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의 방문
장일호 지음 / 낮은산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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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 중지와 임신 유지 사이에는 ‘선택‘과 ‘생명‘이라는 단어가 다 대표할 수 없는 무수히 많은 고민과 결단이 존재한다. 오랫동안 이 문제를 ‘죄‘로 다뤄 온 문화에서 성장해 온 사람에게는 특히 그렇다. 임신 사실보다 유산 사실을 먼저 알았던 날이 떠올랐다. 의사는 전체 임신에서 자연 유산 비율이 20% 정도 된다며 나에게만 일어난 불행이 아니라고 위로했다. 정작 내가 그 ‘불행‘을 무척이나 안도했다는 걸 의사는 끝내 알지 못했다.
그 일을 겪으며 나는 예상치 못했던 죄책감에 시달렸다. 죄책감이라니 가당치 않아서, 오래 괴로웠다. 고작 ‘세포‘를 보내고 눈치 없이 긴 애도를 건너는 동안 기존 사회의 통념에서 내가 얼마나 자유롭지 못한 사람인지 실감했다. 생명은 설명이 필요 없는 너무나 강력한 프레임이다. 이 문제를 고민하는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얼마간의 망설임 앞에 반드시 서게 된다. 우리는 그렇게 모두 각자가 구성한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 P223

전제를 끌어안고 산다. - P224

내가 지난 몇 년간 ‘낙태죄‘ 이슈를 취재하며 들었던 가장 아름다운 말은 《배틀그라운드》의 저자 중 한 사람인 이유림 씨로부터 왔다. 낙태가 더 이상 ‘죄’가 아닌 세상에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재생산권‘을 논의해야 하는 시점에 도착했다. 재생산권을 유림 씨는 이렇게 정의했다. "인간이 다음 인간을 이 세계에 데리고 오는 일이잖아요." 나는 그 말을 받아 적다가 잠시 멈췄다. 대화가 이어지는 동안 그 문장에 굵게 밑줄을 긋고, 동그라미를 여러 차례 그렸다.
임신과 출산은 여성의 몸에서 시작하지만 여성의 몸에서 끝나지 않는다. "재생산은 어느 사회에서든 단지 구성원을 수적으로 충원한다는 의미에 그치지 않으며, 한 사회의 문화와 제도, 가치 등을 생산하는 과정이다." 결국, 재생산권이야말로 ‘낙태죄‘를 둘러싼 문제의 본질이다. 평등하게 성적 관계를 맺을 권리, 출산 여부를 결정할 권리, 자녀를 건강하게 양육할 권리 등을 포괄하고 있는 재생산권을 보장할 때만이 생명권 - P225

역시 온전히 보장될 수 있다. 지금까지 한국 사회가 낙태를 태아의 생명과 여성의 자기결정권 충돌로 이해했다면, 이제는 그동안 국가가 통제해 왔던 재생산권을 되돌려 받는다는 의미로 논쟁을 가져와야 한다.
문제는 ‘앞으로‘다. "낙태가 ‘합법‘이 되는 것과 임신 중단이 여성 본인이 선택할 수 있는 당연한 권리로 받아들여지는 것 사이의 거리를 메우기 위해서는 또 다른 투쟁이 필요하다." 사회경제적 사유로도 임신 중지를 가능하게 한다거나, 주수를 제한하는 방법은 일견 합리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계속해서 여성을 처벌하고 차별하겠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낙태죄 폐지 운동은 여성의 권리를 제한하는 법을 없애는 데서 끝나는 게 아니라 여성의 권리를 보장하는 법을 새로 만들고, 기존의 법을 여성의 관점에서 해석하는 과정을 동반해야 한다." - P226

추천의 말
책의 말이 허물어지는 자리에서
김애란


40대는 책을 버리는 시기라 생각한 적이 있다. 꼭 그때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살면서 한번쯤 그런 순간을 맞는다. 지금껏 자신이 믿은 것과 기댄 것, 지킨 것의 목록 앞에서 건조하고 회의적인 얼굴로 책을 솎아 내는 순간을 40대는 그간 자신이 읽은 책에 자기 삶을 포갠 뒤 한번 더 진지하게 ‘어떻게 살 것인가?‘ 묻는 시기다. 그리고 이즈음 많은 이들이 어떤 선택을 한다.

개인적인 고백을 덧붙이자면 40대는 ‘옳은 말‘을 의심하고 싫증 내는 때이기도 하다. 그 말이 틀려서가 아 - P253

니라 ‘너무 자주 들은‘ ‘다 아는 말‘이라 여기기 쉬워서다. 그러나 그 ‘다 아는 말‘ 속에는 얼마나 많은 이들의 삶이 들어 있는지. 그리고 그 삶 하나하나는 얼마나 구체적이고 육체적인지. 우리가 지레 빤한 말이라 치부한 그 말이 누군가에는 목숨 줄이고, 실존의 테두리임을 다시 깨닫는다. 그 선이 비단 타인뿐 아니라 나도 지켜 주는 선이었음을 깊이 수긍하면서.

그러니 많은 이들이 이미 알거나, 안다고 착각하는 이야기를 한번 더 보게 하고, 읽게 하는 건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 그 지난함을 알면서도 무언가 계속 발화하는 이들을 본다. 장일호도 그런 이중 하나다. 그는 나와 마찬가지로 온전하고 무결한 화자가 아니며, 이따금 "술병 뒤에 숨는", "아픈 게 자랑인" 기자이고 여성이다. 그래서 내게는 이 책이 ‘독서‘로 한번 자기 자리를 세웠던 이가, 인생의 예기치 않은 사건 앞에서, 책 속의 말들이 다 무너지는 걸 목도하고도 ‘다시 책 앞에 선 사람의 이야기‘로 읽혔다. 책 버리기 쉬운 나 - P254

이에, 그래도 이상할 것 없는 시기에, 하나의 책을 전과 다른 방식으로 두 번 읽은 사람의 이야기로.

더불어 이 책은 사실 세상 그 누구에게도 ‘다 아는 말‘이란 없으며, 그런 ‘앎‘은 앎이 아니라고, 그러니 이웃뿐 아니라 나자신을 위해서라도 새 말이 지나가는 길을 함께 터 주고 넓혀야 한다고 일러 준다. 가끔은 그 일을 ‘독서’라 불러도 좋다고 조용히 끄덕이면서. 그 발화가 고맙다. 한두 번이 아닌 누군가의 일생에 걸친 발화라 더 그렇다. - P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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