홋카이도에서 살아남기
-2018.08.29~2018.08.30 삿포로-

열망은 어디에서 오는가? 무심하게 넘기는 책장의 한쪽 사진 혹은 들어본 적 없는 가보지 못한 곳의 지명. 우연적이며 찰나적인 것들이 머리와 마음 속에 박히면서 불꽃을 만드는 심지가 되어 열망으로 부채질한다. 순간의 열망은 삶을 열정으로 만들고 어떤 열정이 마무리 되는 시기에 낭만이 남게 된다. 고로 열정과 낭만을 위해서 나는 열망을 더욱 부채질해 보고 싶었다. 홋카이도의 열망은 이년 전 그렇게 시작되었다.

열망은 나를 삿포로에 먼저 데려다놓았다. 치바현의 뜨거운 여름바람 대신 대지의 시원한 저녁바람이 세상 모든 더위와 때를 씻겨주니 이곳의 셈법으로 열살인 여자아이와 세살인 남자아이는 고된 육아의 대상에서 벗어나 든든한 여행의 동반자로 변모한다. 신선한 재료의 음식천국인 곳에서 30% 마감세일에 서너번 사먹으며 입맛다시던 북해도육우 스테이크에 사치를 부리니 첫발을 디딘 삿포로에서 우린 호화로운 여행자가 되어본다.

최고의 여행지는 최상의 조건을 갖추어서가 아니라 최상의 가치를 찾는 여행자의 마음과 태도이니 보고 듣고 만나는 모든 것들에 여유와 관용으로 대한다. 그러다보면 내가 발길 하는 곳곳마다 최고의 공간과 시간이 될 터이다. 삿포로 뷰 호텔은 눈축제로 유명한 오도리공원에서 아주 가까웠다. 삿포로역에서 내려 붉은 벽돌의 옛 홋카이도청을 지나면 오도리공원이 길게 펼쳐지니 삿포로 시내 도보산책이 여유롭다.

느즈막하게 눈을 뜨고 삿포로역으로 향하던 도중에 홋카이도대학식물원에 들렀다. 오래 살고 있는 나무들의, 올해 돋아 무성해진 나뭇잎들이 흐린 하늘에 더욱 짙은 초록으로 빛나고있다. 나무는 경외의 대상이다. 인간이 범접하지 못한 역사를 일구워왔음에도 겸손하다. 겸손하면서도 빛나고 빛나면서도 조용하다. 나무들이 무구한 미래를 살 수 있으려면 인간이 겸손해야 한다. 우리가 그럴 수 있을까?

백년을 훨씬 넘긴 붉은 벽돌 구 홋카이도청 주변을 걷는다. 짐짓 부모는 자식에게 여행을 와서도 가르치려 든다.
“저 홋카이도도청은 서양문물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메이지시대에 지어진 건물이야. 예전에 요코하마가서 아카렌카 봤지? 그와 비슷한 건물이야. 저 건물은 1888년에 지어진 건물이래.”
“어떤 일을 하던 곳인데?”
“옛날에 왕이 나라를 다스리던 메이지시대에 왕이 직접 지방을 다스릴 수 없으니 지방 곳곳에 그 지역의 일을 맡아 할 수 있는 도청을 설치했어. 아산 시청처럼.”
“그럼, 저기서 일한 사람들은 공무원인거네.”
얄팍하지만 모녀간의 역사공부여행은 나름 의의가 있다.

홋카이도청 앞 공원에서는 한 청년의 묘기가 펼쳐지고 있었다. 마지막은 동그란 원통에 올라가 우뚝 서는 장면으로 마무리되었고 자연스럽게 관객에게 모자를 뒤집어 공연료를 받고 있다. 천엔짜리 지폐가 검은모자의 안쪽으로 종종 떨어지고 있다. 얼마전 야치마타 마을 축제에서 풍선불어주던 남자도 생각해본다. 긴 풍선으로 강아지와 미키마우스를 만들어주면서 남자는 500엔에서부터 1000엔을 지불하시면 된다고 말했다. 자신의 풍선묘기에 대한 댓가로 나름의 하한가와 상한가를 설정한 당당함. 금액을 책정하고 관객을 바라보던 남자와 눈이 마주친 나는, 내가 더 무안해졌다.

