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빈둥빈둥 소파에 누워 331페이지나 되는 축구책을 읽었다. 축구책이라기 보다는 축구관련 칼럼 모음집이다. 한국축구의 ‘기린아’라 할 수 있는 박지성과 박주영에 관한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아니, 축구가 어찌 한두 명의 스타플레이어 얘기만 있을 수 있겠는가. 어느 스포츠전문기자의 축구 전반에 관한 성찰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박지성 휘젓고 박주영 쏜다’(김화성 지음, 동아일보사 2006년 3월27일 펴냄, 12000원).

고백하자. 나는 운동엔 완전 젬병이다. 초등학교때부터 운동과 담쌓고 산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공은 다 둥글지만, 나는 학창시절 내내 둥근 것만 보면 몸서리를 치는 ‘공(球) 공포증’에 사로잡혀 있었다. 구기대회날만 되면 쥐구멍으로 숨고 싶었고, 얼마나 학교 가기 싫었던지. 왜 그랬을까? 초등학교 코딱지만한 운동장, 테니스공만한 고무공으로 축구를 하고 있었다. 죽어라고 뛰는 데도 내 발에 걸리는 것은 없었다. 너무 화가 나 운동장에서 떼굴떼굴 구르며 이제 다시는 공차지 않겠다고 울었다던가(꾀복쟁이들의 증언). 중딩 1년, 첫 체육시간 둥글게 모여 배구 토스연습을 하는데, 나만 했다면 공이 턱없이 엉뚱한 곳으로 ‘날아’가버리는게 아닌가. 체육선생님의 경멸스런 눈초리, 친구들의 비아냥대는 듯한 웃음. 오만 정이 떨어졌다. 다시는 체육을 하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다행히도 단거리는 그냥 죽어라고 뛰어버리는 덕분에 13초, 12초7도 끊었으니 ‘굼벵이도 둥글 재주는 있’는 모양이었다.

‘공 공포증’은 대학, 사회에까지 이어졌다. 당구조차 배울 엄두를 못냈다. 그것도 둥근 공(球)이었으므로. 운동이라면 오직 결혼전까지 ‘어쩔 수 없이’ 습관적으로 하던 마스터베이션이 있었을 뿐이다. 이른바 5형제놀인인 손운동. 그러니 운동을 배울라치면 자신감이 없기 때문에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게 되는 습성이 있다. 골프를 배우라는 주변 권유에도 콧방귀를 뀌지 않았던 것도, 자동차운전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던 것도 여기에서 연유한 것이다. 경멸이나 비웃음보다 칭찬이 인간교육에 얼마나 중요한 것인 줄을 알게 됐다. 알면서도 나는 아이들을 키우면서 전혀 그렇지 못했다. 나의 전철을 밟게 한 것같아 아이들에게 오직 미안할 따름이다.

그러다 10년전 막역한 친구의 강권으로 점심시간을 이용하여 종로2가 YMCAFH 배드민턴을 치러 나가기 시작했다. 처음엔 셔틀콕을 맞추지도 못했다. 그때 친구가 몇 차례 팔을 비틀며 잡아끌지 않았다면 예전처럼 진즉에 포기했을 것이다. 라켓으로 공 하나도 제대로 맞추지 못한 창피를 어떻게 무릅썼을까. 지금 생각해도 신기하다. 이제 구력(球歷)이 제법 되니까, 그런 젬병도 공은 겨우 맞추며 그 재미에 틈만 나면 자랑이다. 배드민턴만한 운동은 없다고, 운동량이 농구보다 많다며, 부부가 같이 새벽에 라켓(검)을 들고 실내체육관으로 나가보라며(언제나 아내는 옆에 없어 죽을맛이지만), 입만 열면 배드민턴 얘기를 한다. 이 자리를 빌어 ‘운동 콤플렉스’를 극복하게 하여 나를 ‘배드민턴 팬’(솔직히 매니아는 아니다. 한번도 어느 일에 치열해보지 못한 나는 그저 어떤 학문이나 취미활동에도 ‘팬’수준이다)으로 만들어준 친구에게 경의와 감사를 표한다.

