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요괴전 - 넓게 생각하고 좁게 살기 생태경제학 시리즈 1
우석훈 지음 / 개마고원 / 2009년 9월
평점 :
절판


은유의 정치학인가?

저자는 앞머리에서 십대들과 대화하기 위한 책이니 다른 불평은 삼가달라고 언급한다.  

그래서인지 세계의 귀신들을 죄다 모아놓고 '생태요괴'들이 얼마나 삶을 망치고 있는지를 설명한다.  

드라큘라전, 좀비전, 프랑켄슈타인전, 생태요괴전, 개발요괴전 등등...  

귀신 나오는 영화 안 좋아라 하는, 특히 삼십대인 내가 읽기엔 이 사람의 은유들이 잘 다가오지 않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우석훈을 좋아하는 이유는 맛깔난 사회비판과 대안적 삶에 대한 향기가 묻어나오기 때문이다.  

사회에 대한 이런저런 색깔들의 비판은 언제부턴가 소음처럼 때론 잔소리처럼 들릴 때가 있다.  

그 비판이 정당하고 또 공감이 간다 해도 계속 되는 비판과 비난 속에 어느 덧 길을 잃고 헤메는,  

때론 "그래서 어쩌자고?"하는 오기 섞인 반응도 나온다.  

대안적 사회에 대한 사고는 현실과 가까이 있어야 한다.  

물론 우석훈이 제시하는 대안적 사회가 비현실적으로 들리는 이들도 있겠지만  

그 수사적 어구가 주는 유머와 재치가 마음에 든다.   

공존에 대한 열망과 이를 설득하기 위한 저자의 귀신 모음전이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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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용 - 다문화제국의 새로운 통치전략 카이로스총서 16
웬디 브라운 지음, 이승철 옮김 / 갈무리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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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용: 다문화제국의 새로운 통치전략 /  웬디 브라운 

 똘레랑스.. 한국에서는 90년대 중반부터 사용되었나? 아무튼 내 기억엔 홍세화 씨가 똘레랑스라는 말은 사용한 것 같은데.  

웬디 브라운은 관용이 단지 초월적 미덕이나 개념이 아니라 정치적 담론이자 '통치성의 실천'이라는 점에 주목한다. 즉 "후기 근대적 통치성의 양식으로서 관용은 자유주의적 보편적 지위에 도전하는 집단과 초국가적 비자유주의 세력을 연결, 결합시키면서 동시에 길들이려는 시도" 라는 것이다.  

어쨋든 관용의 탈정치화가 역사적 배경과 권력의 문제를 배제하고 있다는 점에는 공감이 가지만 한국사회에서 관용이라는 담론이 언제 한번 제대로 뿌리내려 본 적 있나.. 생각해 보면 지금 한국의 상황과 맞는 비판은 아니지 않나 싶기도 하다.  

웬디 브라운은 한껏 관용을 비꼰다. 그것은 자신과 맞지 않는 것을 견디는 고상한 방식이며, 겸손한 우월함의 위치에 있으며 어느정도 참아야 할지 결정할 수 있는 사회적 위치는 결국 "주인"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  

예를 들면 낙태를 어디까지 허용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있어서도 권력은 경계를 긋고 하나의 자격을 부여하는 행위를 포함하는 위치에 서게 된다.  

유대인과 여성문제를 사례로 '관용'담론이 다르게 적용되는 지점을 보여준다. 결론은 관용담론은 차이를 다시금 종속적 위치에 배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은폐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통치성의 테크닉을 보여준다. 공적 차원에서 차이와의 대면을 축소시킨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내 말도 맞고, 니 말도 맞다는 식의 갈등 봉합은 마치 중립과 관용의 척도로 보여지기도 한다.  

그러나 웬디 브라운이 지적한 것처럼 그것은 어떤 사안을 서둘러 탈정치화하거나 차이를 '차이가 아닌 것처럼' 애써 봉합해 버린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언젠가 이글루스에서 동성애 논쟁이 일어난 바 있는데, 거기에서 '동성애 혐오'도 인정해 줘야한다는 식의 논리를 접한 적이 있다. 마치 '니 말도 맞는데, 한편으론 내 말도 맞아'라는 식.  

이런 식의 차이 봉합은 일정정도 권력 우위를 점한 자들의 배부른 소리 같기도 하다.  

웬디 브라운이 지적한 게 이러한 지점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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