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의 위치
호미 바바 지음, 나병철 옮김 / 소명 / 200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호미 바바의 혼종적 양가성 논의는 글로리아 안잘두아가 <경계지대>에서 쓴 메스티자와 대결시켜 읽어야 한다.  

서구에서 지난 20세기 후반 50년은 아마도 "포스트-"의 시대로 기억될 것이다. 현재에 이르기까지 지난 50년 간 자주 회자되어 온 "포스트-"가 붙은 여러 이즘들을 거칠게나마 시간 순으로 말해 보자면 이렇다. postindustrial age (후기 산업 시대), postmodern (후기/탈 모던), poststructualism(후기/탈구조주의), post-feminism(제3세대 페미니즘으로서 후기 페미니즘), postcolonial (후/탈식민), post-metaphysical(탈형이상학적), post-psychoanalytic(탈정신분석학적), post-human(탈인간적) 등.

포스트식민주의는 역사적 식민주의 시기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제국주의 식민지 경험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던 문화와 역사를 비판적 시각을 통해 재조명해 왔다. 또한 여러 가지 복잡한 이유와 과정을 통해 "제3"세계인들이 "제1"세계에 이주해 들어가 살게 됨에 따라 발생하기 마련인 "제국"의 메트로폴리스 내부에서 일어나는 재식민화에 맞서서 문화적 혼종성(hybridity)을 강조한다. 이를 위해 포스트식민주의 이론가들은 제국의 텍스트를 분석하고 그 서사구조와 내용을 분석한다. 그리고 제국의 담론을 되받아치는 행위로서 글쓰기 혹은 언술행위의 중요성을 제기하며, 그 글쓰기의 행위로서 대항언술행위 중 알레고리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한다. 문화의 혼종성이 열어주는 가능성, 흉내내기와 틈새전략으로 균열적, 해체적 읽기, 협상과 번역의 중요성 등을 제안한다. 

 우선, 포스트식민주의 연구에 탄탄한 기반을 마련한 이론가인 에드워드 사이드는 명저 {오리엔탈리즘}(1978)에서 "동양"에 대한 서구의 지배 방식과 인식 방식의 긴밀한 상관성을 밝힌다. "오리엔탈리즘"이란 식민주의적 팽창 과정에 있던 서구인들이 피식민 주체를 인식하는 방식과 식민주의적 지식들이 생산, 재생산되는 기제를 일컫는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서구인의 동양관인 "오리엔탈리즘"은 실제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동양인들과는 아무런 상관없다는 점이다. 식민 주체인 서구인에게 "동양"은 실제 동양이 아니라 서구인의 지배 욕망이 투사된 "상상적" 동양 이미지일 뿐이라는 말이다. 식민 지배담론("오리엔탈리즘")은 식민 주체가 지닌 기원의 우월성을 주장하면서 피식민주체의 열등성을 고정시키고자 한다. 지배주체는 문명화된 우월한 존재인 반면, 피지배주체는 야만적인 열등한 존재라는 이분법에 근거해서 피지배대상을 야만의 상태로부터 구출하여 근대화 혹은 개화시켜준다고 함으로써 억압과 착취를 윤리로 포장한다.  


이런 식의 상상적이고 욕망 투사적이며 식민 폭력을 정당화하는 "오리엔탈리즘"이 "동양"에 대한 교묘하고 공고한 지식 생산 제도가 되어 감에 따라, 실재 동양인도 스스로를 "영원한 야만 상태의 미개인"으로 인식하게 되는 위력을 발휘한다. 이것이 바로 식민사관 혹은 식민 이데올로기의 현실적 힘이다. 

이 지점에서 포스트식민주의 연구의 선구적 이론가인 프란츠 파농을 경청할 필요가 있다.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은 피식민 주체(동양)가 식민 주체(서구)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규정되는 방식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에 피식민 주체의 물질적 심리적 상황을 설명하지 못하는 단점을 지닌다. 사이드보다 2-30년 앞서 파농은 {검은 피부, 하얀 가면} (1952)과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1963)에서 식민상황으로 인해 겪는 피식민 주체들의 개인적 집단적인 심리 구조를 설득력있게 설명한다. 파농에 따르면, 지배와 착취로 점철된 식민 사회는 피지배자요 피착취자인 앙틸레스 흑인들에게 비참한 생활만을 강요하는 게 아니다. 열악한 물질적 조건이란 인간 개인의 심리를 구조화하는 위력을 갖는 법. 식민 지배는 문화와 교육을 통해서 끊임없이 피식민 주체로 하여금 자신의 존재를 열등한 것, 혹은 비존재(non-being), 무인(no-man)으로 인식하게 만든다. 

