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삐언니는 조울의 사막을 건넜어 - 아파도 힘껏 살아가는 너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이주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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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한 모금 마시고 바다에 뛰어들어 해산물을 채취하는 해녀에겐 철칙이 있다고 한다. 욕심내지 않는 것. 자신의 폐활량을 정확히 깨닫는 것. 그래서 나이와 상관없이 미역 따는 해녀와 전복 따는 해녀는 따로 있다. 미역만 딸 수 있는 해녀가 더 깊은 물에서 자라는 값비싼 전복을 탐내다 보면 목숨을 잃게 된다. ‘숨‘은 냉정하다.
정신적 에너지도 이와 비슷한 게 아닐까. 태어날 때부터 폐활량이 정해져 있듯 내게 주어진 정신적 용량이 있는 것이 아닐까. 고양된 감정, 넘치는 활력, 고갈되지 않는 아이디어 같은 조증의 에너지를 계속 감당하기 버거워졌다. - P62

"수간호사가 내게 요즘 모습이 ‘원래 모습‘이냐고 물었다. 원래 모습이란 무엇인가. 조증도 나고, 울증도 나다. 어느 것을 내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까. 지루한 병원생활로 지친 모습이 진정한 나일까. 이젠 아무리 난리를 피워도 오히려 퇴원을 늦출 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체념과 체념을 거듭한 것이 나인가. 외부의 자극에 별 감흥이 없는 지금의 나인가." - P63

어린 시절의 경험이 조울병의 범인은 아니지만, 후일 조울 - P80

병이라는 낯선 손님이 찾아왔을 때 그 놀라운 식탐을 채워주는 먹거리인 건 분명해 보인다. 조울병은 망각의 냉동고에 갇혀 있었던 일들을 불러내 놀라운 기억력으로 소생시킨 뒤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는 병이다. 감정을 끄집어내 뼈를 다 발라 먹다시피 악착같이 후벼 파고 증폭시킨다. 조증이 점령한 머릿속에선 과거와 현재의 경험이 형광물질이라도 발라진 듯 총천연색으로 다가온다.
울증 시기엔 조증 때처럼 생생하진 않지만 과거의 기억이 물밑에서 발목을 잡아당기는 물귀신처럼 달라붙어 있다. 현재와 미래는 과거의 어두운 경험에 꽁꽁 묶여 있으며 앞으로도 이를 헤쳐 나오는 건 불가능하다고 체념한다. 조울병은 지난 일을 반짝반짝 빛나는 행복의 기억들 또는 땅 밑으로 꺼질 듯한 암울한 기억으로 극단화시킨다. 조울병을 앓기 이전의 경험이 조울병을 유발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조증과 울증 그 어느 시기든 나를 사로잡은 감정의 소재는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얻어진다. - P81

슬픔과 우울은 어깨를 마주하고 찾아올 때가 많지만 본질적으 - P121

론 다르다. 슬픔은 이유가 있다. ‘나‘와 ‘잃어버린 것/사람‘을 분리할 수 있다. 그때가 언제일지 알 수 없지만, 이 슬픔이 언젠가는 다할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시간이 지나면 지금은 오로지 슬픔으로 꽉 차 있는 감정의 공간에 기쁨과 행복이 비집고 들어올 것을 믿는다. 슬픔은 위로하는 타인과 교류할 수 있다.
반면, 우울은 실체 없는 어떤 것이 주변을 채우고 목을 조르는 느낌이다. 의지, 목표, 흥미가 마비된다. 모든 것이 메말라간다. 슬픔이 감정의 습지라면, 우울은 감정의 사막이다. 그것도 사하라 같은 열사의 사막이 아니라 남극 같은 동토의 사막. 우울은 귀를 막는다. 주변 사람들과 마음을 나눌 수 없다. 우울은 ‘셀프 감금‘이다. - P122

그럼에도 아는 것과 겪는 것은 늘 다르다. 내가 고통의 견적을 정확하게 파악한다고 하더라도, 고통의 주인은 고통이다. - P132

나중에 이 시기의 경조증과 울증의 실체를 알게 되자, 두 가지 모순되는 감정을 느꼈다. 이 병에 완전히 사로잡혔다는 절망감과 불안감이 한 축이었다면, 이 시기에 일어난(또는 일으킨) 크고 작은 사건이 왜 벌어졌는지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안도감이 또 다른 축이었다. 난 아팠던 것이다. 내 잘못과 부주의로 벌어진 일이라고 하더라도 내가 다 책임져야 하는 건 아니다. 그 반대도 가능하다. 내 책임이 아닌데 왜 이런 일이 내게 벌어졌는지 그 의미와 이유에 대해 우리는 알 수 없다. 다만, 세상엔 어떤 일이든지 일어날 수 있으며 나 역시 예외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불운이 피해가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이 불행을 겪어야 한다.
불행에 물음표를 찍거나 저항하지 않고,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이는 진실의 중요한 조각이다. 조울병을 그냥 내 부분으로 받아들이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렸다. 사실 지금도 자유롭지 않다. 약과 상담으로 단단히 죄어오는 조울병의 고삐가 언제 풀릴지 몰라 두렵다. 그래도 나는 운이 좋다. 짜고 달고 쓰고 매운 맛을 봤다. 때론 비릿함에 몸서리치기도 했다. 내 인생은 간이 잘 맞는다. - P138

선생님 앞에서 정신없이 울던 시기가 지난 뒤, 그는 과거의 나쁜 기억들을 곱씹으며 해석하는 일은 이제 충분하다고 했다. 계절이 변하면 철 지난 옷을 정리하는 것처럼 좋지 않은 것들은 기억의 서랍에 넣으라고 했다. - P167

만성적인 홍수가 불가피한 저지대에 사는 사람들을 생각해보라. 이사 가지 않는 한 물난리를 아예 피할 순 없다. 그러나 피해를 최소화할 방법을 고안해내는 것, 방벽을 친다거나 집 구조를 바꾼다거나 배수구를 개선한다거나 하는 일은 가능하다.
환자들도 알고 있다. 조울병을 앓기 이전 과거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며, 노력한다고 해서 재발할 가능성을 원천봉쇄하긴 어렵다는 것을. 의사가 환자를 돕는 방법은 재발이 없을 거라고 안심시키는 게 아니라 환자가 위기에 봉착할 때 ‘모 - P172

든 것‘을 잃지 않고 헤쳐나올 수 있는 태도를 가르치는 것이다. 환자 스스로가 이런 생각을 훈련할 수 있도록 지켜보고 장려하는 것이다. 내가 어떤 상황에 부닥쳤을 때 어떤 행동을 하는지를 이해하고, 슬픔, 기쁨, 두려움에 너무 깊이 빠져들지 않을 방법을 익히고 실천하는 것. 불행이 발생하는 것은 통제할 수 없지만, 이런 훈련을 계속한다면 극복할 가능성은 훨씬 높아진다. - P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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