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텍스트로 여기기 시작했다는 것을 근대성(modernity)의 관점에서 봅시다. 그때 읽는 사람은 주체이고 읽히는 대상, 즉 세계는 수동적인 존재가 됩니다. 그 자체로는 의미가 없고 자신을 텍스트로 다루면서 읽어주는 사람, 즉 독자가 나타나야 비로소 존재할 수 있게되는 것이죠. 이런 점에서 독자야말로 근대사회에서는 주체라고 할수 있습니다. 독자가 저자만큼 중요하죠. 나중에 말할 기회가 있겠지만, 이 시대의 가장 큰 문제 중의 하나가 독자가 사라지고 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모두 다 독자가 아니라 저자이기를 바랍니다. 독자가 중요한 이유를 다시 강조하면, 읽는 행위를 통해서만 세상 만물은 의미를 가지기 때문입니다. 의미를 가지고 존재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독자는 세계를 가능하게 하는 존재라고 할 수 있겠군요. 문제는, 자기 자신과 세계의 관계를 이렇게 정함으로써 그저 해석을 기다리는 수동적인 존재로 세계를 하강시킨다는 것입니다. 말의 관점에서 보면 세계는 우리에게 말을 건넵니다. 나의 해석을 기다리는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라 사물이 말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말을 들어야 합니다. (...) 이와 반대로, 세계가 말을 하는 존재가 아니라 해석을 기다리는 - P21
글이 된 것입니다. 이런 변화는 사람에게는 지나치게 강한 주체로서의 의미를, 세계에는 수동적인 위치만 부여합니다. 근대사회가 인간 중심주의, 문자 중심주의, 주체 중심주의라는 비판을 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죠. 제가 잘 쓰는 표현대로 하면, 말을 듣고 응답하는 말의 세계에서는 이것이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아요. 사람들이 솔깃해 2인칭의 위치는 희미해지고, 읽는 것을 통해 의미를 해석하고 부여하는 주체, 쓰는 행위를 하는 주체라는 1인칭만 강조됩니다. 이런 과도한 주체성이 근대의 많은 문제를 야기시켰다고 생각해요. 이런 점에서 본다면, 근대로 넘어오면서 말의 세계에서 글의 세계로 바뀌었다는 것은 중세 사람들의 입장에서 생각할 때 아마 리터러시의 위기였을 것입니다. - P22
다만 이런 학력고사식 독해에서는 자기 생각을 가지면 안 됩니다. 제가 앞에서 근대 이후 세계를 텍스트로 다루게 되었다고 말했는데요, 학력고사식으로 본다면 이 텍스트의 의미가 고정되어 있는 것입니다. 해석을 기다리는 게 아니라 정해진 해석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거죠. 이렇게 되면 텍스트를 읽는 독자에게 중요한 것은 해석을 통해 자기 의견을 갖는 게 아니라 정해진 의미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교과서와 시험이 그런 문해력을 키워준 거죠. 시험문제를 풀기 위해 지문을 이해해야 하고 지문 밖으로 눈을 돌리면 안 되는 거예요. (...) 재밌는 것은, 바로 그랬기 때문에 글을 읽고 싶었던 아이들은 교과 - P28
서 밖으로 나갔다는 사실입니다. 교과서의 시와 소설이 아니라 자기가 읽고 싶은 시와 소설을 따로 읽은 거죠. 그러니까 맥락을 파악하는 힘으로서의 문해력은 아예 따로 키운 거예요. 그런데 따로 읽었던 그게 다 해석을 기다리는 텍스트였던 거죠. 해석하는 역량, 세계를 텍스트로 다루는 역량은 사실 교육제도 바깥에서 쌓았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공부 좀 잘하던 아이들은 양쪽의 텍스트를 다 파악할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된 건데, 저는 이걸 한국 교육의 아이러니라고 표현해요. 주입식 교육이 좋은 교육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철저히 점수를 따기 위해 정답을 찾는 기능적인 역할만 하다 보니 소수의 학생들은 상상력이나 문학적 감수성 등은 아예 다른 과정을 통해 획득했던 것이죠. 그럼 수능 이후는 어떠한가? 수능은 학력고사와 비교할 때 그런사전적 의미를 묻고 정답을 고르는 식에서 많이 탈피한 것은 사실이죠. 지문의 길이도 많이 길어졌고, 복합적인 의미를 따지는 역량도있어야 하고요. 또 논술고사도 있죠. 적어도 학력고사보다는 한 걸음더 나아간 것이라고는 볼 수 있습니다. 해석하고 그 해석의 정당성과 타당성을 주장할 줄 아는 사람을 양성한다는 점에서는요. 학력고사에서 수능으로 바뀌면서 이런 변화가 있었습니다만 여전히 문자 텍스트 중심이죠. 이건 어쩔 수 없는 것이고 나쁜 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시험체제 바깥의 참조 대상은 극적으로 바뀌었습니다. 더 이상 다수의 사람들이 읽고 참조하는 것은 문자 텍스트가 아닙니다. 시험을 위해 읽는 도구일 뿐이고, 그 바깥에서 교양을 쌓기 위해서나 성찰을 하기 위해서 읽고 참조하고 해석하는 것은 - P29
문자 텍스트가 아니라 동영상입니다. (동영상도 텍스트처럼 읽는가 아닌가는 논쟁적이니 여기서는 일단 문자에만 텍스트라는 말을 붙이겠습니다). (...)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오면서 말하고 듣는 것이 읽고 쓰는 것으로 전환되었다면, 지금은 정보나 이야기를 ‘읽고 쓰는‘ 게 아니라 ‘보고 찍는‘ 것으로 바뀌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정보를 습득하고 이야기를 구성하는 방식이 바뀌고 있는 것이죠. 저는 읽고 쓰는 것을 통해 의미를 파악하고 구성하는 사람들과 보고 찍는 것으로 그걸 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충돌이 있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지금 한국사 - P30
회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는 세대 갈등에도 이런 측면이 깔려 있다고 보고요. 읽고 쓰는 걸 중심에 둔 사람들은 보고 찍는 게 중심인 사람들이맥락(context)을 파악하는 능력이 떨어진다고 ‘오해‘할 수밖에 없어요. 읽는 행위는 맥락을 파악해가는 과정이잖아요. 앞에서 말한 학력고사 방식의 ‘무식한‘ 시험은 해석의 여지를 두지 않고 정답을 찍는 것이었지만, 사실 의미는 사전적으로 주어지는 게 아니라 맥락 안에서 형성되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맥락을 어떻게 파악하는지에 따라 해석이 달라질 수 있는 것이고요. 이런 점에서, 읽고 쓰는 걸 중심에 두는 사람은 내 앞에 주어진 것을 텍스트로 대하면서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그 전후좌우를 살피는 걸 우선적으로 합니다. 맥락을 파악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요. 확실히, 새로운 세대가 맥락을 파악하는 능력, 텍스트를 기반으로 더 큰 것을 볼 수 있는 능력이 떨어졌다고 지적하는 사람이 많죠. 그런데 저는 그런 지적이 너무 성인 중심의 관점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저희 분야에서 고전과 같은 논문이 있어요. 1996년에 《하버드 에듀케이션 리뷰(Harvard Educational Review)》라는 학술지에 ‘앞으로 리터러시가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가‘라는 주제로 세계적으로 저명한 학자들이 모여서 입장을 담은 논문(position paper)을 냈어요. 그 논문의 핵심 키워드가 멀티리터러시(multiliteracies), 즉 다중 문해력입니다. 그간 - P31
