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teria」


“아스테리아?(Asteria)”

불쑥 머리를 내밀어 모니터를 보더니 그가 중얼거리듯 물어본다.

“무슨 뜻이야?”

나는 키보드를 두들기다가― 이내 소리 없이 웃어버린다.

“인터넷에서 사용하는 내 이름.”

제우스의 구애를 뿌리치고 바다로 몸을 던진 티탄 여신의 이름이기도 하다. 그리고 우리는 헤어졌다. 다시 만날 약속, 서로를 그리워하면 연락하자는 이야기, 언젠가 지나가다 혹여나 만나게 된다면 그때는 웃어주자는 작별도 없이.

나는 꿈을 손에 쥐고 밤하늘을 바라보던 한 인간을 버렸다.

 


제 1 막 He, 또는 She

좋은 구름이다.

주변이 워낙 시끄러웠기 때문에 아무도 듣지 못했겠지만 나는 아무나 하늘을 봐달라는 심정으로 그것의 이름을 다시 내뱉었다.

정말 좋은 구름이다.

하지만 아무도 하늘을 바라보지 않는다. 앞만 바라보는 사람, 좌우를 둘러보는 사람, 벤치에 앉아 신문을 읽는 사람, 음악을 들으면서 땅바닥을 쳐다보는 사람, 빨간색 바구니를 앞에 두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사람, 버스정류장에서 도로 끝을 노려보며 자신이 기다리는 버스가 오기를 기다리는 사람까지―.

유동인구가 가장 많은 장소. 사람들이 가장 많이 북적거리는 시간. 그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서 어느 누구 하나 이처럼 하늘을 바라보는 이가 없다. 햇빛을 품고 있는 구름이 가진 뚜렷한 음영의 아름다움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다. 자연이 가져다주는 단 하나, 평생에 한 번 밖에 없는 아름다움인데. 그저 몇 초만 바라봐도 아름답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터인데 도시의 사람들은 그 자그마한 시간조차 용납하지 않는다.

도시의 바쁨이 싫은지 물어본다면 그것 나름의 매력을 가지고 있기에 나는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어떤 것이든 좋은 게 있다는 건 나쁜 점 또한 포함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래야 균형이 맞는다. 이건 내가 8년이라는 세월동안 외국을 돌아다니면서 얻어낸 결과물이다.

인도에서 3개월 동안 여행을 하고 돌아온 한국은 어김없이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이었다. 어쩌면 기차의 연착이 아주 당연한 일처럼 느껴지는 인도를 여행하다가 한국으로 왔기 때문에 이곳이 더욱 바빠 보일지도 모르겠다.

지금 가는 곳은 나와 계약이 된 출판사다. 외국에서는 핸드폰을 쓸 일이 없기 때문에 한국에 도착하면 먼저 출판사에 들려 카메라에 있는 메모리칩을 건네준다. 내가 밖에서 찍어온 사진을 검토해서 괜찮은 것들이 많다 싶으면 거기에 어울리는 글을 써달라는 얘기가 나온다. 이미 사진에 어울리는 소재들을 메모한 터라 글을 쓰는 것은 쉽다. 오히려 빨리 써주고 싶을 정도로 안달이 났다. 어서 빨리 작업실로 돌아가서 노트북을 켜고 글을 쓰고 싶을 정도다.

계속 해를 삼킨 구름을 바라보면서 걷고 있으니 출판사 간판을 발견했다. 이건 5년이나 지났는데도 변하지 않았군. 이대로 옆으로 몸을 돌리면 된다.

툭.

“아앗.”

누군가와 부딪치고 말았다.

전혀 엉뚱한 곳을 바라보고 있었기에 과실은 나에게 있다. 그래서 먼저 사과를 한 다음 나와 부딪친 상대를 관찰했다.

목소리는 여자였다. 그리고 목소리뿐만 아니라 몸도 여자였다. 흑색의 강렬한 느낌을 가진 프릴 원피스를 소화해낼 정도로 미모가 뛰어난 그녀는 언젠가 출판사에서 건네준 패션 잡지에서 본 적이 있는 유명한 브랜드의 옷이었던 거 같다. 이 건물의 2층에는 패션 잡지와 연관된 출판사도 있으니 거기 소속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때문에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하는 손에 반지가 없는 걸 보니 미혼이다. 그러나 고운 선을 가진 목에는 눈물 모양의 붉은 루비 목걸이가 걸려있다. 아마도 애인이 선물해줬을 거라는 추측이 들었다. 결코 넘치지도, 가볍지도 않은 적절한 메이크업은 보는 사람의 기분을 즐겁게 해주는 힘을 가지고 있다. 지적으로 보이는 외모가 더욱 돋보인다. 그녀는 자신의 오른손에 들린 커피를 옆으로 내밀며 내게 말했다.

“괜찮으세요?”