축구관련 신간 소개를 하려다 무슨 뜬끔없는 객담인가. 각설하고, 이 책을 ‘억지로’(왜냐하면 축구상식이 나로선 전무하므로. 2002월드컵때도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흥분되고 응원도 하고 우승도 바랬지만 경기 규칙-예를 들면 업사이드-도 잘 모르니까 오로지 몇 대 몇에만 신경을 쓰고, 16강 8강 4강에 환장하는 수 밖에 없었다) 읽으면서 축구가 통계이고 과학이고 철학인 줄을 처음 알았다. 그리고 너무 재미있어 내처 한 자리에서 절반을 읽어제켰다. 글쓴이의 축구와 관련한 현학(衒學)과 박학다식에 놀라서가 아니다. 축구전략(포메이션)을 말하면서 정작 저자의 ‘글의 조합능력’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도 있지만, 언론인으로서 갈고 닦은 문장력때문인지 글마다 빛이 번쩍번쩍 나는 듯했다. 문장이 짧다. 눈이 미끄러워진다. 술술 읽히며 요점이 쏙쏙 들어온다. 아무리 인터넷시대라지만 정보수집력도 경이롭다. 박주영은 ‘미완의 대기(大器)’란다. 맨유의 ‘신형엔진’ 박지성도 아직 경험쌓기에 멀었단다. 한국축구의 미래는 밝단다. 마침 출판편집도 ‘빠꿈이’를 만났는지 공들인 흔적이 보인다. 깔끔하다. 고2 작은 아들이 표지를 보더니 아침에 슬그머니 학교에 가지고 갔다. 바로 그날 320페이지나 되는 책을 다 읽었다니, 무슨 책이 그리 재미있을까. 축구를 모르면 간첩인가? 그렇다면 나는 50년동안 ‘고정간첩’(고첩)인 셈이다. 그런 고첩이 한 구절도 빼놓지 않고 다 읽었다. 허리가 휘었지만, 축구에 대해 일가견이 생긴 것도 같다(여전히 벙벙하지만).

사람을 공부나 운동실력 가지고 한 마디로 단정짓기는 쉽지도 않고 위험요소도 있는 법이다. 그러나 이 글의 필자는 단순 명쾌하다. 누구라도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마력이 있다. ‘맞아, 맞아, 어쩌면 그렇게 적확하게 볼 수 있을까. 진짜 내공이 대단한 사람인가봐’.

그는 말한다. 축구는 꽃이란다. 30m 대포알 강슛이 터질 땐 하얀 목련꽃이고 박지성의 송곳같은 슛이 터질 땐 노랗게 다발로 피는 개나리꽃이며, 이영표의 헛다리짚기 드리블은 빨간 진달래 철쭉꽃이란다. 그런가하면 박주영, 이천수의 골문앞 프리킥 골은 투욱 툭 터지는 산수유꽃이며 김남일의 강력한 태클은 핏빛보다 붉은 동백꽃, 황선홍의 붕태 투혼은 눈물 속에 핀 꽃이란다. 세상에! 과문의 소치겠지만, 이제껏 어떤 스포츠칼럼에서 축구를 단적으로 ‘꽃’으로 비유한 적이 있었을까. 그만의 독보, 독창적인 표현이 아닐까. 나는 이런 구절만 봐도 감탄하고 감동을 먹고 흥분을 하는 버릇이 있다. 형편만 된다면 수십권이라도 마구마구 사서 아는 사람들에게 마구마구 노놔주고 싶다.

한번 꼭 읽어봐! 내 웃기는 일기책만큼 재밌어. 아니, 너는 축구 좋아하니까 몇 배 더 재미있을 거야.

책 날개표지의 저자 약력을 보니 ‘한국은 축구다’(2002년 지식공작소간)와 ‘CEO 히딩크 게임의 지배’(2002년 바다출판사)라는 책을 펴낸 축구 스페셜 칼럼니스트인 모양이다. 그의 책을 다 읽고 일어서는데, 그의 표현대로 ‘발이 근질거린다’. 감히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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