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우리를 우리라고 부를 때 : N번방 추적기와 우리의 이야기
추적단 불꽃 지음 / 이봄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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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취재 방식이 특별한 것은 아니다. 대학에서 언론을 전공했지만, ‘사이버 범죄‘를 취재하는 방법은 배우지 못했다. 하지만 사이버 공간에서 벌어지는 성착취 행위와 피해자의 인격을 짓밟는 대화를 추적해 증거로 만드는 일은 전공 지식이나 취재 요령이 아닌 끈기가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이렇게 그들을 반드시 법의 심판대에 세워야 한다는 신념 하나로 버티느라 가해자들에게 받는 정신적 충격이 가랑비에 - P34

옷 젖듯 우리에게 스며드는 줄도 몰랐다. 감당하기 힘든 순간들을 이겨내며 우리는 1년 넘게 잠입 취재를 수행했다. 텔레그램은 전쟁터였고 우리의 휴대전화 사진첩에는 전쟁의 상처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사건 해결은 더뎠고 모니터링을 포기하고 싶은 순간은 매일 매순간 찾아왔다.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에도 텔레그램 가해자들은 계속 피해자를 공격하고 있었다.
광사우리의 활동이 세상에 드러나자 어떤 이들은 ‘추적단 불꽃이 어린애들 탐정 놀이 하듯 증거를 수집했다‘고 비웃었다. 휴대전화로 그저 텔레그램 대화방의 동태를 살핀 대학생 둘이 수집한 증거 자료를 어떻게 신뢰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물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우리가 수집한 자료의 내용을 모두 믿을 수는 없다. 가해자가 거짓말을 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가해자 자신이 ‘○○대 철학과‘에 다니고 ‘학원을 운영하고 있다‘고 한 말처럼 걸러야 할 정보들도 많았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내용도 전부 캡처하고 노트북에 대화 내용을 백업해두기로 했다. 그래야 계속 전진할 수 있었다. - P35

‘신작‘을 원하는 회원들은 많았다. ‘신작‘이 많이 올라오는 대화방일수록 참여자가 많았다. 주요 운영자들은 대화방 참여 규모를 늘려 결국에는 돈을 받고 방을 팔고 싶어 했다. 불법촬영물 유포를 비롯한 참여자들의 활발한 활동은 대화방 매각 대금과 직결되어 있었다. 고담방에서 파생된 대화방 가해자들은 성착취물 공유를 통해 수익도 취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여성의 인격을 짓밟아 가해자들이 얻는 게 고작 돈이었다. - P37

대한민국에서 디지털 성범죄 처벌이 얼마나 미약한지 그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N번방은 이런 어처구니없는 판결을 먹고 자란 것이다. - P43

피해자가 계속 늘어나는 것을 묵인할 수 없었다. 막을 수 있는 만큼이라도 막아야 했다. 먼저 SNS에서 해시태그 기능을 이용해 특정 직업군을 검색했다. 지인능욕방에 올라온 사진과 해시태그 기능으로 찾은 사진들을 하나하나 대조해 특히 피해가 심한 이들을 찾아 나섰다. 피해자를 찾아도 이야기를 전하기가 쉽지 않았다. SNS 개인 메신저를 통해 우리를 소개하고 피해 사실을 전했다. 당신의 사진이 수천 명의 이용자가 있는 방에서 성희롱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말을 전해야 하는데 쉽게 입이 떨어질 리 없었다. 그럼에도 알려야 했다. 짐작이 가는 사람이 있는지 묻고는 경찰에 신고할 것을 권했다. 용기를 내서 각 지방경찰서 - P46

에 신고한 피해자들은 한결같이 이렇게 말했다.
"경찰서에서 텔레그램 범죄는 영장 발부도 안 된대요. 가해자를 못 잡는대요……" - P47

한국 법원의 솜방망이 처벌에 분노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기뻐 - P62

한 자들도 있다. 바로 웰컴 투 비디오 이용자들이다. 이들은 다수가 집행유예로 풀려나거나 솜방망이 처벌조차 받지 않았다. 겉보기에는 평범한 아동 · 청소년 성착취 범죄자들이 우리 주변에서 잘 먹고 잘 살고 있다. 웰컴 투 비디오 이용자들이 흘러들어간 곳이 바로 텔레그램 N번방과 다크웹의 □□□, ○○○같은 사이트다.

