곱씹는 여행기
-김연수의 [여행할 권리], 오직 여행할 권리만이-

“누구나 한번쯤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이 왜 여기에 있는지 말해야만 할 때가 올 것이다. 요령은 간단하다. 지금은 호시절이고 모두 영웅호걸 절세가인이며 우리는 꽃보다 아름답게 만나게 됐다. 의심하지 말자”라며 [지지않는다는 말]을 했던 김연수 작가.

그의 여러 문장들이 미야즈( 宮津)의 하늘 위에 둥둥 떠다니는 늦은 오후. 리조트 내의 노천수영장을 즐기기로 했다. 고백하건데 나는 물에 대한 공포가 있다. 열 한살까지 집 앞 바다에서 개헤엄을 친 기억은 있지만 언제부터인가 물은 공포의 대상이 되어 나의 수영에 대한 포부를 매번 억누르고 있었다. 두려움이 있음에도 수영에 도전하는 이유는 어쩌면 그 두려움에 맞서기 위함일 것이었다. 일본에 와서 정기권을 발급받아 수영장을 다니고 있지만 독학의 한계로 인해 배영을 하려면 보드없이는 불가능했다.

인생이 우연의 연속이라는 말은 나의 경우도 그렇다. 아니라면
생존의 문제이기에 본능이 먼저 알아차리는 것인가? 그게 우연이든 본능적이든 수심1.1M 풀에서 튜브없이 누워 떴다. 입수 전에 물에 대한 두려움에 대해 생각할 겨를이 없어서일까? 내 몸은 수면에서 유유히 흘러다녔다. 두려울 것이 없는 물이 되는 순간, 접영도 가능할 것 같아 맹연습을 시도했다. 내게는 보이지 않는 내 접영 자세는 그저 환상적일 거라는 추측뿐. 폼이야 어떻든 튜브없이 뜨는 배영과 그 자신감으로 한 단계 더 업스레드 되고픈 의욕에 접영연습까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럽다.

물론 다른 문제는 있다. 과연, 수심1.6M의 수영장에서도 배영을 할 수 있게 될 것인가? 자주 다니던 한국의 수영장 수심은 여기보다 깊었다. 그 고민은 나중으로 미루기로 한다. 어쨌든 나는 여기에 있고 배영을 하고 있다.는 사실만이 중요할 뿐이다. 아, 한가지 더 있구나! 어떤 수영자세든 호흡은 아직 불안정하다. 이건 아마도 호흡시 입을 벌리는 순간 수영장 물을 다 마시게 될 것같은 불안함때문일 것이다. 이 불안함도 뜻하지 않은, 어느날 갑자기 극복되는 우연이 찾아오길 바랄 뿐이다.

자기의 한계를 극복한 이들의 눈에 세상은 아름다워 보이는 걸까? 온갖 저녁의 빛을 머금고 있는 수평선은 바다로 더 가까이 오라고 손짓한다. 이 곳에 긴 소나무 모래밭이 펼쳐져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일단, 걷기로 했다. 발걸음을 맞춰 걷는다. 오랜만에 내 발걸음이 느려진다. 누가 재촉하지 않았는데 일상은 우리를 서두르게 했다. 서두르는데도 그 서두룸이 나를 혼자 걷게 했다. 혼자서 걷고 있는 불안함에 더 조급해지게 됐고 그 조급함이 내 발걸음을 서툴게 했으니 종종 내 발에 걸려 내가 넘어졌다. 넘어지기는 누구나 한다. 넘어지고 무너졌을 때 다시 일어서 씩씩하게 걷는 사람은 드물다. 상황을 탓하고 나를 원망하다 삶을 부정한다. 그렇게 홀로 남아 외로워지기를 몇 번. 넘어졌다는 사실에 집착하기 보다 다시 일어나는 방법에 몰두하기로 했다. 일상을 지연시키고 낯선 곳에서 잠깐의 터전을 잡기로 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급할 때는 잠시 멈춰서 호흡을 고른다. 넘어졌을 때는 털고 일어나 다시, 걷는다.

옆에 있는 이들과 속도를 같이 하여 느긋하게 걷는 중에 아마노하시다테(天橋,) 하늘로 연결되는 통로라 불릴만큼 일본의 3대 절경이라든지 하는 다리에 관한 안내문은 읽지 못했다. 다른 나라 문자 해독에 까막눈이라 하여도 내 눈 앞에 얼마나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져 있는지는 볼 수 있으니 그저 남아있는 빛에도 빛나는 소나무숲과 석양에 물들어 더욱 깊어지는 바다빛에 경탄을 아끼지 않는다. 3.6Km의 소나무 숲길을 더 앞에 남겨두고 돌아선다. 이른 아침부터 냉동박스에 갇혀있는 오징어들을 시식하고 싶다는 본능이 꿈틀대고 있었다. 본능의 해결 후 이어서 여행을 하기로한다.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가 되고 싶다는 말은 내게 되려 자기 자신이 되고 싶다는 말처럼 들린다. 한번이라도 그런 존재가 될 수있다면 내 인생도 완전히 바뀌어버릴 것이다.”-김연수, [여행할 권리]
살면서 다른 삶과 다른 사람을 꿈꿔보지 않은 이가 누구던가? 내가 아닌 타인을 상상하고 이 삶이 아닌 다른 삶을 가정해 보면서 이곳이 아닌 다른 곳을 찾아 발길하는 여행. 다른 것을 꿈꾼 여행의 결말은 매번 원래의 내 자리로 돌아 오는 일. 그 여행에서 우리는 좀 더 성숙하고, 더욱더 짙어진 내 모습을 얻게 된다. 되려 더 자기다워진 자신의 모습을 하고 도착하는 것이 여행. 나는 오늘도 더 나다운 내모습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그러니 우리에겐 여행할 권리만을 말했던 김연수 작가의 말이 적어도 오늘은 적확하게 맞아 떨어진다. 내일도 아마노하시다테(天橋)를 여행할 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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