무안하다고 생각한 순간 나는 부끄러웠다. 풍선만 불어도 사는 삶, 길쭉한 풍선을 잘 비틀고 꼬아서 다양한 캐릭터를 만들어도 돈을 벌 수 있는 사람에 대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자신을 돌아본다. 번듯한 직장과 매달 지급되는 월급, 없는 돈 끌여다가 개처럼 일해도 고정적이지 못한 자영업의 소득과 시기적절한 투자로 기하학적으로 얻는 자산, 한몫 잡아 획득되는 불로소득. 그런 것만이 일이요, 직업이며 그래야 벌리는 돈에 매달려 사는 사람들. 돈이 돈을 부르는 경제관념에서 난 좀 얼떨떨해야했다.

에노시마 전망대 앞에서는 한 청년이 포크를 구부리면서 많은 사람들의 탄성을 자아내며 살고 있고 나리타 오모테산도에선 원숭이에게 장대 올라타기 묘기를 부리며 웃음을 선사하고 있었다. 야치마타 마을 축제에 다녀간 풍선 부는 남자는 세상의 어디쯤에서 오늘도 풍선을 불어 비틀고 꼬아 귀여운 캐릭터를 창조해 아이들에게 감탄을 선물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 살아가는 이들을 어찌 내 가벼운 입으로 쉽게 말할 것인가?

“엄마, 저기 올라가면 무섭지 않을까?”
“ 저 오빠는 원통에 올라가 묘기를 부리면 사는 게 즐거운 거야. 즐거우면 열심히 하게 되고 열심히 연습하면 무섭지 않아. 너도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하잖아? 그럼 열심히 그리는 연습을 해봐. 누군가 너에게 그림을 잘 그린다고, 알아주지 않아도 공원에서 아이들에게 그림을 그려주며 사는 게 행복하다면 그렇게 사는거야. 얼마전 풍선 부는 아저씨 기억나지? 그처럼 당당하게 즐기면 돼. 중요한 건 네가 즐거워할 수 있는 일이여야해. 즐거우면 열심히 하거든. 지난번에 이온몰에서 바닥 청소를 무릎꿇고 하던 아저씨 기억나? 청소하는 일이 힘들다고 대충하는게 아니라 정성들여 했잖아. 그건 존경받아야할 태도야. 무슨 일을 하든 즐거운 마음이면 열심히 할 수 있거든. 너에게 즐거운 일이 무엇인지 찾기 위해 많은 경험이 필요하고 그래서 우리가 하는 여행에 네가 집중해야 하는거야.”
“엄마랑 이렇게 대화하니까 좋다.”
“엄마도 네가 엄마말을 들어주고, 알아듣고 이해해줘서 좋다.”

아이들과의 삿포로 아침산책이 허기를 앞당겼다. 삿포로역안의 일식집에서 정식을 주문했다. 고급진 레스토랑이 아니어도 음식을 대하는 이의 마음이 즐거우니 어디를 가더라도 적절한 허기와 적당한 호의가 양념이 되어 먹는 것마다 기쁨의 맛이다. 아이들의 즐거운 웃음소리가 요리의 마지막, 환상의 소스로 뿌려진다. 사랑하는 이들과 같이 먹으니 오늘도 성찬. 행복한 성찬은 가난한 여행자 배를 가득 채운다.

“네가 먹는 것이 너를 말하리라.”던 그리스의 자유인, 조르바에게 내가 답한다. “내가 먹는 것은 기쁨이요. 기쁨으로 과식하니 살이 나를 말하리라.” 하여 살로부터 자유롭기를 갈망하는 자는 뚜벅이를 자처하며 또 떠나간다. 육신의 자유를 위해 걷고 걷는 여행에서 육신은 지칠지언정 정신의 자유는 배가 되리라. 조르바의 여정을 조르바 발꿈치 때만큼 알게 된 것 같았다. 조르바가 자처했던 석탄사업처럼 홋카이도의 산업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오타루로 향한다. 내일은 다시 삿포로에 돌아올 예정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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