곱씹는 여행기
-김영하[내가 잃어버린 것을 기억하라] 그리고 여행자의 무지-

“도시에 대한 무지, 그것이야말로 여행자가 가진 특권이다. 그것을 깨달은 후로는 나는 어느 도시에 가든 그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말을 신뢰하지 않게 되었다. 그들은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기 앎에 ‘갇혀’있다. 이런 깨달음을 내가 살고 있는 도시에도 적용해보면 어떨까? 갇힌 앎을 버리고 자기가 살고 있는 도시로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김영하-[여행자의 도쿄]

김영하 작가의 이 문단을 나는 이렇게 변형해본다. 어느 것에 대한 무지가 그 어느 것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관점을 형성해준다는 걸. 여행지에 대한 무지는 불안함과 두려움을 증폭시키기도 하지만 낯선 곳에 대한 자신만의 느낌과 기억을 더 강하게 할 수 있다는 말로.

남편은 약간은 자부심에 넘쳐 말했다.
“아마, 아마노하시다테에 온 한국인은 우리가 처음아닐까?”
그건 실로 무지였다. 동쪽의 시작점인 치온지(智恩寺) 절을 지나 3.5km를 달려 아나노하시다테의 북쪽인 카사마츠(笠松)공원에서 케이블 카를 타는 동안 고국의 여행자들을 서너팀 목격할 수 있었다. 심지어 이십대 정도의 한국 오빠들은, 모국어로 시끄럽게 떠들어며 모래사장에서 쉬고 있는 우리 아이들 뒤로 푸르게 펼쳐진 바다와 산의 모습을 찍기도 했었다. 오빠들의 모국어 소리를 듣고 열두살 아이가 하는 말.
“저 오빠들 쿄토에서도 봤었는데.”
“그럴리가!?”
“진짜야. 저 오빠 둘이 교토에서도 연한갈색 바지에 검정티 입은 모습을 청수사에서 내려오면서 본 거 기억한다고!”

연한 갈색 면바지에 검정 반팔 티를 입은 남자가 어디 한 명뿐이겠냐만은 교토 기온마치거리를 걷기 시작하면서 스치게 되는 한국사름들이 몇팀인지 세어보겠다며 경치를 감상하고 문문을 익히기보다는 한국사람 숫자 세기에 바빴던 아이는 13번째까지 한국 관광을 세기에 그만하고 다시 못 올 이 곳의 정취를 좀 누려보라며 다그쳣던 엊그제였으니 어느정도는 사실가능성이 농후했다. 음, 어떤 이의 블로그 혹은 어떤이의 기억 속에 ‘낯선 여행지서 두 번이나 지나친 사람들’이란 문장은 때로 낭만적인 필연성을 부여하며 이곳에 발길했던 동족을 가벼이 여기지 않게 한다.
심지어 일본인이 쓴 카사마츠(笠松) 한국어안내문에는 서로 사랑을 했던 한쌍의 신들에 관한 전설로부터 사랑의 파워를 이끌어내줄 파워엽서를 띄워보는 것이 어떻겠냐 적혀있으니 아마노하시다테에 발을 디뎠다 간 한국 사람들은 많았을거란 건 기정사실.

처음 와 본 곳에 최초의 한국 사람은 되지 못했어도 내 생애 최초로 싱글 리프트 체어를 탔다는 기록은 남길 수 있게되었다. 매번 느닷없이, 혹은 준비없이 생의 첫경험들을 하게 된다. 최초라는 설렘은 살아가면서 복기되고 복기될 때마다 의미를 얻게되어 ‘첫’이라는 영광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대관람차도 그랬고 싱글리프트체어도 그랬다. 막상 타고나니 겁이났지만 멀리 소나무가 5000그루인가 8000그루인가가 심어있다고 논쟁이 되며 용의 모습을 닮았다는 해변길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인간사의 오만가지 감정들은 미물의 덧없이 지나갈 허물에 불과할 뿐이란 달관의 경지에 오른다.

“먹고살려면 뭘 하는 게 좋을까?라고 생각하는 게 우리라면 ‘내가 좋아하는 걸 계속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라고 생각하는 게 도쿄의 젊은이들 같다.”라던 김영하작가의 문장을 떠올린다. 늘 먹고 사는 일이 걱정이다. 먹고 살기 위해 벌어야 하고 모으는 것도 없이 쓰기 바쁜 일상의 되풀이. 떠나와서도 마찬가지이다. 남들도 다 하고 있을 문제들로 해방이 된 것은 아니다. 다만 그 고민들을 지연시키고 있을 뿐. 고민의 시기가 잠시 지연된다고해서 내 인생의 경주에서 완전히 뒤쳐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어차피 삶이라는 장거리 주행에서 달리고 있는 사람은 나뿐이다. 누구를 이기기 위해, 혹은 누구에게 지지 않기 위해 달리기 시작한 것도 아니다.

잠시 먹고 살기 위해 버는 일 대신 내가 좋아하는 걸 생각해보려한다. 좋아하는 것을 알아내야 계속할 방법을 생각할 수 있으니까. 어쩌면 이 말은 여행자에게도 상통한다. 더 잘 먹고 살려면 뭘 하는게 나을지를 고민하기 위해 좋아하는 걸 계속하며 강구해보는 것은 어떨지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 여행이지 않을까?
그러니 먹고 사는 문제는 결국 내가 더 좋아하는 것을 내일도, 계속하면서 생각해보기로 한다. 그런 여유를 가질 수 있게 된 이 낯선 곳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이번이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여행지를 구석구석 자세히 느껴보기 위해 쿄탄고반도(京丹後半島)를 달렸다. 반도는 사랑이다. 한반도도 그렇고 태안반도도 그렇고 쿄탄도반도도 그렇다. 나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반도와 나와의 긴밀한 관계를 되새기다 보면 그 답을 얻을 수 있을까?

김영하 작가의 [네가 잃어버린 것을 기억하라]의 한 구절을 생각해낸다.

“맞아.아무것도 계획하지 않고 그냥 닥치는 대로 살아가는 거야.”
“가이드북 보니까 이탈리아에 이런 속담이 있대. 사랑은 무엇이나 가능하게 한다. 돈은 모든 것을 이긴다. 시간은 모든 것을 먹어치운다. 그리고 죽음이 모든 것을 끝장낸다.”
“갑자기 뜬금없이 웬 속담?”
아내가 짐짓 딴지를 걸어왔다.
“그러니까 여행을 해야 된다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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