텍스트를 중심으로 하는 리터러시가 서구 근대사회를 관통해 왔지만 199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다양한 사회적 변화가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리터러시의 개념을 완전히 새롭게 정립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논문이에요. 저자들이 강조한 것은 단순히 인터넷이 등장했다든가 미디어가 발달했다는 게 아니라, 우리 삶을 구성하는 영역들이 눈에 띄게 달라지고 있다는 점이에요. 개인의 프라이버시 영역이라고 하는 게 더 이상 과거와 같지 않고, 통신과 교통이 발달하면서 다양한 아이디어가 끊임없이 섞이고 다양한 지역의 사람들이 빠르게 오갈 수 있는 상황이 되었죠. 과거에 상상할 수 없었던 언어와 문화의 섞임, 사람들의 이동, 미디어의 변화에 따른 사적인·공적인·직업적인 변화들이 진행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앞으로의 세계에서는 텍스트를 읽고 쓰는 능력으로서의 문해력은 소리와 이미지, 공간과 제스처 등을 포괄하는 멀티리터러시의 하위 분야로서 존재하게 될 것이라고 얘기해요. 문자 기반 텍스트만으로는 더 이상 사회와 교육에서 중심적인 리터러시를 구성할 수 없다고 이미 1990년대 중반에 선언한 것이죠. 하지만 한국 상황에서는 동영상이나 멀티미디어 보조교재를 활용하고 일부 수행평가에 활용한다고 해도, 여전히 시험은 기본적으로 텍스트잖아요. 평가체제의 근간이 텍스트라는 거죠. 수능도 마찬가지고요. 10대, 20대는 어찌 보면 불행한 세대예요. 삶에서 늘 접하는 미디어가 동영상과 이미지, 소셜미디어인데, 이것과 동떨어진 방식으로 어른들에게 평가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인 거죠. 더 비판적으로는, 젊은 세대가 삶 속에서 배우고 경험하는 것을 평가할 만한 잣대 - P32
가 어른들한테 없다는 것을 지적해야겠죠. 여전히 성인들은 자기들이 할 줄 아는 것을 기준으로 새로운 세대를 평가하고 있는 거예요. 배운 대로 가르치고, 평가받았던 대로 평가하고 있는 형국이죠. 하지만 젊은 세대의 삶은 많은 부분 교과서적인 텍스트와 별 관련 없이 돌아가고 있죠. 유튜브가 가장 대표적인 예일 테고요. 그러니까 성인들이 10대 전후 학생들의 문해력이 떨어졌다고 하는 것은, 어찌 보면 공부할 시간을 반밖에 주지 않고 평가한 다음에 왜 이렇게밖에 못하냐고 비난하는 거랑 비슷하죠. 그건 공정하지 않은 거예요. 공정하지 않은 평가를 하면서 이를 통해 ‘문해력이 떨어졌다‘는 비판이 심화되는 거죠. - P33
비슷한 맥락에서, 60~70대 노년세대에 대한 비난도 공정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이 연령대가 문해력이 뛰어난 세대가 아니에요. 사회경제적으로 빈민 계층에, 블루칼라 노동자, 일용직 같은 비정규직 노동자로 살다가 퇴직을 하거나 일거리가 없어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분들도 적지 않죠. 그런데 동영상이 들어오면서, 또 카카오톡이라는 소통 수단이 들어오면서 새로운 리터러시를 접하게 된 거라고 전 생각해요. 지금은 이 모든 게 모바일에서 돌아가고요. - P34
이 상황이 전적으로 그분들의 잘못은 아니죠. 사회경제적인 토대가 약했기 때문에 먹고살기 힘들었던 거잖아요. 교육받을 기회 또한 상대적으로 적었고요. 흔히 말하는 비판적인 리터러시를 갖출 만한 조건이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카카오톡이나 유튜브가 이분들의 세계가 되어버린 거예요. 저는 사회적·교육적 공백이 그런 분들을 만들어낸 것이라고 생각해요. 이 사회가 그 세대에게 체계적으로 리터러시를 키워주거나 비판적으로 신문이나 잡지, 책을 소화할 수 있는 토대를 쌓아준 적이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새로운 미디어의 거짓 정보에 쉽게 넘어갈 수밖에 없는 상황인 거죠. 소통과 표현에 대한 욕망이 둑 안에 갇혀 있다가 새로운 채널로 출구를 찾은 거니까요. 그런데 이 상황이 40대나 50대에게는 되게 한심해 보이는 겁니 - P35
다. "도대체 노인네들 왜 저러냐?" 그러니까, 세대론으로 반듯하게 가를 수는 없겠지만 중간 세대가 양쪽을 업신여기며 비판하는 모양새가 되지 않았나 싶어요. 이런 모양새는 젊은 세대에게도 공정하지 않고, 60~70대 이상의 노인들에게도 불만스러운 거죠. (...) 제가 끊임없이 주장하는 게, 리터러시를 문제 삼는 사람들의 리터러시를 문제 삼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문제제기하신 것처럼 ‘이것이 리터러시다‘라고 정의하는 것, 사회학적으로 보면 그게 바로 권력이거든요. 이것이 리터러시다 하면 저것은 리터러시가 아닌 것이 돼버려요. 그렇게 리터러시를 정의한 다음에, 그 범주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문해력이 있는 사람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아무 - P36
능력이 없는 무능력자로 낙인찍는 것, 그것이야말로 권력이죠. 그 지점에서 선생님의 말씀 중에서 ‘성인 중심‘이라는 말을 수정할 필요가 있다고 보는데요. 한국 현대사의 맥락에서 볼 때, 그런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그냥 성인이 아니에요. 명확하게 1970년대에 태어난 저 같은 사람을 포함하는, 넓은 의미에서의 86세대죠. 소위 86세대 이전에는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소수였어요. 그 정도의 문해력을 가진 사람들은요. 1960년대에 태어난 86세대부터 읽기가 대중화되었고, 그게 완전히 꽃핀 시기가 1970년대에 태어난 이들이 성장하던 때죠. 이들이 텍스트 기반 교육의 대중화에서 가장 수혜를 받았던 세대이고, 바로 문화권력을 가지고 있는 세대죠. 리터러시를 정의하는 데서도요. 그러다 보니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성인이라 해도 60대 이상은 제외되는 거죠. 60대 이상은 양쪽의 텍스트, 즉 교과서와 교과서 밖의 책을 다 읽으면서 키운 힘은 많이 없어요. 교과서의 지문을 읽고 그 안에서 정확한 의미와 괄호 안에서 빠진 단어를 찾는 역량은 시험을 치는 학교에서만 가능했기 때문에 학교를 다니지 않은 사람들은 키울 수가 없었습니다. 한편 우리 세대는 대중화된 제도교육의 수혜를 받으면서도 부모가 책을 많이 사줬잖아요. 가난한 집에서도요. 책을 읽으면서 텍스트 안에서 맥락을 파악하고 구성해낼 수 있는 문해력을 키울 수 있었죠. 그래서 굉장히 오만해요, 이 세대가.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문해력의 기준으로 보면, 젊은 친구들도 한심하고태극기 들고 나오는 노인들도 한심하고, 이렇게 되는 거죠. - P37
