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를 부탁해
신경숙 지음 / 창비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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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문화방송은 <아줌마>라는 드라마를 만들었다. 그때 타 방송사에선 “시청률에서 <아줌마>를 이기는 건 불가능하다”고 푸념을 했다. 강석우와 원미경, 심혜진 등 당대를 주름잡던 호화배역진 탓만은 아니었다. “저녁 시간대 채널선택권을 가진 사람이 아줌마인데, 당연히 <아줌마>를 보지 않겠느냐?”는 게 이유였다. 하지만 결과는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막판에 시청률이 수직상승해 체면치례는 했지만, <아줌마>의 시청률은 경쟁사에 밀려 줄곧 2위에 그쳤다. 아줌마라고 해서 꼭 <아줌마>를 보진 않는다는 것, 소재보다는 얼마나 재미있게 만드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게 <아줌마>의 교훈이었다.


한국인에게 있어 ‘어머니’만큼 가슴을 애잔하게 만드는 단어는 없을 것이다. 다른 나라라고 해서 그런 게 없겠느냐만은, 우리 어머니들이 견뎌온 질곡의 역사는 우리로 하여금 어머니를 떠올릴 때마다 눈물이 나게 만든다. 하지만 어머니를 소재로 한 책이라고 해서 언제나 잘 팔리는 건 아니다. 예컨대 <아버지>라는 베스트셀러를 냈던 김정현 씨가 후속작으로 쓴 <어머니>라든지, 현 대통령께서 대선을 앞두고 갑자기 펴낸 <어머니>는 그다지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 같지는 않다. 이런 소재일수록 소설가의 내공이 더 필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내공도 갖추지 않은 채 눈물만 짜내려고 하다간 독자들의 짜증만 불러일으키기 일쑤니 말이다. 그렇게 본다면 능력 있는 작가인 신경숙 씨가 어머니에 대한 소설을 쓴 것은 아주 적절했다. <엄마를 부탁해>를 읽고난 뒤 난 쏟아지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어 아파트 창밖만 하염없이 바라봐야 했다.


이 소설에 나오는 어머니는 날 키워주신 어머니와 같지 않다. 책에 나오는 어머니와 달리 내 어머니는 돌아가신 아버지로부터 듬뿍 사랑을 받으셨고, 학교 교사로 제자를 키우며 제법 보람있는 삶을 사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물이 났던 건 내가 드린 사랑이 어머니로부터 받은 사랑에 턱없이 미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너는 이 에미에게 항상 기쁨이었다는 것만 기억해(215p)."

어머니한테서 이 말을 자주 들었던 기억이 난다. 내가 공부를 잘해 어머니한테 기쁨을 드린 적이 있는 것도 아닌데, 공부라면 셋째언니가 훨씬 더 잘했는데, 어머니는 늘 내게 저 얘기를 하셨다. 말로만 그런 것도 아니다. 어머니는 실제로도 나를 가장 예뻐해 주셨다. 공부를 잘했던 세 언니들보다 훨씬 더. 결혼해서 아이를 돌보느라 어머니한테 무심하게 지내는 세 언니들보다 지금의 내가 어머니를 더 자주 찾아뵙긴 한다. 하지만 어머니의 잔소리를 들을 때마다 짜증이 솟구친다. “결혼은 도대체 언제 할래?” “사귀는 남자는 있니?”라는, 십년도 더 된 레퍼토리에 질리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래서 난 늘 어머니께 짜증을 내고 집을 나서곤 한다. 어머니는 지금도 내가 ‘기쁨’ 그 자체일까? 아니면 치워야 할 부담스러운 존재일까? 이런 상념에 심히 헷갈려하던 내게 이 책은 답을 제시해 줬다.


이 책을 읽은 누군가는 말한다. “이거 순전히 신파잖아!” 네이버 백과사전을 찾아보면 신파소설에 대해 다음과 같은 정의를 내리고 있다. “그 수사나 형용사가 지나치게 과장된 미문조(美文調)로 되어 있는 반면에 주제는 매우 통속적인 비극으로 되어 있고, 사건의 전개 또한 필연성보다 우연성에 의존하고 있어 사실성이 결여되어 있다.”