(...)
12월, 텔레그램 대화방에 입장하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경찰 수사를 돕고 언론에 제보하는 등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보았다. 텔레그램 N 번방을 처음 발견한 이후 5개월이나 흘렀는데 한국 사회는 여전히 무심했다. 허탈감과 무력감이 찾아왔다. 기말고사와 취업을 준비하느라 모니터링하는 시간은 전보다 줄어들었다. 휴대전화에서 텔레그램 앱을 지울까 고민도 했지만 차마 그러진 못했다.
사실 텔레그램 로고를 보는 것만으로도 괴로웠다. 친했던 사람을 텔레그램 대화방에서 목격한 이후 더 그랬다. 주변 사람을 아무도 못 믿게 되었을 때의 심정은 실로 참담했다. 그럼에도 우리는 지금도 종종 후회한다. 당장 무엇 하나 해결되지 않은 것 같아도 처음 취재에 나설 때처럼 계속 증거를 수집했으면 좋았을걸. 그랬다면 더 많은 범죄자들을 검거하는 데 도움이 되었을 텐데, 단 한 사람이라도 더 구해낼 수 있었을 텐데……. - P63

〈실화탐사대〉와 인터뷰를 마칠 때쯤 담당 PD가 A의 연락처를 알려줄 수 있는지 다시 한 번 물었다. 알려드릴 수 없다고 하자 PD는 "피해자 취재가 안 되면 방송이 못 나갈 수도 있다"라고 말했다. 인터뷰를 마친 후에도 우리는 ‘피해자의 연락처를 알려달라‘는 〈실화탐사대〉 측의 전화와 메시지에 시달렸다. 이런 상황을 전달받던 A가 인터뷰 거부 의사를 담은 장문의 편지를 작성해 〈실화탐사대〉 측에 전해달라고 했을 정도였다. A가 완강히 인터뷰를 거부했음에도 작가는 포기하지 않고 연락처를 알려줄 수 없다면 A의 근무지만이라도 알려달라고 우리에게 요청했다.
2018년 한국기자협회와 여성가족부가 함께 마련한 ‘성폭력 · 성희롱 사건보도 공감기준 및 실천요강‘의 ‘취재 시 주의사항 2항에는 ‘사건 - P65

당사자나 가족은 인터뷰를 거부할 권리가 있다. 반대 의사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취재를 요청하여 괴롭히지 말아야 하며, 사건당사자 등이 인터뷰를 거부하는 것을 보도에 부정적으로 언급하지 않아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이는 MBC 〈실화탐사대〉 측이 명백히 보도 준칙을 어긴 행위였다. 기자지망생인 우리조차 언론에 회의를 느끼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마저 모른 척 텔레그램을 지워버리기엔 마음에 걸리는 게 많았다. 피해자들의 영상이 머릿속을 계속 맴돌았다. 너무 괴로워서 하루에도 몇 번씩 텔레그램을 지울까 말까 고민했다. 모니터링을 한다고, 경찰에 신고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경찰에 협조한 지 수개월, 텔레그램에서는 성착취가 여전히 실시간으로 벌어졌다. 매일 되뇌었다. ‘도대체 끝은 어디일까……‘ - P66

한 번 유포된 불법촬영물은 짧게는 며칠, 길게는 몇 년을 돌아다닌다. ‘○○ 여자 화장실 불법촬영‘ 영상이 올라오는 범죄 현장을 보며 ‘나도 불법촬영 피해를 당했을지 모른다‘는 공포감에 사로잡혔다. 폭력으로 가득한 텔레그램 안에서 우리는 너무도 약했다. 우리 역시 성착취 사진과 영상에 장기간 노출된 ‘피해자‘가 되어 있었다. 성착취 범행을 추적하던 당시, 피해자들의 고통은 우리가 감히 가늠할 수 없는 크기였다. 우리 앞에 놓인 눈에 보이지 않는 고통을 없애는 방법은 당장의 범죄 현장을 기록하고 증언하는 일뿐이었다. 그 일이라도 해야만 했다. - P66