몇 년 전까지도 한국 가수의 동영상에는 다 한글로 댓글이 달렸죠. 그러니까 이 사람은 이렇게 생각하고 저 사람은 저렇게 생각하고 그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는구나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한 힘이었어요. 이런 맥락에서 해석이란 ‘의미를 해석‘하는 것입니다. 의미를 해석하고 그 해석된 것을 전달하고 공유함으로써 공동체를 만들고 유지합니다. 문자 텍스트로 의미를 전달하고 의미를 해석하고 또 의미를 공유하는 것을 통해서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의미를 같이 추구하는 정치 행위도 일어나고요. 따라서 의미 해석을 중심에 두는 문자 텍스트의 등장과 보편화는 근대사회의 탄생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이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가를 일일이 알 필요는없지만, 그것이 주는 정동(affect)이 무엇인가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해졌어요. 정동은 언어로 의미를 파악하는 게 아니라 느껴지는 것이니까요. 인문사회과학에서 ‘정동적 전회(轉回)‘라는 표현을 쓰는데요. 이것이 의미하는 큰 변화가 있습니다. 문자 텍스트 중심의 단일 문해력에서는 이해와 의미 파악이 중요했다면, 지금과 같은 멀티리터러시 상황에서는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정동이 발동되고 있는가를 알고 공명하는 게 중요해졌다는 것입니다. 케이팝 스타의 유튜브에 전혀 알 수 없는 태국 글자로 댓글이 달려 있고 또 한자가 적혀 있고 하지만, 거기 붙어 있는 이모티콘과 느낌표를 보면 어떤 느낌인지는 아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지금은 정동적 독해라고 하는 게의미론적인 독해보다 훨씬 더 중요해진 것 같아요. - P41
정동적 전회라는 것이 반드시 좋지만은 않죠. 저는 이것도 ‘텍스트의 자식들‘인 40~50대가 천박해 보인다며 젊은 세대를 비난하는 이유 중의 하나라고 생각해요. 우리는 글을 쓸 때 부사나 형용사는 가급적 빼야 한다고 생각하잖아요. 왜냐하면 부사와 형용사, 감탄사는 감정의 강도를 강조하고 과장하는 것이니까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소위 인터넷 논객이라는 제 아랫세대의 글을 못 읽을 때가 많아요. ‘씨바, 졸라‘가 너무 많이 나와서요. 말과 글은 다르잖아요. 말로는 욕을 하거나 낄낄거릴 수 있어요. 앞에서 말한 것처럼, 말에는 연극적 요소가 있고 현장성이 중요하거든요. 거기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순간적으로 감정이 공명되는 순간 - P43
이 있고, 공명이 되면 그 강도가 높아지는 경향이 있어요. 그래서 말에서는 순간적으로 격정적인 표현이 나오는 것을 피할 수 없습니다. 피하는 것이 좋은 것도 아니고요. 하지만 글은 다르죠. 아니, 우리 세대는 다르다고 생각하죠. 문자는 훨씬 차분하고, 성찰적이고, 이성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부사나 형용사, 그리고 강도를 강조하는 접두사는 되도록 빼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고요. 그런데 말에서뿐만 아니라 글에서도 욕이나 ‘핵’, ‘개‘, ‘존나‘ 같은 접두사와 수식구가 난무하는 것이니 글의자식들이 보기에는 너무 천박한 거예요. 일본의 대중문화비평가이자 정신과 의사인 사이토 다마키는 《폐인과 동인녀의 정신분석》에서 이것을 감정의 강도를 소통하고 공유하는 관계라고 말합니다. 저자가 신주쿠, 하라주쿠, 이케부쿠로 등 일본의 대표적인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청소년들이 어떤 말을 하며 소통하는지를 살펴봤더니, 의미를 공유하는 게 아니라 감정의 강도를 공유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공동체를 만들고 유지하는 핵심이 ‘의미‘가 아니라 감정의 ‘강도‘인 것이죠(사이토 다마키, 2005). 86세대 같은 근대주의자들에게는 될 수 있으면 자제해야 하는 것이 청소년 관계의 토대가 된 거예요. 말이 아니라 글에서도요. - P44
저는 지금의 리터러시 논의에 크게 두 가지 편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문자를 기본 미디어로 전제하려는 편향인데요. 문자를 기 - P45
반으로 하는 리터러시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한다고 암묵적으로 가정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편향은 문(文)이라는 것을 협소하게 정의해서 텍스트 중심으로 보고 있다는 거죠. 소통에 참여하는 사람이나 맥락에 대한 이야기는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문해력에서 문이란 누군가와 소통하기 위해 글을 쓰거나 말을 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관련 논의들에서는 관계 혹은 관계성이라는 것이 거세된 채, 내가 혹은 상대가 텍스트를 얼마나 잘 이해했느냐를 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나-텍스트‘, ‘너-텍스트‘는 보는데 ‘나와 너‘, 궁극적으로 ‘현재의 맥락에서 텍스트를 공유하고 있는 나와 너‘를 고려하지 않는 거예요. 이건 문제가 많습니다. - P46
"어떻게 다 읽으셨어요?"라고 물었더니 "우리 이야기잖아."라고 하시더군요. 저는 그 말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어요. 제 어머니 얘기를 왜 하냐면, 어머니는 성경을 여러 번 읽으셨다는 것을 제외하면, 사회의 기준에서 봤을 때 문해력이 부족하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는 인생을 사셨어요. 그런데 한자리에서 책 한 권을 다 읽어내신 거죠.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가 자기 삶의 이야기였기 때문이에요. 자신의 삶과 유리된 글은 누구도 쉽게 읽을 수가 없거든요. 제게 법학자가 쓴 논문을 주고 읽으라고 하면 굉장히 힘들어할 것이고, 못 읽어내는 부분도 많을 거예요. 텍스트라는 것이 객관적이고 공평한 난이도를 가지고 있고, 훈련을 받으면 모두가 읽어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사실 삶과 권력의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는 거죠. 어떤 텍스트로 평가를 하느냐는 권력의 문제예요. 우리 어머니에게는 그 권력에 접근할 수 있는 힘이 없는 거죠. 내가 원하는 내 삶의 텍스트를 써내고, 읽어내고, 평가받을 수 있는 권력이 없는 거예요. 시험도 그렇고, 교육제도도 그렇고, 보편성과 일반성을 - P47