피식민 흑인들이 보이는 존재의 소외감, 끊임없는 정서적 탈선과 열등콤플렉스를 파농은 다음과 같이 진단한다. 피식민 주체의 삶은 이중적으로 왜곡된다. 첫째는 경제적으로, 다음에는 심리적으로. (내적) 억압(repression)은 외부로부터 오는 탄압(oppression)과는 달리 자기생성적인 성격을 갖는다. 백인의 압제 하에 있었던 앙틸레스 흑인들의 경우, 벗어나기 힘든 열악한 물질적 조건과 인종차별적 세계와 식민주의적 세계관의 영향 하에서 자기 부정, 검은 육체에 대한 수치심, 자기비하, 무력감, 백인에 대한 선망과 증오(라는 부들부들 떨게 만드는 양가적 감정), 공격적 성향 등을 내면 심리에 키우게 된다. 파농이 더 무서운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은 (식민적) 탄압 자체보다는 탄압 속에서 파생하기 마련인 (자기)억압과 그로 인한 자기 부정이다. 자기를 부정하는 자,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정신과 의사답게, 정신분석학적인 해석을 시도하는 파농은 모름지기 인간 해방이란 인간들 자신의 존재 조건, 즉 외적이고 내적인 존재 조건에 대한 유물론적 이해를 기반으로 해야만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식민 사회에 대한 유물론적 이해에 기반한 피식민 주체들에게 폭력적 저항은 정치적 심리적 해방과 정체성 회복을 꾀하는 유일한 수단일 수밖에 없다고 파농은 쓴다. 


포스트식민주의의 "빅 쓰리"(사이드, 바바, 스피박)에 들어가는 주도적인 이론가인 호미 바바는 파농의 정신분석학적 통찰을 좀더 복잡하게 정교화한다. 포스트구조주의, 특히 라캉, 데리다, 푸코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바바는, {오리엔탈리즘}과 {문화와 제국주의}의 저자 사이드를 비판하는데서 출발한다. 바바는 사이드가 제국주의 지배담론의 시간적 연속성과 공간적 보편성을 전제함으로써 피식민 주체의 적극적인 저항의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봉쇄했다고 비판한다. 또한, 바바는 민족주의 담론 역시 비판한다. 신생독립국들은 식민담론이 왜곡, 훼손시킨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식민상태 이전의 순수한 기원으로, 과거로 퇴행하여 나르시시즘적인 자기 이미지를 복원시킨다. "우리" 민족이 과거에 얼마나 찬란한 문명을 가졌던가 하는 식으로 말이다. 바바는 이런 민족주의 담론 역시 순수한 기원으로 회귀하고자 하는 욕망을 스스로에게 투사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사이드가 논증했던 "오리엔탈리즘"식의 식민 담론과, 식민 해방 후 고유한 독립적 정체성을 수립하고자 "찬란한" 과거로 눈길을 돌리는 민족주의 담론 모두 이분법적인 정체성에 고착되어 있다는 점을 바바는 비판한다. 바바의 작업은 "식민적 양가성"(colonial ambivalence)을 내세워 소극적인 저항의 주체까지 저항 주체에 포섭함으로써 "탈"식민주의 시대에 걸맞는 주체를 찾아내려는 것이다.