커피가 내게 쏟지는 않은 건지 걱정해주는 목소리……는 아니었다. 미모에 비해 마음씨는 그다지 곱지 않은 모양이다. 아니면 거지같은 내 차림을 보고서 짜증은 내는 것일까. 풋. 아무려면 어떠냐. 나와 별 상관도 없는 것을. 나는 계속 그녀를 관찰했다. 만나는 사람들을 관찰하는 것은 내 나쁜 버릇이다.

말을 걸면서 나는 그녀의 눈을 주목한다. 처음 보는 남자를, 그것도 마치 산골짜기에서 3년 정도 처박힌 사람 같은 몰골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시선을 회피하지 않는 것이 그녀가 사람을 상대하는 업종에서 일한 경험이 있다는 걸 증명해준다. 디자인으로 성공한 여자일까.

괜찮습니다. 그런데 뜨겁지 않습니까?

나는 커피를 들고 있는 그녀의 손을 가리키며 말했다. 내게 커피가 튀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손에 일부가 묻어있었다.

“괜찮아요. 거의 식었거든요. 아까워서 들고 나온 거였는데 오히려 방해가 되었네요.”

나는 싱긋 웃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그녀도 나를 따라 싱긋 웃었다. 그 순간―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나는 저 미소를 어디선가 본 적이 있었다. 잊고 있었던 그 무언가…….

“정말 괜찮으세요?”

내 표정이 이상했는지 그녀가 이번에는 걱정스럽다는 어조로 물어본다. 아까보다는 훨씬 감정적이다. 그런 모습에 뇌가 이상해진 것인지 나는 그녀에게 상투적인 대사를 내뱉고 말았다.

혹시― 우리 언제 만난 적이 있지 않나요?

아아, 나는 스스로를 원망했다. 이런 멍청한 대사를 내뱉게 될 줄이야. 이게 도대체 어느 시대에 사용되는 이야기야? 그녀도 나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살짝 미소를 지은 다음 내게 말했다.

“진부하네요. 하품이 나올 정도로. 아니요. 잘못 아신 거겠죠.”

나는 그럴 거라고 재빨리 말한 다음 옆으로 비켜서서 그녀가 나갈 수 있도록 공간을 마련해줬다. 그녀는 “감사합니다.”라고 말한 다음 사람들 속으로 자취를 감췄다.

분명……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거 같은데.

나는 그렇게 중얼거린 다음 하늘을 쳐다봤다.

아. 구름이 사라졌다.

방금 전까지 햇빛을 머금고 있었던 구름이 사라지고 말았다. 후우. 나는 한숨을 내쉰 다음 건물로 들어갔다.


“어머, 이수아 씨. 여기까지 어쩐 일이세요?”

5층에 있는 출판사 사무실로 들어가자 뭔가 다이내믹한 사건이 터지지 않는지 지구를 살펴보는 조물주의 지루한 표정을 흉내 내고 있던 내 담당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나를 반긴다.

가희 씨. 오랜만이네요. 지나가는 길에 들렸어요. 마침 동화원고도 다 그렸거든요.

나는 손에 들고 있는 갈색 봉투를 그녀에게 건넸다. 가희 씨는 내 옷차림을 힐끗 살펴보더니 봉투 안을 확인하지도 않고 “이런 건 제가 해야 하는 일인데. 고마워요. 그런데 혹시 소개팅이라도 하고 온 거에요?” 라며 옆구리를 찔렀다. 나는 그녀의 팔꿈치를 피해 옆자리로 이동한다.

아니요. 아버지를 만나서 점심을 먹었어요. 원래 광주에 사시는데 병원에 진료예약을 하셨더라고요.

“아, 수아 씨 아버지께서 한때 대장암이라고 하셨죠? 완치되지 않았나요?”

보통 암은 치료 후 5년 정도 발병하지 않으면 완치된 것으로 간주한다.

글쎄요. 5년이 지났어도 정기적으로 검사를 받으시는 모양이던데요. 정기적으로 검사하는 기간이 늘어날 거예요.

가희 씨는 내가 소개팅을 하고 온 게 아니라는 사실이 무척이나 실망스러운지 자리에 앉아서 곧장 두툼한 갈색 봉투를 열어 내용물을 확인했다. 총 24페이지로 구성된 동화는 내가 좋아하는 화가인 빈센트 반 고흐를 연상케 하는 정열적이고 몽환적인 분위기로 그려져 있다. 시작은 항상 어둡지만 끝은 항상 밝은 해피엔딩. 외롭게 혼자 있던 주인공들은 언제나 끄트머리에서 자신의 짝을 만나고 행복한 미래를 보장받는다. 물론 중간에 주인공은 반드시 선행을 해야 한다. 그래야 자신의 아이들에게 선물해 줄 팔불출 아빠들에게 팔리니까.

“음음. 좋아요. 이번 동화도 느낌은 괜찮네요. 편집장님이 지금 안 계시니까 돌아오시면 한 번 여쭤볼게요.”