추구하는 과학이라는 체계 또한 그런 권력을 용인하지 않거든요. 기본적으로 학교에서 평가하는 것은 과학적 지식이에요. 그런데 지식은 과학적으로 구성되기도 하지만 내러티브적으로 구성되는 영역도 분명 있거든요. 삶의 내러티브, 시쳇말로 하면 삶의 지혜,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통찰, 자기 삶에 대한 성찰적이고 비판적인 이해, 이런 것을 평가하지는 않아요. 그런 식으로 보면, 어머니는 텍스트 중심의 문해력, 과학 중심의 리터러시, 제도가 ‘용인‘하는 리터러시의 변방에 있는 거죠. 이런 분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텍스트를 읽을 때 그 텍스트를 대상으로만 생각할 뿐 지금 나와 교감하고 소통하며 관계를 맺고 있는 존재로 생각하지 않는 이유가 이 주체성과 관련된 것 같습니다. 선생님의 어머님은 그 책이 선생님과 어머님 사이에서 지어진 글이기 때문에 ‘우리‘라는 말을 쓰셨을 거예요. 글은 선생님이 쓰셨지만 함께 작업한 책이라고 생각하셨을 것 같아요. 무엇보다 관계란 혼자가 아니라 함께 세계를 짓는 일이니까요. - P48
선생님이 쓴 책을 어머님이 쉽게 읽으실 수 있었던 것은 관계 내에서 있었던 내용이기 때문이죠. 예를 들어, 선생님이 그 책에서 리터러시라는 단어를 썼는데 어머님은 리터러시라는 단어를 모르실 수도 있어요. 하지만 읽으면서 리터러시가 무슨 뜻이겠구나 하고 짐작해내실 수 있어요. 이것은 순전히 선생님과 어머님의 관계 안에서 그 단어를 독해해내는 것이지, 사전에서 찾은 의미로 독해하는 것이 아니에요. 보통 리터러시라고 이야기할 때는 사전의 그것만을 가리키는 것이고요. 사전적인 의미의 문해력이 아무리 떨어진다 해도 대부분의 사람은 ‘우리‘ 사이에서 일어난 일은 다른 누구보다 더 잘 이해할 것입니다. 텍스트의 사전적 의미는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어머님과 선생님이 함께 겪었던 것에 대한 이야기이니 그 이야기 속에서 어머님이 텍스트를 해석할 수 있고, 당연히 그 해석은 다른 어떤 학자의 해석보다 분명한 그림을 머릿속에 그려줄 수 있는 거죠. 그런데 한국에서 전통적으로 권력화된 방식의 리터러시는 기호학적이고 추상적으로 다루는 역량만을 평가하고 그것만 리터러시라고보는 거죠. 내가 어떤 이야기를 할 때 그 이야기를 누가 듣느냐, 누구와 함께하고 있느냐, 즉 선생님 말씀처럼 관계로서의 맥락이 빠져 있어요. 오자와 마키코가 《심리학은 아이들 편인가?》에서 비판하는 것도 바로 그것입니다. 학교는 늘 기호학적이고 추상적인 것을 다루는 역량을 가르치고 그것만 측정하고 있다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기호학적이고 추상적인 지식을 삶의 맥락 속에서 위치시키는 힘은 잃어가 - P49
고 있다는 것입니다(오자와 마키코, 2012). 저는 그런 비판을 전적으로 받아들이는 편이에요. 리터러시라는 것 자체가 삶을 위한 것이기도 하고 삶의 리터러시이기도 하잖아요. 그런데 삶의 리터러시, 즉 삶을 읽어내는 리터러시는 완전히 무시되는 거죠. (...) 삶의 기예라기보다는 권력으로서의, 자본으로서의 리터러시가 힘을 얻는 상황은 우려스럽죠. 그런 권력을 가장 야만적으로 행사하는 장면을 인터넷에서 종종 보게 돼요. 우리는 누군가의 리터러시를 판단할 때, 이 사람이 어떤 텍스트를 얼마나 정확하게 이해했느냐를 봐요. 그런데 이 텍스트를 해석하는 권위는 자기한테 있다는 거예요.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해석하면 잘하는 거죠. 특히 인터넷에서 문해력이나 리터러시라는 말이 쓰이는 맥락이 그렇습니다. 이게 얼마나 황당하냐면, 자기가 원하는 독해를 못 하는 사람한테 "이런 문해력 떨어지는 것들"이라고 비난한다는 거예요. 이 사람과 나의 관계에는 관심이 없고 내가 원하는 대로 이 텍스트를 - P50
읽어냈느냐만 보는 거죠. 맥락(context)이라고 하는 것이 크게 보면 두 가지라고 생각해요. 먼저 텍스트를 둘러싼 사회적 맥락이 있죠. 텍스트가 생산되고 공유되고 소비되는 방식과 관련된 맥락이에요. 또 하나는 내가 텍스트를 대하는 방식과 이 사람이 텍스트를 대하는 방식, 즉 각자가 텍스트에 접근하는 맥락이 있어요. 이 두 가지가 사뭇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진리가 상대적이라는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에요. 내가 이 텍스트를 대할 때와 저 사람이 텍스트를 대할 때는 굉장히 다른 지식과 태도를 갖고 읽어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데, 내 방식대로 읽어내지 않으면 리터러시가 떨어진다고 비난하는 것, 이게 위험하죠. - P51
재밌는 것은 서로 난독증이라고 한다는 점이죠. 이런 점에서 리터러시는 상대방을 조롱하고 비판하기 위한 정치적 수사가 된 것 같습니다. 그런데 리터러시가 문제라면 왜 문제인가, 어떻게 문제인가는 논의하지 않는 거죠. 리터러시는 공적인 거잖아요. 내가 사유화할 수 있는 것이 아니거든요. 이 말은, 리터러시가 있다 없다를 내가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사실 이런 점 때문에 우리는 뭔가를 해석하고 난 다음에 불안해합니다. 불안해하는 게 당연하고 필요한 거예요. 내가 제대로 해석했나, 그게 불안한거죠. 왜냐하면 리터러시의 세계에서는 "이것이 원래 이런 의미야."라고 할 수 있는 신은 아무 데도 없기 때문이에요. 혹시라도 신이 존재한다면 토론하는 과정에서 이뤄지는 합의겠죠. 인터넷상의 논쟁에서 상대를 비난하며 ‘문해력이 문제야, 난독증이냐‘라고 하는 걸 볼 때마다, 이 어마어마한 주체성은 어디로부터 - P52
오는 것일까 하고 아연실색하게 돼요. 저는 제 전공 분야의 글을 독해할 때조차 혹시라도 잘못 해석한 게 아닌가 늘 불안해하거든요. 그러니까 물어볼 수밖에 없는 거고, 토론할 수밖에 없는 거죠. 둘 중 하나인 것 같아요. 리터러시를 사유화하든가, 자신을 신격화하든가. 아니면 의미란 해석을 하는 것이 아니라 비밀스러운 의식을 통해 이미 그 세계에 들어와 있는 사람들에게 비의적으로 전달된다고 보는 영지주의 겠죠. 어떤 글을 본 적이 있는데요, 지독한 비문이라 도저히 읽을 수가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글을 좋다고 평가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명료한 글도 못 읽으면 글을 읽는다고 하지 말아야 한다."고 비아냥거려요. 한국어라고 하기에는 민망할 정도로 주술관계도 안 맞는 글이었는데 말이죠. 어떻게 그럴 수 있나 했더니, 사실 그분은 그 ‘글‘을 읽고 있는 게 아니라 그 글을 쓴 사람을 추종하고 있었던 거예요. 한마디로 말해서 교주의 말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거기에 ‘훔치훔치태을천상원군‘라고 쓰는 ‘옴마니반메훔‘이라고 쓰든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이죠. 의미는 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관계 자체에서 오는 것이니까요. 이심전심이고 불입문자예요. 세계를 텍스트로만 간주하고 관계를 무시하는 것만큼이나 관계 자체에 의미가 완전히 내재한다고 보는 이런 태도도 요즘 나타나고 있는 매우 우려할 만한 현상입니다. - P53