N번방 사건(미성년자 성착취)과 딥페이크, 두 디지털 성범죄의 본질이 ‘성착취‘라는 점에서는 같다. 하지만 범죄 형태는 완전히 다르다. 딥페이크는 우리가 텔레그램에서 본 수백 가지 범죄 유형 중 하나일 뿐이다. 법사위는 N번방 방지법을 ‘졸속 처리‘했다는 비판을 받아 마땅하다. 청원의 핵심이 텔레그램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형태의 디지털 성범죄의 ‘근본적인 해결’이었기 때문이다. 국회 청원을 올리고 국민 10만 - P70

명의 동의를 얻기 위해 분투한 리셋, 그리고 함께 싸워온 수많은 여성들이 얼마나 답답할지 짐작이 갔다. - P71

‘기자님들 제발 N 번방 관련 기사 써주세요.‘ ‘그렇지만 기사를 자극적으로 쓰면 2차 피해를 유발할 수 있으니 주의하세요.‘ 우리는 언론에이 두 가지를 함께 주문하고 호소했다. 그런데 박사가 검거된 후 언론은 가해자의 입만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를 악마로 만들어 ‘가해자 서사’를 보도하는 데 혈안이 된 듯 했다. 이런 언론의 태도에 절망했다. 피해자의 안위는 뒷전이었다. - P74

인턴을 하던 시절이었는데 ‘애인이 있으면 뺀질거리기만 하고 일은 안 한다‘는 사수의 말이 계속 귓가에 맴돌았다. 또다른 사람들은 ‘애인이 있는 여성은 가부장제를 공고히 만드는 순진한 여성‘이라고 말했다. 나는 애인이 있다는 사실로 인해서 ‘뭘 모르는‘ ‘각성되지 않은‘ ‘연애하느라 일은 뒷전인‘ 여성이라 불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애인이 없는 척했다. 애인과 물리적 거리를 두었다. 애인은 그런 나를 비난하지 않 - P159

았다. 나에게 새로운 페르소나 혹은 목표가 생겼음을 인정하고 "네가그렇다면 그런 것"이라고 지지해주었다.
‘애인과 거리를 둔 생활을 수개월 반복하던 어느 날, 데이트를 하던 도중에 매서운 파도가 나를 향해 돌진하는 기분을 느꼈다. ‘너는 페미니즘 운동을 할 자격이 없다‘며 누군가 나를 뭍으로 밀쳐낼 것만 같았다. 두려웠다. ‘독립적이고 당당하고 혼자서도 잘하는 여성‘이라는 새로운 페르소나에 ‘눈치 보는‘이라는 수식어가 더해졌다.
뚜렷한 주관 없이 누군가에게 떠밀리듯 세운 ‘독립적인 나‘라는 목표 때문에 ‘진짜 나‘를 잃어버리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나는 전통적인 ‘여성상‘에서 도망치고 싶어서 그저 청개구리처럼 반대로만 행동한 것이다. 그것이 내가 스스로 선택한 자유라고 믿었다. 지난날이 후회되어 이불을 뻥뻥 차는 날도 있는데, 애인은 "진짜 자기 모습을 찾아가는 과정이었을 뿐"이라며 내 등을 도닥여준다. - P160