편집장님이 어디 가셨어요? 엉덩이가 무거우신 그분이?

“호호호. 그 말 꼭 전해줄게요. 사실 오늘 방문할 사람이 있는데 편집장님이 그분을 꽤 꺼리시거든요. 냄새가 지독하다고.”

냄새요?

“네. 냄새요. 아마 만나보면 공감하실 지도 모르겠네요.”

과연 어떤 냄새가 날지 궁금했지만 슬슬 화실로 아이들이 올 시간이라 더 기다릴 시간이 없었다. 나는 그녀의 책상에 놓인 스타벅스 커피를 들었다.

“앗, 그건!”

여기까지 와서 원고 갖다 주는 작가가 어디 있어요? 어머, 조금 식었네. 이거 가져갈게요.

“나보다 돈도 많이 벌면서!”

후후. 고정수입이 아니잖아요. 그럼 잘 부탁해요. 문제 있으면 화실로 연락주시고요.

기분 좋게 약간 식어버린 커피를 마시면서 5층에 그대로 있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왔다. 용건은 모두 끝났으니 이제 곧장 화실로 가면 된다. 운 좋게 비싼 커피도 공짜로 얻었으니…….

아앗!

툭.

좁은 문을 통해서 바깥으로 나가려는데 누군가와 부딪치고 말았다. 커피가 바깥으로 흘러나와 손에 묻자 나는 황급히 옷을 살폈다. 꽤 비싼 옷인데 묻어서 얼룩이라도 생기면 큰일이다. 후우. 다행히 얼룩은 생기지 않았군.

나와 부딪친 상대는 남자였다. 오랜 시간동안 다듬지 않은 부스스한 머리카락이 여기저기서 삐죽삐죽 제멋대로 튀어나온 게 영락없는 고슴도치다. 까만색의 두꺼운 안경테. 왼쪽 이마에는 수술자국처럼 보이는 흉터가 있다. 목에는 N사의 디지털 카메라를, 왼쪽 어깨에 렌즈를 보관하는 카메라 가방 걸려있다. 순간 배낭여행을 하는 외국인이 아닐까라는 착각을 하게 만드는 현란한 붉은 빛의 등산용 배낭은 꽤 인상적인 조합이었다. 덥수룩한 수염과 초점이 흐릿한 눈을 보니 며칠을 헤맨 사람처럼 보인다. 일본인인가? 라는 의심이 들었지만 그는 제대로 한국말을 구사할 줄 알고 있었다.

“아, 죄송합니다.”

그래. 죄송한 줄 알아야지. 하마터면 커피가 옷에 묻을 뻔 했다고. 나는 건성으로 남루한 거지꼴을 하고 있는 그에게 대답했다.

“괜찮으세요?”

나는 그의 눈을 주시하면서 다음 대화를 기다린다. 이런 맙소사. 예전의 버릇이 아직도 남아있다. 공무원을 그만 둔 게 언제인데 아직도 이런 습관이 남아있는 걸까. 남자가 커피를 든 내 오른손을 가리키더니 조심스레 답한다.

“괜찮습니다. 그런데 뜨겁지 않습니까?”

괜찮아요. 거의 식었거든요. 아까워서 들고 나온 거였는데 오히려 방해가 되었네요.

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습관처럼 웃고 말았다. 친절한 미소는 사람의 긴장을 풀게 만든다. 이것 역시 옛날에 공무원 생활을 하면서 익힌 나쁜 버릇이다. 사람을 상대하는 직업은 꽤 피곤하다. 억지로 웃는 것을 싫어했던 나에게 가식적인 미소는 고문과도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어느 순간부터 아주 자연스레 미소로 사람을 홀리는 걸 즐거워했다. 이런 미소에 속는 사람들을 보면 일단 멍청하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 그런데 그는 조금 달랐다. 내가 짓는 미소를 보더니 갑자기 넋이 빠진 인형 같은 표정을 짓는 것이었다.

정말 괜찮으세요?

어쩌면 영양실조가 아닐까. 나는 더러운 그의 행색을 보면서 여러 요인들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가 이상한 말을 내뱉었다.

“혹시― 우리 언제 만난 적이 있지 않나요?”

……웃음이 나오려던 것을 간신히 참았다. 이 사람이 어디서 수작이야. 나는 그를 속으로 비웃으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가식적인 미소를 다시 보여준다.

진부하네요. 하품이 나올 정도로. 아니요. 잘못 아신 거겠죠.

그러자 창피했는지 그는 내가 지나갈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줬다. 나는 감사하다고 말한 다음 서둘러 건물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하늘을 본다. 조금 전까지 구름에 모습을 감추고 있었던 태양이 막 자신의 위풍당당한 등장을 알리고 있었다.

하아. 재수도 없지. 나는 투덜거리면서 버스정류장을 향해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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