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고 기도하고 먹어라 - 미친 듯이 웃긴 인도 요리 탐방기
마이클 부스 지음, 김현수 옮김 / 글항아리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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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맛이라고요? 병맛의 어원이 뭔줄은 아시죠? 이런 신체장애 혐오 표현을 2020년에 인문학 책의 카드뉴스에서 보게 될 줄은 몰랐네요. 글항아리의 책에서요 ^^! 감수성 좀 갖고 가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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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고객센터 2020-03-13 1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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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 피아노 소설Q
천희란 지음 / 창비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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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할 수 없는 이야기를 들려준 작가의 용기가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이것이 얼마나 큰 부담이었을지, 이야기를 내어놓기가 얼마나 두려웠을지 짐작도 하기 어렵다. 하지만 그가 용기를 내어준 덕분에 나의 목소리가 나만의 목소리는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가 그의 이야기를 이해하듯(착각인지도 모르지만) 나의 이야기도 누군가에겐 이해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말할 수 없는 이야기들을 말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꾹꾹 눌러온 말과 압축된 고통을 인적 드문 들판에 풀어놓고 바라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누가 보아도 좋고, 아무도 못 보아도 좋다. 아무래도 좋았다.

 

작가는 이 말을 남겼다. '평생 변하지 않는대도 괜찮다. 그러나 절대로 변할 수 없는 것은 없다.'

그래, 변하지 않을 것 같은 것도 변한다. 이제는 안다. 그러나 변하지 않아도 괜찮다. 나도 말할 수 없던 것을 말함으로써 누군가에게 괜찮다는 말을 건네고 싶다. 수없이 스스로에게 건넸던 말을 타인에게서 듣게 되다니, 아주 희망찬 상실을 목격할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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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트 러브 소설Q
조우리 지음 / 창비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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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모든 사랑은 이해할 수 없고, 그럼에도 어떤 사랑은 숨 막히게 찬란하다. 무대 위의 누군가를 향하는 사랑도 그렇다. 그들은 대개 아무것도 굽히지 않고, 망설이지도 않은 채 한 줄기 빛처럼 스타를 향해 달려간다. 별은 스스로를 태워서 빛을 만든다고 했지. 그 빛에 뛰어들어 빛을 더하는 게, 기꺼이 장작이 되는 게 팬심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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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런 의심도, 의문도 없이 서로를 향하는 마음들이 좋았다. <다섯번째 계절>을 읽을 때는 내가 흔들다리 위에 서기라도 한 것처럼 심장이 두근두근했다. 읽다가 누군가를 만났다면 소설에의 몰입을 설렘의 두근거림으로 착각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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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사랑하지만 죽을 만큼 사랑하는 경우는 드물어서, 자주 떠들지만 외치지 않고서 견딜 수 없는 경우는 적어서. 그래서 사람들은 맹목적이고 불가해한 사랑 이야기를 좋아하는지도 모른다. 《라스트 러브》를 통해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고 싶은 사람의 욕구와 닿을 것 같지 않은 사랑에도 열렬한 사람들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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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어서 이 크고 찬란한 믿음에 무슨 말을 보태야 할지 모르겠다. 벌써 네 번째 모르겠다는 말을 썼다. 모르는 게 너무 많아서 알고 싶은 마음이 컸다. 뜨겁게 사랑한 적 있는 누군가라면 이 사랑을 더 잘 읽어줄 수 있지 않을까. 다시 내게 알려줄 수 있지 않을까. 알고 싶다, 나는 모르는 그 사랑을 알고 싶다는 마음이 무럭무럭 크는 중에 소설이 끝났다. 소설이 끝났는데도 노래가 이어지고, 사랑이 계속되고, 믿음이 남아있고, 그 시절과 사람이 살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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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인은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준희를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모를 수가 없었다. 정말 전속력으로, 온 힘을 다해서 달려오고 있었으니까. 화살이 날아오는 것처럼. 과녁이 된 기분이었는데, 그게 왠지 좋았다. 이 세상 어딘가에서 한 사람만은 반드시 자신을 향해 달려오고 있다는 믿음.” _다섯번째 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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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야 언니에게 소설Q
최진영 지음 / 창비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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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읽기는 고통스럽다. 그것은 지독한 현실의 묘사에서 기인할 때도 있고, 지켜보는 것밖엔 할 수 없는 깊은 무력감 때문일 때도 있고, 외면하고 묻어둔 기억을 헤집어 스스로의 상처를 마주 보게 하기 때문일 때도 있다. 『이제야 언니에게』의 경우 셋 모두였다. 너무 많은 과거가 엉망으로 헤집어진 채 눈앞으로 끌려 나왔다. ‘나’의 것이 아니라 ‘우리’의 것이 된 고통은 외면할 수도 없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제야의 고통이 끝나기를 기대하며 책장을 넘기다 새벽 네 시를 훌쩍 넘기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고통을 바라보고 위로하는 그의 방식이 아주 조심스러워서 최진영은 참 다정한 작가구나,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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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7월 14일. 제야는 그날로 자꾸만 돌아간다. ‘눈과 귀와 뇌조직이 하나씩 더 생겨서, 그 일을 겪지 않은 사람처럼 세상을 볼 수는 없게 되었다.’(84p)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이해하려는 무용한 가정법은 비난의 화살을 쉬이 생존자에게 돌린다. 고통과 죄의식 속에서 우리는 타인의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스스로를 의심하고 비난하고 혐오한다. 피해자는 설명을 요구하는 사람들의 의심과 물음에 핑계와 변명으로 변질될 해명을 달아야 한다. 성실히 고통을 마주한다면 ‘진짜’ 피해자의 위치를 위협받을 것이고, 침묵으로 일관하면 켕기는 구석이 있는 거라는 손가락질을 받게 될 것이다. 뻔한 결과를 알고 있어도 우리는 선택하고 행동해야만 한다. 그것이 피해를 고발한 자의 의무다.