<엄마를 부탁해>가 이 정의에 들어맞는지 난 잘 모르겠다. 하지만 신파면 좀 어떤가? 이 책 덕분에 사람들이 어머니 생각을 한번쯤 더 한다면, 그것으로 좋은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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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
주노 디아스 지음, 권상미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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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뚱뚱한 사람을 사귈 수가 있을까?’

오스카에 관한 책을 읽으면서 늘 이 생각을 했다. 외모지상주의가 지배하는 우리 사회에서 뚱뚱하다는 건 대머리와 더불어 여자들이 꺼리는 양대산맥이다. 대머리가 유전에 의한, 어쩔 수 없이 그리 된 것이라면, 뚱뚱하다는 건 게으르고 의지가 박약한 결과물이란 생각이 든다. 최근 비만도 유전이고, 웬만한 의지로는 고칠 수 없다는 게 밝혀지긴 했지만, 한번 주입된 선입견은 고쳐지지 않았다. 4년쯤 전 사귀었던 남자는 그런 편견에 기름을 부어줬는데, 그는 제대로 시간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무슨 이벤트 같은 걸 해준 적도 없다. 움직이는 건 무지하게 싫어해 몇 달을 사귀는 동안 같이 숲길은 고사하고 덕수궁 돌담길조차 걸어본 적이 없다. 그저 한자리에 앉아 술만 들이붓는 그 앞에서 난 자주 외로움을 느꼈다. 그와 헤어진 이유가 이것 때문만은 아니지만, 그가 평소 내게 많은 추억거리를 남겨 줬다면, 그리고 그의 배가 그렇게까지 많이 나오지 않았다면, 몇 달 후 그가 그 일을 벌였을 때 내가 대번에 결별 선언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젊은 시절을 키스 한번 못하고 보낸 오스카를 보니, 그리고 그가 아무 여자에게나 들이대는 처절한 모습을 보니 갑자기 배가 나온 그 남자에게 미안해진다. 그는 내게 자주 말했었다. “나 같은 사람을 좋아해 줘서 고맙다.”고. 그땐 그렇게 말하는 그 남자에게 화를 냈었다. 자기가 어때서 그러냐고, 좀 자신을 가지라고 하면서. 난 솔직하지 못했다. 그와 함께 있을 때면 난 좀 부끄러움을 느꼈으니까. 그런 내 마음을 어쩌면 그도 알아차렸는지 모른다. 그래서 여기저기를 다니기보단 음침한 구석자리에 앉아 술만 마셨을지도. 지금 생각해보면 그에게 잘해주지 못한 건 나였다. 사실 나도 그렇게 잘나지 못했는데. 아주 못생긴 건 아니라해도, 적어도 이 소설에 나오는 여자들만큼은 아니잖은가.

먼저 룰라. “청치마 밑으로 쭉 뻗은 다리는 부당하다 싶을만큼 길었다”

다음으로 벨리, 엄청나게 큰 가슴과 엉덩이를 가진 이 여인은 권력의 실세가 이름을 묻자 “벨리”라고 대답한다. “아냐.” 그 실세가 말한다. “네 이름은 예쁜이야.”

재클린은 또 어떤가. “진짜 이유는...재클린의 주체할 수 없는 미모였다...엉덩이-허리-가슴의 삼갑자가 제대로 맞아떨어진 이런 신체 조건은 트루히요(당시 독재자)와의 말썽을 예고했다.”


<오스카 와오의 짧고도 놀라운 삶>은 트루히요라는 독재자가 지배하던 시대의 도미니카를 그린 소설이다. 말도 안되는 부당한 일이 날이면 날마다 일어나던 그때, 100킬로를 넘는 오스카는 이런 정치적인 일들에 초연한 채 오직 여자를 안을 생각만 했다. 그가 되지도 않을 소설을 쓰는 건 만날 여자가 없어서, 여자가 나타날 때까지 버티기 위해서일 뿐이었다. 그가 정치의 정상화를 위해 싸우지 않았다고 나무랄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오스카에겐 체제의 잔혹함보다 여자와의 사랑이 훨씬 더 중요했고, 그럴 자유는 인정받아야 하니까. 내가 만일 1940년대 도미니카로 갈 수 있다면, 거기서 오스카를 만난다면, 그에게 정말 잘해줄 수 있을 것 같다. 이 책을 읽고나서 나도 외모보다는 내면에 관심을 기울이는 여자가 되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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