"가장 충격적이었던 장면은 뭐였어요?"
가장 많이 받은 질문 중 하나다. 우리는 "모든 장면이 충격적이라서 답할 수 없다"고 답한다. 기자나 작가나 PD는 아직도 뇌리에 남아 있는한 장면만 소개해달라고 한다. 나는 내 기억 저편에 도사린 잔상을 타인의 청에 의해 억지로 꺼낸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오늘은 2020년 8월 7일이다. 텔레그램 대화방에 잠입 취재를 시작한지 약 400일째 되는 날이다. 오늘 하루에만 정확히 마흔한 번 텔레그램 대화방의 잔상이 스쳐지나갔다. 아침 9시에 일어나서 오후 6시까지 의식적으로 세어본 횟수다. 이제 마흔한 번이 더 되는지도 모르겠다. 이 글을 쓰면서도 계속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동안 떠오른 잔상들은 뚜렷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뇌 어딘가에 스며들어 있는 것들이다. 어쩌다 가해자들의 저급한 성희롱과 여성혐오 대화가 떠오르면 여전히 불쾌하다. 할 수만 있다면 머릿속 구석구석을 씻어내고 싶다.
이런 질문을 받고 싶다. 지금 피해자의 일상은 어떤지, 정부에서 피 - P187

해자 보호는 제대로 하고 있는지, 필요한 입법은 무엇인지, 재판부의 솜방망이 판결을 어떻게 하면 바꿀 수 있을지. 앞으로는 생생한 이야기를 꺼내고 싶다.
잔상은, 지난날의 모습일 뿐이다. - P188

당신은 지금 어느 편에 서 있습니까? 가해자 연대를 부수어 나가는 첫걸음은 더는 피해 영상물 유포를 묵인하거나 방관하지 않는 것입니다. 성범죄 피해자에게 부끄러움의 몫을 전가하는 이가 아닌 가해자 연대에 수치의 책임을 부여하고 가해 - P195

자 연대를 폭로해나가고 고발하는 것입니다." - P196

이한 인터뷰에서 피디가 우리에게 N번방을 취재하는 과정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질문했다. 질문을 듣자마자 그간의 일이 한꺼번에 떠오르면서, 힘겹게 붙들고 있던 이성의 끈을 놓쳐버리고 말았다. 눈에서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나왔다. 어떻게든 참겠다고 천장만 바라보는데, 눈 앞이 계속 흐려졌다. 단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끅끅 흐느끼며 인터뷰를 마쳤다.
피해 사실을 증언해야 한다는 압박과, N번방 관련 증거를 수집하며 생긴 트라우마는 생각보다 강렬했다. 인터뷰를 진행할수록 머리가 지끈거렸다. 비슷한 질문에 비슷한 답변을 하는데도, 하면 할수록 괴로웠다. 마음 같아선 남은 일정을 취소하고 싶었지만, 인터뷰를 통해 보다 많은 사람에게 사실을 알리고자 하는 마음으로 고통스런 시간을 견뎌냈다.
누구보다 언론 보도를 갈망했지만 거절해야만 했던 인터뷰도 있었다. 한 시사 교양 프로그램이었다. 제작진은 네 시간에 걸친 인터뷰를 요청하며 우리를 주인공으로 삼고 싶다고 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사태를 알리는 것뿐인데요. 주인공은 아닌 것 같습니다." 조심스레 - P199

거부했다. 그들은 대안으로 "디지털장의사를 섭외해놨으니 같이 범인들을 추적해나가는 영상을 찍어달라"고 말했다. 우리는 그런 사람과 함께 범인을 추적한 적이 없었다. 사실과 다른 내용이었다. 제안을 거절하자 돌아온 작가의 답변에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해주셔야 하는데요."
목요일 밤 생방송 인터뷰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받은전화였다. 언론사의 인터뷰 요청을 다 받아들이고, 그들이 원하는 사진 자료(피해 사진 제외)를 제공해왔다. 당장 프로그램을 내보내야 하는 사람들 심정을 이해하지 못할 바 아니지만, 이 사건이 방송 시간을 채우는 용도로 쓰이는 일은 원치 않았다. 결국 단과 상의 후 그쪽 촬영은 거절하겠다는 의사를 확실하게 밝혔다.
인터뷰를 거절했다는 사실에 마음이 불편했지만, 잠시나마 쉴 수 있어서 다행스럽기도 했다. 일주일 내내 밥 먹을 시간조차 없었기에 휴식이 무엇보다 귀중했다. 우리는 바로 병원을 찾았다. 여기저기서 심리 상담을 받아야 하는 게 아니냐고 물었을 때 늘 "괜찮아요"라며 답변했지만 사실 괜찮지 못했던 것이다. - P200

