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깍재깍…….
나는 시계소리라고 되뇐다. 제길, 이래도 소용이 없다. 너무 생생해서 도저히 딴생각을 할 수가 없다.
얇은 티셔츠 너머로 전해지는 그녀의 심장이 두근거리고 있는 게 등으로 느껴진다.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더라. 나는 불과 5분 전의 일을 회상하기 위해 온몸의 신경을 뇌로 집중했다.
목덜미로 느껴지는 그녀의 뜨거운 호흡 때문에 제정신이 아니다.
사실 내 분신이라는 녀석은 이미 불끈 솟은 상태. 이성의 끈을 놓지 않기 위해서 나는 읽지도 않은 이슬람의 경전 코란을 만들어서 거꾸로 외울 지경이다.
자정이 훨씬 넘은 시간.
술자리를 같이 하던 다른 선후배들은 결코 멈추지 않는 모노레일을 달리는 전철처럼 3차를 향해 폭주하는 중이라 어느 누구도 그녀의 상태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일단 참가하면 서로에 대한 친화력을 높일 수 있는 게 대학로의 술자리라서 나는 술을 잘 마시지 않으면서도 이런 자리에 끼어든 것을 꽤 좋아하는 편이다.
2차로 마신 술집에서 나온 건 5분 전. 그녀는 뒤를 생각하지 않고 2차에서 너무 과하게 마신 것인지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비틀거렸다. 여자가 혼자 돌아가기에는 늦은 시간이라 생각해서 예의상 바래다준다고 말했지만 그녀는 단호히 거절했다. 혀가 꼬이지 않는 걸로 보아 아무래도 정신은 정상인 거 같아서 나는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더니 그녀는 전봇대에게 택시를 잡아주라고 말하더라.
끝났구나.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인간한계를 봤다. 저게 바로 술이 사람을 잡아먹는 모습이다. 그런데 왜 저리도 예뻐 보이냐? 제길. 단순한 사실이다. 내 머리에 있는 돗자리를 깔고 앉아있는 24년이나 묶은 이성이란 녀석이 홀까닥 그녀에게 넘어가버렸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난 그녀를 업었다. 처음 목표는 대로(大路)까지 나가 택시를 잡아주는 거였다. 그러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그녀의 집까지 걸어갈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떻게든 이 아이와 함께 있는 시간을 늘리고 싶었던 것이다.
저번에 가본 적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길을 헤매지 않았다. 제길. 이제야 후회가 밀려온다. 조금은 헤매는 게 좋았을지도……라고. 가는 도중 저 멀리 보이는 모텔을 보고서 문득 걸음을 멈췄다. 그러자 그녀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린다. 허락한다고? 아아, 됐어. 난 신사니까.
제길. 위로가 안 되는군. 그녀의 집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다. 조금만 더 힘내자. 몸을 앞으로 더 숙이고 살짝 리듬에 맞춰 무릎을 튕겼다. 스르륵 내려가던 그녀의 가벼운 몸이 훌쩍 위로 올라왔다. 웁, 푹신한 느낌이 났다. 위험해. 고등학교 때 외웠던 단어들을 필사적으로 떠올리며 하나 밖에 없는 내 소중한 분신을 진정시켰다.
그녀의 집은 대학로에서 제법 가까운 탓에 얼마 지나지 않자 목적지가 보였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그녀는 저 아파트의 17층에 살고 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는 순간 나는 엘리베이터를 타지 말고 걸어서 17층까지 올라가보자고 심각하게 고민했다. 사실 정말로 그러고 싶다. 그러면 더 오랫동안 그녀와 함께 있을 수 있으니 말이다.
터벅터벅.
새근새근.
터벅터벅.
새근새근
터벅터벅.
새근새근.
아에 잠든 모양이다.
별이 내리는 하늘 아래, 잠자는 숲속의 공주님은 아니지만 내 등에 몸을 맡기고 꿈나라로 여행을 떠난 그녀. 분위기에 휩쓸려 나도 모르게 감상적인 인간이 되어버린다.
“있지. 나― 네가 무지 좋아. 우리 나이에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도 우습겠지만 굳이 단어로 표현한다면 그런 거랄까. 넌 어때?”
새근새근. 당연히 대답이 없다. 이제 두 번 다시 이런 대사는 못 하겠지.
아파트 앞에 도착하자 눈에 익은 얼굴이 있었다. 내가 알기로 저건 그녀의 남동생이다. 도를 대표하는 태권도 선수답게 다부진 몸과 험상궂은 얼굴이 나를 보고서 조금 누그러졌다.
“누나를 바래다주셔서 감사합니다.”
내 등에서 누나를 건네받은 남동생은 예의바르게 인사했다. 그에게 손을 흔들어주며 나는 안타깝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제길, 17층까지 올라갈 수 있는데. 하아, 인연이 아닌 걸까.
그 순간―
“좋아요.”
뒤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두근두근!
내게서 멀어졌을 텐데도 여전히 심장소리가 들린다. 아니, 이건 내 심장인가?
“난 괜찮아요.”
더할 나위 없이 멀쩡한 모습으로 서 있는 그녀가 날 바라보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