큰 맥락에서 보자면, 우리 사회에서 리터러시의 변동은 두 영역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외부의 변동이 있고 내부의 변동이 있는 거죠. 외부의 변동이라 하면 미디어 생태계의 변화와 그에 따른 정보채널의 다원화, 세대 간 커뮤니케이션의 단절 같은 요소들입니다. 사회문화적이고 기술적인 변화에 따라 여러 매체가 중첩되고 발달하는 멀티리터러시의 급부상에서 오는 변동이라고 할 수 있죠. 미디어의 지형이 요동치면서 언론, 교육, 관계 등의 영역에서 새로운 질서를 찾아야 하는 상황이랄까요. 이게 외적인 변동이라면, 그 상황 속에서 일종의 자기 성찰성에 대한 긴박한 요구가 있는 거 같아요. 제도 차원에서 리터러시를 정의할 수 있고, 리터러시를 평가하는 도구를 선정하며 특정한 지표를 운용할 수 있는 사람들, 지배적인 리터러시의 형태들을 체화하여 사회문화적 자본으로 만든 사람들이 스스로에 대해 성찰하지 않는 상황, 이것을 리터러시 내부의 변동이라고 할 수 있겠죠. 전 외부의 변동이 만들어내는 이슈 못지않게 이 내부의 변동, 즉 성찰성의 부재가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해요. 대표적으로 ‘이 문해력 떨어지는 것‘, ‘난독증 아니야‘, 또 제가 싫어하는 말 중의 하나가 ‘예절이 지능의 문제다. 지능 떨어지는 것들이 예절이 없다‘는 식의 말이에요. 어찌 보면 상대 - P54
방을 나와 다른 차원에 위치시키는 거죠. (...) 듣고 있으면 ‘무식해’ 보이죠. 그런데 그 ‘무식하다는 느낌‘을 역사적으로 또 사회문화적으로 해석해내지 않고 지능과 연결시켜버리면 그 사람이 속한 사회경제적인 계층을 ‘지능이 낮은 계층‘으로 본질화해버리는 거죠. 지능이 낮으니 저런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인데, 정말 끔찍한 거예요. 이런 사고방식은 피부색으로 사람을 차별하는 인종주의와도 닿아 있고요. (...) 그래서 난독증이다, 문해력이 떨어진다, 지능이 떨어져서 예의가 없다, 이런 말들은 문해력이나 지능을 들어 한 사람의 존재 자체를 - P55
무시해버리는 행위인 거죠. 그런 말들이 나오는 순간 대화는 끝나버리는데, 너무 쉽게 꺼내요. 텍스트를 오해한 상대의 리터러시가 문제가 될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런 단정적인 말을 입 밖에 내는 사람의 성찰성이 더 큰 문제예요. (...) 다른 사람을 리터러시 떨어지는 사람이라고 낙인찍는 건 리터러시의 본질에 대한 성찰이 없는 거예요. 내가 읽고 해석하는 것이 얼마나 불확실할 수 있는가를 성찰하지 않기 때문에 타인에 대해 너무 쉽게 얘기하는 거죠. 나는 갖춘 사람, 상대는 갖추지 못한 사람. 나는 우월한 시람, 상대는 열등한 사람. 문해와 비문해를 이분법적으로 가르는 것은 철저히 비과학적입니다. 문해력이 좋다, 떨어진다로 생각하기보다는 문해력에 스펙트럼이 있고 종류도 굉장히 다양하다고 보는 게 적절하죠. 누구도 모든 맥락에서 통하는 완벽한 문해력을 갖고 있진 못하거든요. - P56
이 성찰의 문제를 다시 선생님이 말씀하신 관계성의 문제와 연결짓고 싶은데요. 성찰한다는 것은 저 사람이 한 말을 내가 제대로 이해했는가를 돌아보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때 첫 번째로 돌아봐야 하는 것은 아마 저 사람이 한 ‘말‘일 것입니다. 텍스트인 그 말을 내가 제대로 이해했는가, 혹시 틀리지는 않았는가를 돌아보는 것이 성찰이죠. 그러나 두 번째로 우리가 성찰해야 하는 것은 ‘저 사람‘의 말이라는 점이에요. 말을 해석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 말을 ‘저 사람‘이 했다는 것을 보려는 게 또 성찰인 거죠. 말과 글의 의미는 저 사람과 나 사이라는 관계에서 발생하는 것이니까요. - P58
리터러시를 단숨에 정의하기는 힘든 것 같습니다. 워낙 큰 개념이라서요. 하지만 리터러시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두 가지 방향이 있다고 생각해요. ‘머리에 든 게 많다, 학식이 높다‘ 이런 표현을 많이 쓰는데, 이런 관점에서 리터러시를 보면 개인이 무언가를 차분히 쌓아올리고 공부를 많이 해서 머리에 넣으면 리터러시가 점점 내 안에서 늘어나는 거죠. 조금 단순화시키자면, 나는 리터러시 100인데 쟤는 리터러시 80이야, 이렇게 숫자로 표시할 수있는 거예요. 이렇게 정의되는 리터러시가 함의하는 메타포는 ‘쌓아올리는 빌딩으로서의 리터러시‘ 예요. 그러니까 "나는 빌딩이 60층짜린데 쟤는 20층짜리야." 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죠. 다양한 영역에서스펙트럼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단일한 수직선 위에 높고 낮음으로 존재하는 거예요. 리터러시에 대해 논쟁하는 사람들은 대개 자신이 가장 꼭대기에 위치한다고 생각하죠. 리터러시는 거대한 사다리이고, 나는 내려다볼 수 있는 위치에 올라와 있는 셈이에요. 그렇지만 전혀 다른 방향의 메타포도 가능하거든요. 일종의 브리지, 다리를 놓는 것이 리터러시일 수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민주주의체제에, 또 다양한 담론이 쉼 없이 만들어지고 유통되는 지금의 사회에 맞는 메타포라고 생각하는데요. 이 관점에서 보자면, 나한테 리 - P65
터러시 자원이 많이 있다는 것은 타인을 깔볼 자격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다리를 놓을 수 있는 능력이 많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죠. 다른 면에서 보자면, 다리를 놓아야 하는 책무가 생기는 것입니다. 전혀 다른 메타포예요. 나는 60층짜리니까 거기서 내려다보는 게 아니고, 상대방으로 가는 리터러시라는 다리를 놓을 수 있는 역량을 갖춘 거예요. 그러면 이렇게 능력을 가진 사람은 다리를 놓아야 하는, 철학이나 문학에서 이야기하는 상호주관성(intersubjectivity)을 구축할 수 있는 윤리적인 책무가 생기는 거예요. 더 노력하고 더 이해하려고 애써야 하는 입장이 되는 겁니다. 지금은 이런 책무에 대해서는 생각하지않고 줄을 세우는 방식으로 리터러시를 동원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그 메타포의 빌딩을 바벨탑이라고 볼 수 있을 거 같아요. 자기 안에 일종의 바벨탑을 쌓아가는 거니까요. 성경에서 신은 바벨탑을 무너뜨립니다. 바벨탑을 무너뜨리고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게 만들죠. 그 이유를 저는 이렇게 봅니다. 누군가가 딱 하나의 언어를 독점적으로 가지고 신에게 도전하고, 또 그 언어로다른 이들에게 명령하고 깔보는 데 사용하지 말라고 한 것이라고요. 정말 해야 할 것은 바벨탑을 쌓는 게 아니라 말이 통하지 않는 인간들이 더 많이 소통하고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거라고요. 선생님이 하신 말씀에서 제가 제일 좋아하는 주제가 나왔습니다. 우리 사회는 리터러시가 어떤 윤리적인 책무, 소명, 의무를 불러일으 - P66
키는가에 대해 관심이 없어요. 리터러시 능력이 더 뛰어난(?) 사람이 어떤 윤리적 책무를 가져야 하는가에는 관심이 없고, 이게 얼마나 권력적인 것인가에만 초점을 맞춥니다. 그러다 보니 지금 리터러시라고 하는 것이 인간의 사회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사회를 서열화하고 지배와 피지배를 정당화하는 도구, 또는 누군가를 비인간화하는 도구로 사용되는 거죠. - P67
선생님이 더 잘 아시겠지만, 앎이라는 건 기본적으로 도약이 있어야 되거든요. 차이가 있어야 돼요. 나와 똑같은 사람에게서는 배울 수 없어요. 그런데 내가 커뮤니티를 구성할 수 있고, 그 커뮤니티에 속할 사람들을 고를 수 있으면, 진정한 의미에서의 가르침이나 배움은 일어나지 않아요. 스스로 속이는 거죠. 그런데 정서적인 면이나 동기적인 면은 계속해서 강해져요. 어쨌거나 내 편을 들어주는 사람이 이렇게나 많은 걸 눈으로 확인하니까요. 소셜미디어가 없던 시절에는 내가 무슨 생각을 해도,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이런 불안감이나 작은 의구심이 한쪽에 있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내편을 들어주는 사람들이 눈에 보이는 거예요. 내 말의 정당성이나 윤 - P70