생각해보면 불과 나는 ‘처음‘을 참 많이도 겪었다. N번방에 잠입 취재를 한 것도, 대학생 기자로 주목받으면서 언론사 인터뷰를 다닌 것도 익명으로 사회운동을 한 것도 다 처음이었다. 처음이었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잘해왔다. 그렇다고 믿었다. 우리는 종종 추적단 불꽃이 두 명이라서 다행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불이 혼자서 울고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고작해야 위로가 전부였다. 목이 탔다. 침을 삼키는데 눈물 맛이 났다.
그날, 불을 혼자 자취방으로 돌려보낼 수가 없어서 숙소를 잡았다. 숙소에서도 내내 그 생각만 했다. 불을 따라온 아줌마를 잡았다면, 경찰이 나보다 빨리 도착했더라면, 우리가 언론에 인터뷰하러 다니지 않았다면.
우리는 취재하며 생긴 트라우마를 서로에게 터놓고 얘기하지는 않았다. 각자의 경험을 이야기하면 상대에게 부담이 될까 걱정스러웠다. 병원에서도 개별 상담을 받았기 때문에 서로 어떤 트라우마에 시달리는지 알지 못했다. 그저 ‘내가 아픈 만큼 친구도 아프겠지?‘ 하고 짐작할 뿐이었다. 불에게 나의 경험을 말하면서 너는 그때 어떤 심정이었냐고 물으면, 불은 제 얼굴에서 표정을 싹 지웠다. 시종일관 무표정을 유지했다. 간혹 입술을 삐죽일 때도 있었다. 답하기 곤란한 모양이라고 - P207

생각했다. 기자들도 나와 같은 질문을 종종 해왔다. 그때 불이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떠올려봤다. 고개를 치켜들고 입술을 잘근잘근 씹고 있었다. 그때 불은 그랬다.
불은 다른 사람에게 ○○역에서 자신이 겪은 일을 증언할 때면 표정이 굳어버렸다. 눈꼬리와 입꼬리가 잘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목소리만은 단단했다. 불은 자신의 의견과 생각을 정확하게 전달하려 노력하는 편이었고, 그런 불을 볼 때마다 ‘든든한 기운‘이 온몸을 감싸는 느낌이 들었다.
버텨주는 불이 고마웠다. 6월 말에 임상 치료 선생님에게 집단 상담의 효과를 들은 뒤에야 우리가 겪은 일을 자세히 이야기해볼 수 있었다. 우리는 같은 종류의 명상을 하고 감회를 나누면서 돌아보기 싫었던 일들을 그저 기억의 일부로 수용하게 되었다. 각자 느낀 고통을 말하고 듣는 행위를 반복함으로써 마음의 상처가 치유되기 시작했다. 우리는 각자의 명상 취향도 공유했는데, 불은 ‘산 명상‘을, 나는 ‘종소리 명상‘을 좋아했다.
7월 무렵에 심리 상담이 끝났다. 요즘도 불의 상태가 어떤지 궁금하지만, 본인이 먼저 말을 꺼내기 전까지는 보채지 않을 생각이다. 사람마다 고통을 받아들이는 속도가 다르고, 지금 당장 괜찮아도 내일은 아닐 수도 있으니까. 나도 그렇다. - P208

"물론 가해자가 엄청 잘못한 거지만 피해를 입은 애들도 조금은 잘못이 있는 거 아니냐?"
"그게 무슨 말이야? 아빠가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 이건 전적으로 가해자들이 잘못한 거야. 왜 피해자에게 책임을 물어?" 나도 모르게 아빠에게 소리를 질렀다. "그게 아니고, 불아……"
이상 아무 말도 듣고 싶지 않았다. 나는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우리 증언을 듣는 이들 모두 무엇이 문제인지 알아차리고 공감해주길 바랐다. 당연히 그럴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빠조차 납득시키지 못한 내가 어떻게 세상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을까. 좌절감이 밀려 - P210

