다. 이 책은 성(섹슈얼리티, 재생산), 가족(사랑, 노동, 권력), 임금노동과 투쟁, 경제학(사회복지와 공공정책), 정치(사회변혁), 지식생산(자연, 사회, 지식)을 큰 범주로 해서 총 6부로 구성되어 있다. 35편의 글을 다 읽어보면 실로, 저자가 주장한 대로, “우리가 사는 지구행성 자체를 파괴할 태세인 전지구적 자본주의라는 야만적 체제에 대한 대안을 이론화하고 건설할 수 있는 거대한 잠재력이” 사회주의 페미니즘 기획에 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29). 1부에 앞서 간략히 삽입된 <선구자들> 장은 이러한 기획에 장구한 역사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간략하게 인용된 20여 편의 인용문과 짧은 설명으로 이루어진 <선구자들>장은 󰡔아름다운 외출󰡕에서 로보섬이 누락한 부분을 상당히 보충하면서도 맑스주의와 사회주의 사상이 페미니즘과 만나는 지점을 보여주는 강렬한 예시이자 간략한 역사서같은 장이다.

 

35편의 글 중에서 가장 강렬한 글을 꼽으라면 도로시 앨리슨, 앤젤라 데이비스의 글을 꼽겠다. 이 두편의 글은 필자가 보기에 홈스트롬이 “사회주의 페미니즘이 지닌 유용성과 정치적 힘”을 가장 잘 보여주는 글이다. 1부 “성, 섹슈얼리티, 재생산”에 실린 앨리슨의 글, “계급에 대하여”는 자본축적이 우리의 삶의 가장 친밀한 구석구석까지 어떻게 비집고 들어오는지를 자서전적 이야기로 보여준다. 저자인 앨리슨은 가난한 백인노동계급 출신이며 소설가이자 액티비스트이자 레즈비언이다. 앨리슨의 글은 여성 자신의 이야기가 어떤 이론적 분석이나 논증보다도 강렬하고 복잡한 이론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또한, 성적 실천은 그간 주로 젠더와 더 밀접하게 논의되었던 것에 반해 이 글은 계급이 성적 실천을 구성하는 힘을 생생하게 논증한다.

 

투옥된 여성에 대한 성적 폭력을 다룬 앤젤라 데이비스의 글은 가정폭력이 국가의 성폭력으로 확대되는 지점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충격적인 연구다. 4부 “경제학, 사회복지, 공공정책”에 실린 데이비스의 글은 투옥된 여성에 대한 성적 폭력이라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영역을 탐구한다. 이 문제는 이제까지 거의 연구되지도 논의되지도 않은 분야이며, “오늘날 미국에서 벌어지는 여성 수감장 대한 성적 학대는 국가가 승인한 가장 극악한 인권침해”(414)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아무런 행동이 촉구되지도 않은 문제이다.

 

이론적으로 흥미로운 글은 2부 “가족: 사랑, 노동, 권력”에 실린 앤 퍼거슨의 글이다. 페미니스트 유물론을 펼치는 퍼거슨은 모성과 섹슈얼리티를 분석하는 사회주의 페미니즘을 “다중체계 페미니즘 유물론”이라 규정한다(221). 퍼거슨은 게일 러빈의 “성/젠더 체계”를 발전시켜 “성/애정 생산”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그녀는 이 용어를 가지고 이제까지 출산과 가족 네트워크 안의 인간관계를 재생산으로 정의해 온 관계를 “생산과정”으로 개념화하며, “가족과 친족 네트워크를 성/애정 생산의 중요한 물질적 토대로서 특권화”한다(223). 자본주의 경제와 관련하여 “성/애정 생산”은 “사람을 사회적 성 계급에 연결시킨다”(224). 퍼거슨의 “성/애정 생산 패러다임”은 아쉽게도 자본주의의 가족과 친족제도, 젠더 정체성 발달과정을 논의하는데서 멈추는데, 이는 “성/애정 생산” 개념이 루빈의 논의를 발전시킨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퍼거슨의 짧은 글을 다 읽고 느껴지는 아쉬움은 고정갑희의 󰡔성이론󰡕을 만나면 풀릴 것이다. 고정갑희의 책은 퍼거슨이 멈추는 지점에서 출발해서 이 “성/애정 생산 패러다임”을 보다 자세하게 펼치는 논의를 제시한다.