리성을 지지받는 데 그 정도면 충분한 거죠. 그러니까 겁이 없어져요. 나침반 바늘이 흔들리지 않는 거죠. 이런 점을 개념화한 용어가 ‘반향실 효과(echo chamber cffect)‘예요. 좁은 욕실에서 노래를 부르면 자기 목소리가 울려서 성량이 풍부해진 것 같잖아요. 그렇게 소리가 잘 울리도록 설계한 방을 에코 체임버, 즉 반향실이라고 하거든요. 자기가 듣고 싶은 이야기만 해줄 사람들로 소셜미디어의 관계를 구축하고 비슷한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가득한 커뮤니티에만 가입하면 자기 목소리가 합리적이고 대세라고 느끼게 되죠. 지지하고 응원해주는 사람이 대부분이니까요. 저 또한 이런 ‘반향실 효과‘에서 자유롭지 못해요. 중요한 건 자신이 만든 온라인 공간이 세계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세계는 소셜미디어로 축소될 수 없어요. 그렇게 느끼는건 분명 착각이죠. - P71
이렇게 볼 때, 인터넷 커뮤니티 대부분의 의사소통은 동일한 언어들을 반복적으로 수행하는 것에 가까워요. 동일한 언어들이 반복되는 걸 잘 보여주는 단어가 바로 ‘동감합니다‘인데요. 누군가가 쓴 글을 보니, 내가 생각하던 것을 이 사람이 썼어요. 그렇지만 아무리 평소 내가 생각하던 것이라 해도 다른 사람이 썼다면 나하고는 다르게 쓰거든요. 좀 더 디테일하게,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에서 좀 더디테일하게. 대신 내가 좀 더 디테일하게 쓸 수 있는 부분은 빠져 있겠죠. 이런 격차, 차이가 존재하는데, 이 차이를 없애버리는 말이 ‘동감합니다‘ 예요. 생각해보세요. 동의한다, 동감한다는 말은 나도 이미 그걸 알고 있다는 뜻이죠. 나도 이미 알고 있는 것을 확인하는 정도라면 거기에서 무슨 배움이 일어나고 도약이 일어나겠어요. 그저 강화만 될 뿐이죠. 그런 면에서, 도약의 반대편에 있는 게 강화라고 생각해요. 제 책 《고 - P72
통은 나눌 수 있는가》 3부에서 제가 강조했던 게, 이런 의사소통의 공간은 서로의 감정의 강도만 강화하는 공간이라는 겁니다(엄기호, 2019). 공감이라는 이름으로요. 문제는 이 공간이 전혀 성찰적이지 않다는 사실이죠. 최근에는 이 문제를 심각하게 다룬 《공감의 배신》이라는 책도 출간되었습니다 (폴 블룸, 2019). 뭔가 활발하게 가르치는 것 같고 배우는 것 같지만, 사실 강도만세질 뿐 도약은 일어나지 않는 거죠. 저는 이렇게 도약이 일어나지않는 것 자체를 비문해로 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리터러시를 상태가 아니라 운동이라고 정의한다면, 한 상태에서 계속 강화만 되는 것은 비문해죠. 이런 점에서 보면 확실히 리터러시의 위기가 존재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 P73
문자의 도입과 인쇄술의 발달이 인간의 사고를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지식의 생산과 유통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세계를 지각하는 방식을 어떻게 바꾸어 놓았는지, 그리고 학문과 예술의 발달을 어떻게 추동했는지 같은 여러 질문을 다룬 대표적인 저작을 꼽으라면 아마도 많은 사람이 월터 옹의 《구술문화와 문자문화(Orality andLiteracy)》와 마셜 맥루언의 《구텐베르크 은하계(The Gutenberg Galaxy)》를 꼽을 것 같아요. 이외에도 인쇄술의 영향을 깊이 다룬 엘리자베스 아이젠슈타인(Elizabeth Eisenstein)의 《근대 유럽의 인쇄미디어 혁명(ThePrinting Revolution in Early Modern Europe )》이나 마이클 콜(Michael Cole)과 실비아 스크라이브너(Sylvia Scribner)의 《리터러시의 심리학(Psychology ofLiteracy)》 등도 꽤 흥미로운 저작이죠. 이들은 조금씩 다른 방식으로 문자 및 리터러시의 발달과 인간의 사회문화적·인지적 변화 사이의 - P77
관계를 추적합니다. 이 저작들은 조금씩 다른 방향에서 문자문화와 인류의 관계를 추적하고 있어요. (...) 저는 이 중 비교적 덜 알려진 윌리엄 프롤리(William Fravley)라는 학자의 견해를 가지고 텍스트와 인간의 관계를 이야기해보고 싶습니다(William Frawley, 1987). 프롤리는 텍스트를 중심으로 인류의 역사를 크게 세 시기로 분류했어요. 첫째, 구술 시대예요. 문자가 발명되기 전 텍스트가 존재하지 않았던 시대, 즉 비텍스트성(non-textuality)의 시대죠. 둘째, 텍스트가 나와서서서히 성장하던 시대예요. 인쇄가 나오기 전까지, 텍스트성(textuality)이 탄생하고 성장하던 시대죠. 셋째, 인쇄가 대중화되면서 텍스트가 급속도로 성장하던 시대입니다. 인쇄 기술에 의해 텍스트가 대량 생산되고 소비되던 시대예요. 이를 초텍스트성(hyper-textuality)이라고 부릅니다. 프롤리가 깊이 논의하지는 않았지만 인터넷의 발달과 웹문서의 폭발적 증가는 초텍스트성을 비약적으로 강화시켰죠. 각각 비텍스트성, 텍스트성, 초텍스트성의 시대라고 명명할 수 있겠네요. 프롤리가 이 주제를 갖고 쓴 책이 《텍스트와 인식론(Text and Epistemo -logy)》인데 여기에 그의 문제의식이 잘 담겨 있어요. 텍스트의 탄생, 성장, 비약적 확대가 어떻게 인간의 앎, 즉 인식론에 영향을 주는가를 살피자는 거죠. 우리가 단지 문자를 활용한 것이 아니라 문자가우리의 사고방식을 바꾸어놨다는 겁니다. - P78
프롤리의 논의가 재미있는 것은 텍스트를 당연시하지 않는 관점을 보여주기 때문이에요. 텍스트가 무색무취한 중립적 도구가 아니라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 역사관과 진리관을 송두리째 바꾸어놓은거죠. 저는 주로 텍스트성에 기반해 말씀드렸지만, 구술사적인 리터러시나 방법론에서 얻을 수 있는 지혜도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나 또래 친구들이 영상을 엄청나게 보지는 않는 듯해요. 선생님 경우에도 텍스트를 통해 삶이 죽 지어진 것으로 알고 있고요. 그 과정에 대해 메타적으로 생각해본 경험이 있으신지요? 메타적이라 함은, 텍스트를 읽고 쓰는 인간으로서 자신이 어떻게 변화해왔는가라는 질문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요. 저는 이 질문에 대한 성찰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아쉽게도 현재의 학교 리터러시 교육에서는 잘 던지지 않는 질문이죠. - P85
과거를 이 자리에 불러와 현재화하는 구술과는 달리, 지금 이 순간을 과거로 만들어 미래에 남기는 것이 글의 기본적인 역할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렇게 쓰인 글은 해석을 기다리는 그 무엇이 됩니다. 대담을 시작하며 말씀드린 것처럼, 읽는 사람은 세상 모든 것을 텍스트로 여기고 그 의미를 해석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해석은 자기만의 해석이 됩니다. 의견이 되는 것이죠. 이렇게 고독하게 자신만의 완결적인 의견을 가지기 위해 노력하는 것, 이것이 근대적 시민이고 개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 P89