들었다. 방에 들어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엉엉 울었다. - P211

그러자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이어졌다. 아빠도 태어나서 처음 하는 걱정을 하는 중이었다. "그놈들은 잃을 게 없다. 어른들도 당하는데 너 - P213

희가 여자이고 어린 걸 알면 가만두지 않을 거다. 지금이야 괜찮아 보여도 나중에 형을 살고 나와서 보복할 수 있다" 같은 말들이었다. 나도 걱정하고 있었지만 입 밖에 꺼낸 적은 없는데, 아빠 말을 들으니 돌연ㅊ뼈를 맞은 기분이 들었다. 점점 감정이 격해졌다. - P214

예전처럼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갈 수는 없을 것 같다. 가끔 과거가 그리울 때도 있지만 후회는 없다. 내 일상이 변한 대신 사회도 변했으니까. 지난 5월, 일명 ‘N번방 방지법‘이 제정됐고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형량은 이전보다 훨씬 높아졌다. 사회에 일어나는 크고 작은 변화를 바 - P216

라보면 내가 가치 있는 일을 했구나 싶어서 뿌듯하다. 물론 아직 갈 길은 멀지만 변화의 바람은 분명 불고 있다. - P217

언젠가 공영방송 라디오에서 아빠 연배의 남성 진행자가 우리 두 사람을 걱정하는 말을 했다. ‘아마추어, 어린 여자 대학생은 손을 떼고 기성 언론이 이어 받아 취재해야 할 것‘이라는 뜻이 내포된 말이었다. 불은 어이없어 했고, 나는 욕을 했다. 그동안 N번방 취재를 해달라고 제보할 때는 조용하다가, 격려라며 하는 말이 손을 떼라니. 기가 찼다. N번방 가해자들은 주로 어린 여자를 노렸으니, 추적단 불꽃도 상대적으로 어린 여자라는 이유로 걱정할 수는 있다. 그런 마음은 이해한다. 하지만 사족은 붙이지 않으면 좋겠다. "우리는 기자로서 할 일을 한 것입니다.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취재하지 못해서 아쉬울 따름입니다. 나이와 성별은 조금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혹시 ‘추적단 불꽃‘은 몇 분이세요? 두 명이요? 그것도 둘 다 여자분? 그렇다면 더 훌륭하시네요."
우리에게 무언가를 요청하기 위해 연락한 분이 건넨 첫인사였다. 그는 우리가 여자라서 ‘더‘ 대단하다고 말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않는다. 디지털 성범죄 척결을 고민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결국 - P227

‘추적단 불꽃‘으로 활동했을 것이다. 여자건 남자건 상관없는 일이다. 어려움에 처한 피해자를 그저 바라보고만 있기란 불가능하다. 적어도 우리는 그랬다. - P228

언론은 ‘조주빈은 악마‘라는 등 가해자 서사를 늘어놓았다. 또 비슷한 시기에 검거된 가해자들의 가정사와 학업 성적, 장래 희망에 주목했다. 가해자가 범죄를 저지른 이유를 줄줄이 늘어놓고는 피해자가 ‘일탈계‘를 했다더라, 먼저 신체 노출을 했다더라며 가해자 중심의 보도를 했다. 피해자가 원인을 제공했다고 서술한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피해자 인터뷰가 어려워 그들의 입장을 알 수 없기 때문이라면서. 언론이 ‘피해자도 잘못이 있다‘와 같은 여론을 조장한 것이다. 이에 언론 권력을 견제하고 감시하는 시민단체인 민주언론시민연합에서 ‘가해자에게 면죄부 주고 피해자에게 책임 전가하는 보도를 지양하라‘는 긴급논평을 내며 과열된 보도의 문제점을 꼬집기도 했다.
다수 언론은 텔레그램에서 디지털 성착취가 일어나고 있을 때 취재를 하지 않았으니, 관련 ‘범죄현장 잠입 르포‘나 ‘피해자 보호 대책 점검‘ 같이 사회에 꼭 필요한 취재와 보도는 할 수 없었다. 언론은 ‘주요 가해자가 잡히고 국민의 관심이 조주빈에게 쏠렸을 때 우선 그가 누구인지를 자세히 밝혀야 국민의 눈높이에 맞게 디지털 성범죄를 보도할 수 있다‘고 반박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언론에게 부족했던 것은 정확한 보도 시점이 아니라, 윤리 의식이었다. - P236