 

잔인하게 들리겠지만 죽어버리고 싶다는 마음도, 죽여 버리고 싶다는 마음도, 다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는 마음도 일어난 일을 돌이킬 수는 없다. 모순된 감정과 수많은 의문은 살아있는 모든 날에 끈질기게 소용돌이칠 것이다. 어떤 과거는 화인처럼 남아 생각하지 않아도 의식의 밑바닥에 깔린 채 삶의 일부가 된다. 지나가거나 완료되지 않고 ‘기생충처럼, 병균처럼, 생물처럼’(196p) 끈질기게 살아서 삶에 간섭한다. 그런 기억에 ‘너무 오래’라는 건 없다.

 

제야는 범죄의 피해자이며, 타인의 시선으로 자신을 의심한 가해자이고, 그럼에도 살아남은 생존자다. 제야는 살아남았다. 살아남은 그는 강하다. 한없이 연약하면서도 믿을 수 없게 강하다. 제야에겐 하고 '싶은' 것들이 많다. 그는 울고 싶지 않고, 강해지고 싶고, 달리고 싶고, 살아내고 싶다. 자신과 타인을 지키고 싶다. 강해지고 싶은 제야는 얼마나 강한가. 그가 가진 생의 의지는 얼마나 단단한가. 그는 자신을 끊임없이 잡아당기는 과거의 어느 날과 어디에서 누구와 있어도 벗어날 수 없는 두려움을 받아들인다. 잊거나 지우는 대신 똑바로 쳐다보며 자신을 직시한다. 그는 아무도 용서하지 않고, 용서할 수 없는 사람들 틈에서 자신을 기만하지도 않고, 일어났던 일을 부정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나를 견디지 않고, 살아내기 위해 애쓰는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한다.