바바가 말하는 "식민적 양가성"은 정신분석학의 통찰을 활용한 것이다. 정신분석학에서, 양가성이란 하나를 원하면서 동시에 그 반대의 것을 원하는, 끊임없이 오락가락하는 심리 상태를 설명하는 용어이다. 다시 말해 끌림과 혐오가 동시에 일어나는 심리 상태를 말한다. 이러한 양가성 개념을 차용하여 바바는 식민 지배자와 피식민자 사이는 단순히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끌림과 혐오가 복잡하게 뒤섞이는 양가적 관계가 된다. 피식민 주체는 식민 주체에 완전히 대항하지 않기 때문에 양가적이고, 식민 주체 또한 착취적이면서 베푸는 것으로 재현되기 때문에 양가적이다. 따라서 양가성은 식민지배자에게는 식민담론이 갖는 부정적인 측면이 된다. 식민주의 담론을 통해 지배자는 순응적인 주체, 즉 지배자를 흉내내는 주체를 생산하고 싶어 하지만, 실제로는 끌림과 밀어냄을 동시에 하는 양가적 주체들을 생산하게 된다.  식민 사회를 포함하여 모든 사회, 집단, 문화 안에서 작용하는 힘의 역학은 일방이 아니라 힘의 우위가 있긴 하지만 상호적이고 그래서 항상 양가성이란 틈새가 우글거리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식민 담론이 사이드가 논증한 대로 그렇게 일방적으로만 작용하는게 아니라는 점을 시사한다. "중심"에 의해 의심스러우며 분류될 수 없으며 경계선에 위치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주변부"가 "중심"을 불확적적이고 비결정적인 양가성을 지닌 것으로 만들어 버림으로써 "제국"의 중심성을 교란시킨다.  

물론 그렇다고 "중심"과 "주변"이 "똑같이" 힘과 권력을 가지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바바의 "식민적 양가성"은 문화적 혼종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혼종성은 식민화 과정에서 일어나는 접촉으로 인해 새로운 문화적 형태가 형성된다는 점을 가리키는 용어이다.지배자의 것이든 피지배자의 것이든 모든 형태의 주체와 정체성, 그리고 담론은 차이와 분열을 조장함으로써 이루어진다. 그리고 주체의 정체성에는 이미 타자가 섞여 있고 따라서 모든 형태의 정체성은 이미 혼성체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식민담론에서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의 관계는 양가적이고 지배자 안에 이미 타자로서 피지배자가, 피지배자 안에 지배자가 타자로서 존재한다. 이미 언제나 지배자의 담론은 피지배자의 담론에 의해 분열되어 있는 이 상황은 제3의 공간을 만들며, 그 공간은 새로운 문화의 가능성에 열려 있는 혼종/잡종의 공간이다. 바바는 피식민 주체의 흉내내기가 비아냥(mockery)이나 패러디라고 하면서 그 안에 이미 차이와 저항의 요소가 내재해 있다고 본다. 바바의 논지는 식민 담론은 피식민 주체를 전방위감시체계인 판옵티콘적으로 통제하면서 총체화하려고 하지만, 실제로 식민 담론과 식민 구조들이 그렇게 총체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흉내내기, 양가성, 혼종성 등은 이 점을 논증하기 위한 개념적 도구들이다. 예컨대 혼종성과 제 3의 공간은 여러 차이의 경계선들을 가로지르면서도 차이를 존중하게 하는 이론적 토대를 마련해 주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론적 복잡성과 정교함에도 불구하고 바바의 포스트식민 논의는 동화주의자의 발상, 혹은 제국의 힘을 인정하는 발상이다. {백색 신화}(White Mythology)의 저자, 로버트 영은 바바의 식민 담론에 관한 분석이 "저항의 역사적 증거"를 제시하지 못함으로써 정치성과 역사성을 결여한다고 비판한다. 사이드의 탈식민주의에 나타난 식민 담론의 일방적인 지배에 대한 반작용으로 바바가 지나치게 식민 담론에 내재하는 내적 불일치에 치중한 나머지 피지배자의 역사적 의식과 정치적 행위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또한, 바바의 정치적 저항은 지배자의 편집증에 기인한 것이지 피지배자의 정치적 의지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다. 그 결과 피지배자는 정치적 행위의 주체가 아닌 식민 담론의 지배 구조에서 발생한 자기 분열의 효과로서 "주체가 없는 행위자"로 전락한다. 영은 바바의 탈식민 전략들이 적극적인 정치행위로 연결되기 힘들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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