우리는 목격자이자 피해자였다. 사건을 해결해야 한다는 마음이 너무 강한 탓인지 각성상태가 지속됐다. 수집한 자료의 대사 한마디 한마디가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재생됐다. 덕분에 기자가 ‘가해자가 이런 말을 했다던데, 자료가 있나요?‘ 하고 물으면 ‘그 대화는 다른 맥락에서 나온 겁니다. 자료도 함께 보내드릴게요‘라는 식으로 빠르게 답할 수 있었다. 우리의 뇌에 앨범 기능이라도 있는 모양이었다. 우리 머릿속에는 캡처한 사진과 사진의 맥락을 둘러싼 기억들이 여전히 생생했다. 깜깜한 가해 현장에서 멈췄던 우리의 시간이 햇빛을 받아 흐르기 시작하고 두 다리와 마음은 달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 P238

차분히 취재팀에게 피해 사실을 털어놓던 K씨는 텔레그램 방 성착취 기사에 대한 불만도 드러냈습니다. 본인의 피해를 단순히 ‘착취‘라는 단어로 표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착취가 아니었어요. 그건……이대로 안 하면 나를 죽일 것만 같은? 나를 찾아올 것만 같은? 그런…… 그런 게 전혀 (기사엔) 없더라고요. 그러니까 사람들은 그냥 ‘고수익 알바‘ 이 단어들만 보고 ‘피해자들도 이상한 거 아니야?‘라고 생각하는 거죠. 시작은 그랬을 수 있죠. 저도 바보 같다고 생각도 해요. 근데 솔직히 아르바이트 모집 사이트만 들어가도, ‘룸 술집 알바 구한다‘ 이런 글 많잖아요. 저는 그냥 그런 일이라고 생각했던 거예요." - P244

그런데 K씨에게 가장 힘들었던 기억은 대화방에 올라온 자신의 사진을 보거나, 협박을 당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K씨는 경찰에 신고를 한 이후에도, 자신의 사진이 텔레그램 방에 유출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 앞에서 말했듯이 ‘박사 자료 모음‘ ‘박사 샘플 공유방‘에 들어가 일반 이용자인 양하며 지켜봤습니다.
"어느 날 대화방 관리자가 ‘저녁 시간이고 날씨도 좋은데, 저희 투표 한번 할까요?‘ 그러더니 저랑 다른 피해자 세 분의 이름을 보내면서 ‘네 명 중 제일 많은 표를 얻은 사람의 자료를 뿌려주겠다‘고 하는 거예요. 제가 2등을 했어요. 그런데 이게 너무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제가……"
다른 피해자의 자료가 공유되는 현실을 보면서도 안도하는 자신의 모습이,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 가장 고통스러웠다고 K씨는 털어놨습니다.
"대화방의 대표 사진이 제 사진이었어요. 사진이 바뀌던 날도 저는 안도하고 있는 거죠. 저보다 훨씬 어려 보이는 여자애 얼굴로 바뀌었는데, 제가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대화방에 있는 사람들을 원망하고 있는 게 아니라, 그냥 빨리 내 차례가 끝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 P245

피해자는 "(물질적 · 정신적) 보상보다는 갓갓이 영상을 가지고 있지 않기만을 바라고 있어요"라고 말했다. 우리가 만나본 피해자들의 바람은 한결같았다. ‘영상 영구 삭제.‘ - P272

