곱씹는 여행기
-정혜윤[사생활의 천재들]처럼 맨손어업의 고수들-

“자기 고통이나 행복, 배신, 서글픔을 확대하고 그곳이 주저앉긴 쉬워도 바로 그곳에서 출발해서 자신을 확장시켜나가기는 너무나 어려워, 고통을 통한 확장이 아니라 고통을 통해 축소되는 경우가 더 많을거야.” 정혜윤 작가의 [사생활의 천재들] 문장이다. 카모메 5호에서 카모메에게 새우깡을 던져주는 횟수보다 저들 입에 넣기 바쁘게 먹어삼키던 아이들은 긴 공복에 신경질을 부렸고 그것이 기폭제가 되어 티격태격하고 있으니 좁은 차안에서 나또한 애들에게 화딱거리고 있었다. 그 모든 짜증은 확대되었고 가족은 공복으로 인해 대자연의 경관에 겸허를 다짐하던 좀 전의 모습은 새까맣게 잊고 그저 인생사에 아웅다웅 복닥거리는 축소된 인간으로 전락하고야 말았다.

“일단 눈에 가장 먼저 띄이는 식당으로 들어가자.”
그러는 사이 남자는 언덕을 오르고 있었고 민가와는 멀어지고 있었다.
“민가와 관광객이 있는 곳으로 가야 식당이 있지 않을까.”
결국 차를 돌려 해안가 마을로 들어서는 초입에 お食事処가 보였다. 그러나 주차를 하려던 남자 왈.
“다른데로 가볼까?”
머뭇거림에는 다 이유가 있는 양반이다. 겸양을 가장하여 자신의 불호를 호로 바꾸려는 습관, 본인의 입맛을 맞추기 위해 관용을 위장하여 상대방에게 자신이 선호하는 메뉴를 종용하는 남자. 돌아서야했던 식당은 어류 음식점이었으니 아침부터 회를 먹고 싶지 않았다고 한참이 지난 후 실토한 남편. 그곳에서 발길을 돌리자 식당은 보이지 않았다. 이럴바엔 차라리 구멍가게 컵라면이라도 먹자며 나는 유람선 선착장 가게에 들어갔지만 컵라면 세 개를 다 먹을 수 있겠냐며 남편 왈왈. 매사 반기를 들어보이는 저이의 의도가 의심스러웠지만 그나마 컵라면도 우동 하나, 소바 두 개. 선택의 여지없이 뜨거운 물을 받아 선착장의 돌의자에 앉아 우동을 먹으려는 순간.,아이들마저 소바는 싫다고 우동 먹겠다며 나의 우동을 뺏기 위해 쟁투를 벌이는데..... 차마 더는 그렇게 앉아, 다들 먹기 싫어하는 소바를 먹을 수 없어 차로 돌아와 앉았다. 첫 젓가락질도 못하고 엉망이 된 기분에 컵라면은 음식쓰레기가 되어 바려졌다.

아직 덜배고픈 것이다. 넷이서 아무 말도 없이 숙소로 돌아왔다. 엄마, 아빠의 심리전에 아이들은 풀이 죽어 있었다. 오전의 그토록 아름답던 바닷마을은 순식간에 폭파되고 컵라면 메뉴도 별로 없는 심각한 오지가 되어 있었으며 여행의 신념 어쩌던 나는 별반 다르지 않은 신경질적인 인간으로 돌아왔다. 그러니까 본인이 선호하지 않는 오징어를 새벽댓바람부터 사서 회로 먹겠다는 내 식사메뉴가 별루였단거야? 심사가 꼬이니 과거마저 부정하고 있다. 너무 나갔다. 결국 어디에, 어떻게 있든 내 마음의 방향이 중요하다. 한갓 밥으로 이러는 내가 싫지만 아이들도 징징대면 나는 허물어지고야 만다. 잘 먹지 못해도 잘 놀아야 한다.

마음의 방향을 바꾸려 바닷가를 걸었다. 아이둘이 뒤따라왔다. 엄마가 폭발할까 조심조심 간격을 두고 남매가 손잡고 따라오는 장면을 보고는 더욱 그랬다. 넓게 펼쳐지지 않은 자갈밭에는 고운 모래밭이 있었다. 아이들과 모래놀이도 하고 자갈로 그림도 그리며 놀았다. 밥 따위 몇 끼 좀 굶으면 어때? 아이들과 신나게 놀 수 있는 걸. 마음이 추스려지자 바닷물에 발이라도 담글까 하는데 별안간 혜안의 순간. 바닷물에 잠겨 작은 파도들이 찰랑대는 바위표면에 담치가 보였다. 혹시나 싶어 맨손으로 따보니 까만 껍질을 오므리는 담치들.담치들 옆에는 대수룩 고동도 있다. 어릴 적 서해안 앞바다에서 흔해빠지도록 나서 삶아 빼어 된장찌개 끓이거나 간장에 졸여 일년내내 반찬이 된 대수룩. 그나마 태안반도에서도 요즘은 채취량이 현저하게 줄어든 대수룩.

