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연습생 열 명 중 여덟 명은 월경을 안 해요.”라는 문장으로 본문을 시작하는 <케이팝, 이상한 나라의 아이돌>은 연습생, 전/현직 아이돌과 업계 관계자들을 중심으로 인터뷰를 하며 케이팝 산업의 구조적 문제를 드러내는 책이다.
책은 아이돌 연습생의 학습권과 건강권 침해부터 부당한 계약, 비인간적인 노동 환경에 아이돌 및 관계자를 자발적으로 내몰아가는 환경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문제들을 구체적인 증언과 데이터로 폭로한다.
지난 약 1n년 동안 팬으로서, 그리고 ‘국민 프로듀서’ 시절을 거쳐 최근까지 '스타 크리에이터'로서 활동(?)하며 케이팝 산업을 보아온 사람으로서 대부분은 처음 듣는 이야기가 아니었지만 그 심연을 낱낱이 까발리는 증언들을 자세히 들여다 보고 있자니 심히 어지러웠다.
그러나 이러한 연습생과 아이돌에 대한 착취는 '개인의 선택' 문제로 치부되고, 이에 따라 모든 책임은 개인에게 전가된다. 성공을 위해 개인의 권리 유예를 당연시하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렇지 않은 산업이 어디 있겠냐마는, 그런 의미에서 케이팝 산업은 유달리 더 신자유주의적이다. 성공과 경쟁, 효율이 모든 윤리를 압도하고, 인간의 몸과 감정은 자본의 논리로 계산된다.
이렇듯 케이팝 산업이 얼마나 신자유주의적이며 입을 다물 수 없을 만큼 해괴한 방식으로 돌아가고 있는지를 다시금 보여주는 이 책을 읽으면서, 이 산업이 우리나라가 가진 온갖 구조적이고 뿌리 깊은 문제의 정수를 보여준다는 생각도 들었다.
한편, 책은 '팬'과 '아이돌'의 관계를 둘러싼 문제는 다루지 않았는데 이 점은 개인적으로 조금 아쉬웠다. 케이팝 산업을 둘러싼 문제는 이 책에서 언급된 것 이외에도 산적해있으며 그것을 모두 다루기엔 어려움이 있었겠지만, 이 산업은 결국 팬과 아이돌 간의 관계를 중심으로 (기획사들이) 돌아가고 그러한 관계의 다이나믹 안에서 수많은 문제가 양산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러한 문제를 관련 종사자들의 입장에서도 들어보고 싶었는데 관련 내용이 크게 언급되진 않았다. 그렇지만 아마도 이 부분을 건드리면 이 책 만큼의 분량이 더 나와야 하지 않을까 싶기는 하다... 상당히 복잡한 문제이기도 하여 다루는 것 또한 쉽지 않을 것 같다.
내가 처음 아이돌 덕질을 시작했을 때와 십여년이 흐른 지금 달라진 점을 생각해보자면, (결국 코어는 비슷하나 여러 부분이 조금씩 변주되어 달라진 것이라 생각은 들긴 하다만..) 과도한 노예 계약이나 아이돌과 팬에 대한 인식은 조금 나은 방향으로 달라졌지 않은가 생각하는 반면, 팬이 소비자의 정체성을 더 강하게 내면화하게 된 것은 안좋은 방향으로 한층 더 나아간 부분이라 생각한다.
이 문제는 특히 엠넷을 선두로 한 프로듀스 101부터 보이즈 플래닛 그리고 그 사이에 양산된 셀수없이 많은 아이돌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통해 한층 심화된 것 같다. 100여 명의 연습생들을 줄세워 평가하면서 '능력'과 경쟁에 기반을 둔 신자유주의적 케이팝 신앙이 더욱 공고해졌으며, 그 속에서 팬과 시청자들은 투표권을 가진 소비자이자 심사위원으로, 아이돌은 그 소비자의 기대를 충족시켜야 하는 상품으로 자리 잡았다.
다른 한편으로는 엔터사의 업계 종사자 노동 착취 문제도 심각하다. 대학교 동기 중에 케이팝을 너무나도 사랑하여 한국어를 유창하게 하고 대학교를 졸업하자마자 한국의 엔터사에 취직한 중국인 친구가 있었다. 그토록 한국과 케이팝을 사랑하던 친구는 한국의 어느 유명 프로듀서가 운영하는 중소 규모 엔터사에서 1-2년을 울며 버티다가 다시는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겠다고 선언하며 중국으로 돌아갔다. 나의 또다른 친구도 어느 엔터사 신인개발팀에 취직을 했다가 주말과 밤낮없이 불려나가는 터에 사람답게 사는게 어렵다며 1년만에 퇴사한 후 다른 업계로 이직했다.
말이 조금 길어졌는데 결국 이 책을 읽으면서 들었던 생각은, '능력'과 경쟁에 기반을 둔 신자유주의적 케이팝 신앙 앞에는 심각한 구조적 문제들이 켜켜이 쌓여있으며 이는 우리 사회가 반드시 풀어야할 문제라는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케이팝 산업의 문제는 우리 사회의 모순을 가장 극단적으로 압축하고 드러내기 때문에.
이 뿌리 깊은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지 생각해보면 참으로 아득하다. 책에서도 이러한 케이팝 산업의 문제 해결을 위해 해외의 사례를 살펴보며 여러 해결책들을 제시하고 있다. 그렇지만 나는 이 책이 가진 가장 중요한 가치는 책에서 제시하는 해결책 자체보다도(매우 중요한 부분이기는 하지만), 수많은 업계 사람들의 목소리를 통해 케이팝의 모순을 기록하고 축적한 데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한다.
이달 초에 공식 출범한 '대중문화교류위원회'의 '대중음악' 분과에는 엔터 대표 4사의 대표이사 4명이 나란히 이름을 올렸다. 분과별 전문가 참여를 통해 "예술 현장의 의견을 정책적으로 반영하고 문화예술 생태계 전반의 발전 방안을 논의"한다고 한다.
기사를 찾아보니 위원장인 문체부 장관은 '소외되는 현장 없이 문화예술 전반에 대한 자문과 소통을 이어가겠다”고 밝혔다.'고 한다. '대중문화'를 '교류'하고 (그들이 그토록 사랑해 마지않는 'k-문화'를) '전파'하려면 부디 이 책부터 읽어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