 

우리는 때로 여자라서, 어려서, 늙어서, 혹은 한국인이라서 약할 것이고 그럼에도 살아가기 때문에 강할 것이다.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할 테지만 어쨌든 살아남을 것이다. ‘우리’의 불행은 ‘나’의 것보다 무겁고, 그 연대는 필연적으로 고통스럽지만 우리는 삶 속에 남아 애쓰는 사람이 될 것이다. 제야는 왜 강해지고 싶었나, 우리는 왜 강해져야만 하나. 끊임없이 의문하면서 강해지지 않아도 괜찮은 날들로 나아갈 것이다.

작가는 우리는 잘못한 것이 없고, 삶은 망가지지 않았다고 말한다. 조심스러운 위로는 그가 걱정했던 바와는 달리 박탈감보다는 안도감과 기대를 줬다. 꼼짝도 할 수 없는 날에 제야를 찾아가 문을 두드릴 누군가가 있다는 것에 대한 안도, 어느 누군가의 곁에도 제니나 승호나 이모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 아픈 사람들이 혼자 있지 않았으면 좋겠다. 함께 해 줄 사람이 없다면 이 책이라도 꼭 껴안고 자면 좋겠다. 그래서 살아남으면 좋겠다. 피해자이자 생존자로 함께 살아갈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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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린생활자
배지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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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떤 가난의 재현을 보면 화가 치밀었다. 철저히 가난 밖에서 살아온 이들이 결코 넘지 않을 선 밖에 선 채로 그들의 상상 속에 존재하는 가난의 특성을 가난이라 명명하고 한정 지으며 그것을 연민하거나 동경하려 한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런 식으로 타인의 가난과 고통을 소비하려 드는 것이 불편했다. 그런 태도는 모멸감을 줬다. 타인의 현실을 액세서리로 차용하려는 불쾌한 시도를 몇 번인가 마주하고 나서 사회의 약자를 인물로 내세우는 이야기를 접할 땐 나도 모르게 앞서 날을 세우게 됐다. 『근린생활자』를 펼쳐 들 때도 기대와 설렘 한구석에 묘한 경계심이 깃들어 있었다. 고맙게도 괜한 의심의 눈초리는 페이지를 넘어가며 빠르게 수그러들었다. 두려움이 무색하게 마지막 장을 덮으며 그의 이름 세 글자를 마음속에 단단히 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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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린생활자』 속 인물들은 지극히 평범한 이 시대의 약자들이다. 그들은 성실함과 아무것도 묻지 않는 무던함으로 자리를 보전하고 생을 연장해왔다. 성실은 그들의 능력이자 경력이었고, 삶의 밑천이자 생의 수단이기도 했다. 또한 말단이나마 누구보다 성실히 일 해왔다는 자부심은 자기 긍정의 핵심적 요소였다. 그러나 그것은 순수하게 자발적이기만 한 성실성인가? 언제든지 대체될 수 있는 육체노동자로서의 위치는 그들로 하여금 사람을 일개 소모품으로 보는 회사에 투신하게 하고, 빠듯한 생의 의무를 진 사람들은 작은 혜택에도 수많은 의문을 폐기한다.

 

 부조리에 침묵하는 그들에게는 각자의 로망과 희망에서 말미암은 욕망이 있다. 그들은 가지지 못한 것들을 향해 꾸준한 열망의 눈길과 손짓을 보낸다. 하지만 가져본 적 없기 때문일까. 실상 그들이 원하는 것은 아주 작고 사소한 것일 뿐인데도 작은 목표를 탐하는 술수는 어딘가 불안하고 허술하며, 엉성한 시도는 하나같이 실패로 귀결한다. 버거운 빚을 지며 사들인 집은 더 큰 빚으로 돌아오고(「근린생활자」), 행복한 노후를 꿈꾸며 산 땅은 사랑하는 동생네 가족을 죽이고 자신마저 파멸로 몰아넣는다(「그것」). 단 900원의 임금인상을 위한 파업은 끝없는 어둠 속에서 죽음으로 끝난다(「삿갓조개」). 현실과 다를 바 없는 냉혹한 소설 속에서 그들의 ‘로망’이란 아주 보잘것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실현되는 법이 없다. 그들의 실패와 죽음은 누구에게도 전해지지 못하고 날카로운 가위 끝에서 어렴풋이 유추될 뿐이다. 그들은 가난의 굴레에 속해 있다. 그곳을 빠져나가려는 자는 온갖 방해에 직면한다. 성공은 어렵고 실패는 너무도 쉽다. 돌아온 자리는 이전과 같거나 조금 더 낮다.  