그렇기 때문에 저는 텍스트라는 매체, 읽기라는 행위가 ‘개인을 출현시켰다‘고 생각해요. 이건 제 얘기가 아니라 서양의 많은 철학자가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구술문화와 문자문화를 구분해주신 것처럼, 구술문화에서는 지식 자체가 공동체지식이죠. 여기서는 지식의 주체가 공동체예요. 부족장이나 어른이 지식을 가지고 있다 해도 개별화된 지식으로 존재한 것이 아니었어요. 절기에 맞춰 마을 단위에서 이뤄지는 전통 의례 행위 같은 것도 조금씩 변하잖아요. 이런 연행(演行) 행위도 마을 어른들의 지도 아래 다른 사람들이 협업하면서 살아 움직입니다. 다들 조금씩 보태가면서 공동 창작의 형태로 발전시킨 지식입니다. 근대가 개인을 전면화시켰지만, 그 이전이라고 개인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지식인, 특히 불교의 승려들은 다 개인이었어요. 이들이 개인일 수 있는 이유가 읽기라는 행위에 있다고 봅니다. 선생님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기도 한데, 읽는 순간에 인간은 고독해지거든요. 인간은 글을 읽으며 생각을 하잖아요. 생각은 대부분 혼자 하는 것입니다. 특히 깊이 있게 골똘히 생각할 때 인간은 다른 사람과 같이 있는 순간조차도 잠시 사람들 사이에서 물러나 혼자 있게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읽기는 고독한 작업이죠. 구술문화에서 듣는 것은 계속 공동체에 참여하는 행위예요. 이와 달리, 읽는다는 것은 그 공동체에서 떨어져 나와 여행을 떠나는 거거든요. 제가 어렸을 때 책을 읽었던 이유가 그거였어요. 단칸셋방에서 다섯 식구가 살았지만, 책을 읽을 때만은 내가 그 방 소속이 아니게 되거든요. 많은 사람이 읽기를 여행에 비유하는데, 저는 비유가 아니라 실제적 - P90
행위라고 생각해요. 여행은 내가 속한 공동체를 떠나서 낯선 곳으로 혈혈단신 가는 것이죠. 개인이 된다는 것에서 고독은 매우 중요한 문제예요. 그 첫 번째 이유는, 고독해진다는 것은 내가 속한 공동체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이라 ‘그렇다면 나는 누구인가‘라는 자아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던지게 되기 때문이에요. 두 번째로는, 자아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던지면서 자기를 대면하게 된다는 것이에요. 자기를 대면해야만 내면이 탄생합니다. 내면이 형성되는 계기는, 아주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대부분 읽는 행위에서 비롯되죠. 읽기가 어떤 역량을 키워주는가라는 주제와 결합시켜본다면, 저는 읽기라는 행위가 두 가지 역량, 고독해질 수 있는 역량과 고독을 견딜 수 있는 역량을 키워준다고 생각해요. 아렌트가 구분한 개념으로 보면(한나 아렌트, 2006), 읽는 능력이 없는 사람이 공동체에서 떨어져 나가면 고독해지는 게 아니라 외로워집니다. 추방되는 것에 가까운 엄청난 두려움이 밀려와요. 그렇기 때문에 외로움이 아니라 고독이라고 느끼고 받아들이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역량인데, 바로 이것이 읽기와 관련해서 더 깊이 얘기해야 할 주제라고 생각해요. 읽기는 개인을 어떻게 만들고 어떻게 성장시키는가. 다음으로 문자와 읽기가 키워주는 역량이 무엇이냐, 저는 역사에 대한 감각이라고 봅니다. 인간은 생각하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생각하는가, 아무렇게나 생각하는 게 아니라 사건을 시간의 순서에 따라서 사유한다는 게 중요해요. 역사적으로 사유한다는 것은 흐름을 파악하는 것이고 흐름에 사건들을 엮을 줄 안다는 것이죠. 우리 - P91
는 어떤 현상을 볼 때 자동으로 역사적으로 사유합니다. 예를 들면, 지금 벌어지고 있는 한일문제 같은 현안이 생길 때,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지금 이 일이 벌어지는가, 또 과거에는 이 일을 어떻게 다루었기에 여전히 그 여파가 지금에 미치는가, 그러면 우리는 지금 어떻게 해야 미래를 바꿀 수 있는가라는 식으로 사유한다는 거죠. 이게 역사적 사유예요. 역사적으로 사유하는 존재의 특징은, 현재를 똑 떨어진 시공간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연속성 속에서 본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텍스트성이 생기고서야 기록된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말씀하신 것처럼, 긴 역사에 대한 감각이 있어야 자기 자신을 연속선상에 놓고 사유할 수 있게 되거든요. 짧은 역사를 갖고는 역사라고 할 수가 없는 거죠. 짧은 역사에 대해 우리가 쓰는 개념은 ‘당대‘예요. 3대라고 해도 사실 당대죠. 당대를 넘어서야 역사적 감각이 생겨요. - P92
이런 식으로 본다면, 3대라는 건 역사가 아니라 당대를 구성하는 동시대인인 거고, 동시대를 넘어가면 나랑 무관한 전설의 영역, 설화의 영역이 되는 거죠. 그런데 역사적 사유란 당대를 뛰어넘고 동시대를 뛰어넘는 것이라서, 그러려면 기록이 있어야 하는 거죠. 기록이 있을 때에만 당대라는 동시대를 넘어서 당대 이전에 무엇이 있었기에 당대가 이렇게 구성되었나를 볼 수 있기 때문이에요. 그렇다면 읽기라는 것은 개인과, 동시에 역사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만들어내는행위가 됩니다. 또 하나, 제가 주체성의 문제에서 무척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변화는 거대주체의 소멸이에요. 역사적 존재로서의 자기, 역사적 존재로서의 인간, 이걸 생각하게 되면서 거대주체가 소멸하게 되었다고 보는 거죠. 담론의 공간, 주석으로서의 지식 생산이라고 말씀하신 것이 이런 의미일 텐데요. 이제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다 알거든요, 자기가 천재가 아니라는 것을요. 특히 자연과학에서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지식이라는 게 거의 불가능하죠. 제가 이걸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거대주체를 종식시켰기때문에 인간이 더 겸손해질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에요. 만능감을 제거할 수 있죠. 많은 연구자가 처음에 어떤 주제를 떠올리면서 이건 정말 기발하다고 생각해요. 그렇지만 논거를 대기 위해 다른 사람들의 저작을 읽다 보면 자기가 하려는 게 대부분 이미 연구되어 있다는것을 깨닫게 되죠. 인류 전체의 거대한 축적 위에 올려지는 작은 벽돌 하나라도 되면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정말 겸손 - P93