 

1960년대 이후 펼쳐진 페미니즘 논의와 논쟁을 먼저 훑어보고 현재의 문제와 씨름하고 싶다면 2장을 먼저 읽으라고 권하고 싶다. 2장은 젠더, 섹슈얼리티와 정치경제를 둘러싸고, 퀴어논쟁까지 포함하여 지난 30년간 여러 갈래의 페미니즘 논의와 논쟁을 압축적으로 정리한 글이다. 5장은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을 재성찰한 글이다. 가족론이나 가족문제에 관심이 있다면, 근대에서 포스트모던 가족의 변화사(6장), 정통 맑스주의의 가족론(10장), 미국(7장), 인도(8장), 치카나 문화(9장), 남아프리카와 중동, 남아시아, 동아시아(12장) 에서의 상이한 가족경험을 참조할 수 있겠다.

 

또한,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무한경쟁 속에서 사라지는 아버지들에 대한 분석은 13장에서 제시된다. 페미니즘 이론의 수정과정과 지식생산에 관심이 있다면 6부 “자연, 사회, 지식”에 실린 글들이 도움이 될 터이다. 특히 낸시 하트삭이 입장이론을 성찰하는 대목은 페미니스트들간의 이론적 대화가 이론의 정교화와 지식생산에 얼마나 큰 원동력이 되는지를, 이론(가)의 자기성찰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 월경을 둘러싼 사회적 규율에 신경이 쓰인다면 1부에 실린 에밀리 마틴의 글도 반가울 것이다.

 

전지구적 자본주의가 지구지역적으로 여성노동을 착취하는 방식과 여성노동자들의 대응은 주로 3부 “임금노동과 투쟁”에 실려있다. 3부는 최근 40년간 자본주의 변화 속에서 미국, 영국, 인도, 멕시코, 과테말라의 여성 노동자들이 직면한 문제와 여성노동투쟁을 기록한다. 이 글들은 전지구적 자본주의와 여성노동 상황을 간략하지만 명료하게 알게 해주는 글들이다. 3부 첫 글인 모한티의 글은 현재 상황에서 필요한 대안도 제시한다. 노동운동과 여성 노동자의 갈등관계, 계급운동의 젠더정치를 다룬 15장과 3부의 21장은 우리에게도 너무나 익숙한 갈등을 정리하면서 현재 노동운동과 사회운동이 쇠퇴한 원인이 무엇인지를 통렬하게 보여주며 앞으로의 방향성을 제시한다. 여성노동 활동가라면 15장과 21장을 강렬하게 감정이입하여 단숨에 읽어낼 것이고, 자신이 생각한 방향 역시 이 저자들의 논의와 동일한 것임을 발견할 것이다.

 

대안을 찾는다면 5부 “정치와 사회변혁”에 실린 7편의 글 한편 한편이 통찰을 줄 것이다. 5부의 글들은 정치적 선언문처럼 읽히기도 하고 정교한 정치전략서이기도 하고 동시에 정교한 이론적 글이기도 하다. 6부에 실린 글들은 5부의 정치와 액티비즘을 뒷받침하는 페미니즘 이론의 수정과 지식생산에 관한 논의이다.

 

“사회주의 페미니즘 기획”이 원제목인 이 책은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이론적 유용성과 정치적 힘을 보여준다. 󰡔페미니즘, 왼쪽 날개를 달다󰡕는, 데이비스의 󰡔여성, 인종, 그리고 계급󰡕(1982), 패트리샤 힐 콜린스의 󰡔흑인 페미니즘 사상󰡕(1990)과 더불어, 분명코 21세기 초반부에 페미니즘 운동과 지식생산의 방향을 모색하는데 큰 영향을 줄 이정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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