고래고래 소리지르며 담치와 고동을 보여주려 아이들을 불러모으니 저희들도 잡겠다며 바닷물에 발을 담근다. 쿄토바다까지 왔으면 맨손어업 정도는 즐겨줘야 레포츠와 휴식이 콜라보된 퓨전 트래블이 되지 않겠냐며 남들 다 하는 뻔한 거 말고 남들은 못해 본 어려운 것 해보라고 아이들에게 입수를 허하니 신발이며 옷이며 바닷물에 젖어 으슬으슬할텐데도 신기하게 맨손재취를 즐긴다. 조개껍질에 긁혀 손가락에 상처가 나 피가 흘러나와도 신난 아이들. 정글탐험, 오지체험만큼 다이내믹한 레포츠는 아닐진데 저토록 담치와 대수룩 재취에 열을 올리는 것은 오직 ‘먹을 수 있는 것’이란 엄마의 확언때문만은 아니였겠지? 기승전 먹을 것! 담치는 먹을 수 있다. 대수룩도 먹는 것이다. 오늘 저녁에는 먹을 수 있다. 는 생존욕구! 하늘을 뚫을 것같은 아이들의 기세에도 오후 두 시를 넘은 하늘은 흐려지고 있었다.

숙소 앞의 신선어류 식당에서 갓 식사를 마치고 나온 현지인 가족 두어팀이 한국말로 큰소리 치며 바닷물에서 첨벙대는 우리들이 궁금한지 어슬렁거리는 척 구경하고 있었다. 당신들이 알아듣지 못한 한국말은 이것이었다.
“엄마, 이거 먹을 수 있지?”
“그럼, 대수룩이 얼마나 맛있는데!”
“우와, 많이많이 잡아야지.”
놀이였으면 느긋하게 즐길 수 있다. 생존이 되는 순간 가열차질 수 밖에 없다. 먹고 살아야하는 문제가 될 때 대개의 인간은 즐기는 태도를 잃게 된다. 놀이로 시작해 생존으로 귀결하고 있는 아이들은 타국에서의 맨손재취어업을 가열차게 즐기는 고수라고나 할까?

귀기울여 듣고 마음에 담아 살아가면서 되새기고픈 문장들이 많아서 밑줄을 숱하게 그으며 읽었던 정혜윤 작가의 [사생활의 천재들]들을 곱씹어본다.
-사생활이란 카프카의 말을 다시 빌리자면 우리에게 있는 유일한 일상, 그것이 우리의 유일한 인생을 말한다. 이들은 그런 사생활에서 천재다. 사생활을 보여주는 데서 천재가 아니라 사생활을 살아내는 데서 천재들이다. 그들은 진부하고 시시하지않게 살려고 애쓰는 데서 천재다. 그들은 자기 삶에 던져진 질문에 대한 하나의 대답으로 존재한다. 그들은 자기 삶의 문제에 직면하여 그것을 푸는데, 그것에서 보편성을 보는 것에 있어 천재적이다. 그들은 삶의 태도에서 천재다.-

본인들이 당면해있는 문제를 알고 있고 그에따른 노동을 놀이로 승화할 줄 알며 그것을 즐기면서 더불어 배고픔인 원초적 욕구의 해결과 고차원적으로는 공동체의 화합을 도모하고 있으니 분명 천재가 될 소지가 다분한 사생활의 고수들. 아이들의 일상은 아이들의 유일한 인생이므로 그들의 인생에 있어 다분히 천재적인 아이들로 인해 여행은, 그리고 일상은 애쓰는 인생이 되어야한다. 애를 쓰다보면 노력이 되고 노력은 우리들을 삶의 즐기며 살아가는 이로 변모시킬 터이니 이 아니 즐거울소냐!
하늘이 흐려지자 바닷물도 차가워지고 손수건에도 아이들의 놀이의 결과물이 가득한 어획량을 보이고 있으니 슬슬 숙소로 가서 가스불을 지피고 싶어졌다. 시간은 오후 세 시가 훌쩍 넘었고 숙소에 홀로 있을 남자의 근황이 궁금해지기듀 하였다. 이만하면 됐어. 우리들의 유일한 여행. 그것이 우리의 유일한 인생. 사생활의 고수 두 명을 앞세워 씩씩하게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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