 

 사람들은 흔히 말한다. “큰 이익을 위해선 작은 희생 정도는 감수해야 한다.” 고(「그것」). 물론 여기서 희생의 크기를 평가하고 희생을 감수할 사람을 선택하는 것은 희생자가 아닌 권력자다. 밑바닥에 선 이들은 설마 죽이기까지 하겠냐고 께름하게 묻지만 바깥의 이들에게 그들의 목숨이란 ‘작은 희생’에 지나지 않는다. 강요된 희생의 조건을 거절하는 자는 곧바로 제거해야 할 존재가 된다. 그들은 처음부터 알려져서는 안 되는 존재, 쉬쉬해야 하는 존재였다. 조용히 침묵해야 할 그들이 반항하고 소리치며 무언가를 요구하기 시작하는 것 자체가 권력자에겐 불필요한 위협인 것이다. 당사자를 배제한 문제의 바깥에서 사실들은 멋대로 각색되어 전해지고, 불가피한 선택은 태업의 증거가 된다. 존엄과 생계의 최저 조건을 위한 투쟁은 손쉽게 민폐가 되고 경제적 손해로 환산된다. 비난의 손가락 끝에 선 그들에게 세상은 ‘오히려 상처받은 눈빛’(「사마리아 여인들」)을 하고 있다.      

 

“무는 개를 돌아본다고 하잖니. 사람이든 개든 순해 빠져선 안 돼. 결국엔 지가 물리게 되거든.” (「그것」) 그러나 이빨을 드러내는 순간, 그들은 죽는다. 그러므로 살아보려는 몸부림은 자기 파괴 행위가 된다. 억울한 사정은 누구의 관심도 끌지 못한다. 그러니 물어보자. 죽지 않기 위해 물어뜯기를 선택한 그들이 진짜 세상의 악이나 위협인가? 살아보려고 지른 외마디 비명이 정말로 이기심인가? 그들의 삶보다 당신의 경제적 손해가 더 중요한가?     

 

 녹록지 않은 시간을 살아남은 사람들이 사소하지 않은 희생들을 치르며 닿은 곳은 빚더미이거나 기약 없이 유예된 기대, 혹은 먼지 통 속의 머리카락이다. 도달한 실패와 좌절과 죽음에서 그들은 오히려 편안함을 느끼는 것 같기도 하다. 한평생 벗어난 적 없는 불안과 절망의 향기는 차라리 익숙한 것인지도 모른다. 피인지 땀인지 눈물인지 알 수 없는 것을 자꾸 울음이라 착각하면서 그들은 깨닫는다. "이제는 글러먹었다는 걸 (...) 더 이상 예전의 활기를 찾을 수 없다는 것도. 그 모든 것을 이제는 운명처럼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것도." (「청소기의 혁명」)

 

 이런 현실이 못 견디게 불만스러워도 삶의 속도를 줄일 수는 없다.  삶은 계속되고 우리에겐 끊임없이 내일이 주어진다. 꺾이는 무릎으로 허청허청 성실한 희생양이 되거나 이빨을 드러낸 후 도살되는 것 외에 우리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무엇인가? 그러니 어쩔 수 없다. ‘넘어지거나 구를 게 뻔’하다 해도 ‘울음 같은 웃음도 달음박질도 그리고 눈물도 멈출 수가 없'(「사마리아 여인들」)으니 거대한 내일로 달려갈밖에. 다만 그 고달픈 길이나마 팔짱을 내 줄 사람이나 노란 바람개비를 포기하지 않을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 그 ‘길’은 좌절한 우리가 다시 일어날 때까지 고양이 털 따위와 함께 오래도록 우리를 기다려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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