해지거든요. 아주 예외적으로 읽기를 반복할수록 자기가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긴 합니다만 대다수의 사람은 읽으면 겸손해집니다. 이런 점에서 저는, 개인을 만들고 역사적 주체를 만들되, 동시에 거대주체가 아닌 작고 소박한 주체를 만들어낸다는 것이 읽기라는 행위가 가진 매우 독특한 특징이라고 생각해요. (...) 쓰기와 읽기는 동전의 양면처럼 밀접하게 엮여 있죠. 사회적으로 볼 때 리터러시 행위는 쓰는 주체가 텍스트를 매개로 읽는 주체를 만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읽기와 쓰기는 씨줄과 날줄처럼 엮여서 글을 기반으로 하는 담론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이니까요. 쓰기에 대해 살펴보기 위해 먼저 다른 미디어, 특히 이미지나 영상과 비교할 때 텍스트가 갖는 두드러진 성격을 이야기해보려고 합니다. 먼저, 텍스트의 유연함을 들 수 있어요. 영상에 비해 문자매체가 - P94
갖는 강점 하나는 머릿속에 있는 생각을 어떤 식으로든 언어화할 수 있다는 거예요. 앉은 자리에서요. 어디서든 상관이 없죠. 슥슥 글로 풀어내면 되는 거니까요. 영상은 그럴 수가 없죠. 내가 아무리 아이디어가 좋아도 아무렇게나 영상화할 수가 없어요. 상상 가능하다고 뚝딱 만들어낼 수가 없는 거죠. 게다가 어떤 아이디어는 엄청나게 많은 돈을 투여해야 해요. 그러니까 SF나 판타지의 세계는 천문학적인 돈을 넣어야 영상으로 겨우 만들어낼 수 있는 반면, 문자로는 버스를 타고 있든 화장실에 있든 상관없이 끄적이고 타이핑할 수 있는 도구만 있다면 얼마든지 머릿속의 개념을 언어화할 수 있는 거죠. 영상에 비해 생산단가가 낮고 경제성이 월등한 겁니다. 물론 그렇게 나온 텍스트가 얼마나 깊이나 가치를 갖느냐는 다른 문제지만요. 다음으로 검색과 인용에서 텍스트의 강점을 생각해볼 수 있어요. 질문을 던져보죠. 텍스트 검색 및 인용의 유연함을 영상이 따라올 수있을까요? 다양한 소스를 엮어 하나의 논리적 구조로 만드는 일에 있어 단어의 연쇄라는 동일 포맷을 유지할 수 있는 텍스트에 비하면, 장르, 해상도, 구성, 색감, 음악, 내레이션 등의 요소들이 울퉁불퉁하게 엮일 수밖에 없는 영상이 같은 수준의 유연성을 확보하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다시 말해, 텍스트매체의 경우 수많은 텍스트를 모으고 변형해서 다른 텍스트로 만들어내기가 비교적 수월해요. 하지만 영상의 경우에는 그게 쉽지 않죠. 전혀 다른 스타일의 영상들을 묶어서 하나의 영상으로 만드는 건 까다로울 수밖에 없어요. 유연성, 경제성에 이어 텍스트에서 유독 두드러지는 특징 하나가 추상성이에요. 영상이 추상적일 수 없다거나 텍스트가 구체적일 수 - P95
없다는 말은 아니에요. 밀도 있는 묘사나 추상을 이미지화한 영상도 있을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미디어의 속성상 문자매체는 시각매체에 비해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개념들을 아주 잘 다뤄요. (...) 물론 구체성에 있어서는 텍스트가 영상을 따라갈 수가 없어요. 멀티미디어가 세계를 그대로 복사하고 포착할 수 있기 때문인데, 이런건 유튜브가 잘하는 거예요. 예를 들어 신발 끈 묶는 법, 레이업슛 하는 법, 뜨개질 하는 법 같은 것들은 아무리 말로 해봤자 영상으로 보는 게 백배 낫습니다. 하지만 추상적 개념을 매개로 하는 사유, 예를 들어 존재라든가 과정, 관계, 사랑, 자유, 평등, 이런 것들을 개념화하고, 이를 체계화해서 사유의 틀, 나아가 이론을 만들고 소통하는 것은 영상으로 하기가 굉장히 힘들죠. - P96
소쉬르가 말하는 언어의 자의성인데(페르디낭 드 소쉬르, 2006), 이 앞에 있는 물건을 탁자라고 하건 데스크라고 하건, 그것은 어떤 사회적 상황에서 누구와 얘기하는가에 따라 달라지는 거지, /탁자/나 /데스크/라는 말소리 자체에 의미나 개념이들어 있지는 않아요. 자의적인 거죠.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의미하는 - P97
대상과 언어 간의 거리가 엄청나게 먼 거예요. 거의 관계가 없는 거죠. 그런데 영상은 관계가 상당히 가깝죠. 관점이 개입되고 편집이 들어가긴 하지만, 찍는다는 것은 재료가 현실이거든요. 영상이 재현(represent)하는 미디어라면, 언어는 어떤 세계의 사태나 사건, 현상이나 대상을 상징(symbolize)하는 거예요. 언어와 대상 사이의 거리가 멀거나 관계가 없는 건 마찬가지인데, 말과 글은 또 쓰임이 굉장히 달라요. 말은 발화자와 구체적인 맥락 모두를 담고 있어요. 언제나 구체적인 시간과 장소에서 일어나는 발화 사건(speech event)을 생각할 수밖에 없죠. 하지만 글은 구체적인 맥락이나 말하는 사람에게서 어느 정도 독립적이에요. 또 말은 호흡이 짧아요. 하지만 글은 우리의 생각을 표현하고 확장하는 일종의 저장장치가 되죠. 외장 하드디스크 드라이브 같은 역할을 한달까요. 그래서 엄청나게 긴 스토리나 논리를 전개하는 게 가능한 겁니다. (...) 그런 면에서, 쓰기라는 건 말을 그냥 옮겨놓는 게 아니에요. 말이 문자화되는 순간, 문자가 그 자체로 해낼 수 있는 영역이 생기는 거죠. 예를 들면 길고 촘촘한 내러티브를 만들어내거나, 방대한 스케일 - P98
의 역사적인 사건을 자세하게 기술하는 일, 또 고도의 추상성을 갖춘 이론적인 체계를 구축하는 일 등이 있죠. 만약 문자가 없었다면 우리가 마르크스나 헤겔, 도스토옙스키 같은 사람들의 생각을 향유하거나 우리의 삶에 적용하는 게 가능할까요? 당연히 불가능하죠. 그걸 가능하게 하는 미디어가 쓰기라는 겁니다. (...) 이걸 자유도라는 관점에서 볼 수 있을 거예요. 텍스트가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부분이 있는가 하면 영상이 자유롭게 하는 게 분명히 있 - P99
어요. 그런데 지금의 영상 편집 기술이나 소프트웨어 발전 단계에서 우리가 텍스트를 통해 누리는 자유로움을 영상을 찍고 만드는 것으로 대체할 수 있는 것인가, 이건 좀 의문이에요. 언어를 매개로 해서 세계를 로딩하고 편집하고 그걸 통해서 지식을 만들어내고 우리가 경험한 것을 성찰하고 나눌 수 있는 힘, 그것을 영상이 아직은 따라갈 수 없다고 생각해요. 텍스트의 역사가 그만큼 길기 때문에, 영상기술이 아무리 빨리 성장한다고 해도 십 몇 년 안에 이걸 뒤집어엎을만한 힘을 얻기는 힘들다고 보는 거죠. 글을 쓰고 다듬는 속도로 영상을 생산하고 편집할 수 있는 시대는 아직 멀었어요. 결국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역사에 대한 감각, 긴 시간에 대한 감각, 제가 말씀드린 추상성에 대한 감각 등은 영상, 특히 현재 기술 수준의 영상에서보다는 텍스트에서 훨씬 더 잘 구현될 수 있고 자유자재로 시뮬레이션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런 면에서, 책 읽기는 영상 보기든 둘 중 하나만 잘하면 된다거나 혹은 지금은 영상 시대니까 영상 만드는 것만 잘하면 된다고 말하는 건 무책임할 수 있습니다. 어떤 매체를 가르칠 것인가를 고민할때 ‘요즘 뭐가 대세라더라‘를 중심으로 생각해서는 안 돼요. 인간에게 어떤 사고의 도구를 줄 것인가에 대해서, 그 도구가 우리를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 그러한 변화가 개인과 사회에 어떤 결과를 초래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하는 것이지 대중성만을 좇아서는 안 된다는겁니다. - P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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