‘스토킹방지법만 있었어도……‘라는 탄식이 나온다. 1999년, 처음으로 스토킹방지법이 국회에 상정됐지만 통과되지 않고 있다. 2018년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는 "스토킹은 행위 유형이 다양하고 단순한 애정 표현이나 구애와 구분하기 어려우며, 심각한 스토킹은 형법상 폭행죄, 협박죄 등으로 처벌할 수 있어 별도 법률을 신중해야 한다"고 입장을 표명했다. ‘단순한 애정 표현과 구애‘의 주체는 ‘가해자‘다. 가해자의 입장이 반영된 해석이다. 피해자가 상대방의 행동에 두려움을 느낀다면 스토킹이 분명한데도, 여전히 국회의원 다수는 남성주의적인 시각에서 범죄를 바라보는 것이다. - P275

우리가 직접 어플을 깔고 실태를 확인해본 결과, 채팅 상황은 몇 년 전과 다를 바 없었다. 상대방은 여전히 "열다섯 살이면 좋지." "아다야?(한 번도 성관계를 맺어보지 않았냐는 의미다)" 같은 말을 늘어놓고 있었다. 이런 상황을 막기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함정수사‘다. 함정수사는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되는데, 단순히 범행 기회를 제공하는 ‘기회제공형‘, 범행 동기나 범행 의도가 없던 사람에게 범행 의도를 갖게 하는 ‘범의유발형‘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제한적으로 허용되는 수사는 기회제공형이다.
예를 들면, 경찰이 만취한 척 길거리에 쓰러져 있다가 지갑을 훔치도록 유도하거나 경찰이 인터넷에 올린 살인청부 위장 광고를 보고 살인청부를 의뢰하는 것은 기회제공형이다. 또 경찰이 휴대전화를 길거리에 일부러 떨어뜨리고 지켜보다가 누군가 주워 우체국이나 지구대에 가져다주려 하면 그를 설득해 자신에게 팔라고 꼬드기는 것이 범의유발형이다. 문제는 현실에서 일어나는 범죄가 예시처럼 간단하지 않다는 것이다. 시간이 갈수록 범죄 수법은 진화한다. 현재 제한적으로 허용되는 ‘기회제공형‘만으로는, 범죄 수법의 변화에 제대로 대처하고 범인을 검거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 P279

이미 많은 국가에서 디지털 성범죄와 관련해 함정수사를 허용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여전히 논란이 거세다. 함정수사로 범인을 검거해 기소한 경우, 공소 제기 절차가 적법하지 않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아동 · 청소년이 "15세 여자, 잘 곳 구해요"라고 대화창에 올려 놓았다고 하자. 그러면 이는 ‘범의‘(범죄임을 알고도 해당 행위를 하려는 의사)를 유발하기 때문에 불법이다. 평범한 사람에게 범의를 유발했다는 것이다. 현재 대한민국 법은 성인이 아이에게 불온한 마음을 품는 것을 선제적으로 문제 삼지 않는다는 뜻이다. 현재 정책은 피해가 발생할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 P280

그동안에도 정말 많은 일이 일어났다. 위력형 성범죄가 반복되고, 웰컴 투 비디오 손정우의 미국 송환이 거부되고, 고등학교 교사가 불법촬영을 저질렀다. 한국 여성으로 살아가는 게 버겁게 느껴지는 일주일도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살아 있다. 이 땅에서 살아남아, 외치고 있다. 각자의 자리에서 함께 연대하며 움직이는 이들이 있기에 내일을 그릴 수 있는 것이다. 추적단 불꽃은 성범죄 피해자의 고발을 지지한다. 그들의 고통은 우리의 몸을 통과해 심장을 건드렸다. 피해자의 상처가 나의 고통으로 바뀌어 발화하는 순간, 뜨거운 용암이 심장에서 솟구친다.
우리가 써내려간 지난 1년간의 기록이, 함께 공감하고 분노하는 여성들의 발자취로 이어지길 바란다. - P2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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