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1 흡혈마전
김나경 지음 / 창비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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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창비 덕분에 전혀 접하지 않던 영 어덜트 문학 책을 두 번 읽을 기회가 생겼다. 첫 번째 책은 창비 X카카오페이지 영 어덜트 장르문학상 대상을 탄 '스노볼'(박소영, 창비, 2020)이었고 이번에 읽게 된 책은 김나경의 '1931 흡혈마전'(창비, 2020)이다.


'한국에 흡혈귀라고?'



흡혈귀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영화 트와일라잇이다. 이 영화의 원작은 소설 트와일라잇(스테파니 메이어, 북폴리오, 2008)이다. 이 책은 당시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리스트에 130주간 올라있었고 전 세계 33개국에 번역 출간될 정도로 유명했다. 인간 여성과 흡혈귀 남성의 러브 스토리다.


한국 흡혈귀 하면 드라마 <<밤을 걷는 선비>>(이준기, 이유미 주연, MBC, 2015)가 떠오른다. 조선 시대가 배경이지만 트와일라잇처럼 인간과 흡혈귀의 러브스토리다. 이 드라마 원작은 만화다.


‘1931 흡혈마전’, 왠지 중국 무협 영화 같은 이 제목은 좀 별로였지만, 마늘 냄새로 가득한 한국엔 절대 없을 것 같은 흡혈귀가 하필 일제 시대의 여학교 사감 선생님으로 있었다는 설정에 끌렸다. 그래서 읽기 전부터 이런저런 상상을 했다.


<<킹덤>> 시즌 1 (주지훈, 배두나 주연, 넷플릭스, 2019)에서 좀비 부대를 만들어서 왜군을 무찌르려 했듯이 사감 선생님이 학생들을 다 흡혈귀로 만들어 독립군을 만들까? <<보건교사 안은영>>(넷플릭스, 2020)의 안은영 선생님처럼 악한 세력으로부터 아이들을 흡혈귀의 힘으로 구해내는 걸까? 기대하며 책을 펼쳤다.



주인공인 열네 살 임희덕은 가난한 집 둘째 딸이다. 당시 시대라면 절대 공부는 못한다. 가난한 집이라 좀 사는 집에 빨리 딸을 시집보내는 것이 소원이며,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할아버지 생각은 다르다. 희덕의 똑똑함을 알아보고 천자문을 가르친다. 희덕은 경성에 있는 고등 보통 학교에 진학한다. 비싸다고 안 보내려는 희덕의 부모와 다르게 할아버지는 몰래 모은 돈 까지 보태면서 유언이라고 강력하게 밀어붙인다.


명성 황후가 시해당하고, 전주 읍성이 무너지고, 독립군을 마구 죽이는 모습을 직접 경험한 할아버지는 '어린아이들도 제대로 배워야 움찔하기라도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계시다.


할아버지의 기대와 다르게, '제대로 배움'은 없다. 선교사가 세운 학교지만 일제의 눈치를 보고 일본인 선생님들이 실세인 학교에서는 일본어만 사용해야 한다. 일본은 조선 것이며, 여자는 좋은 아내가 되는 것이 미덕이라는 내용을 배운다.


"학생의 손놀림 하나하나가 조선을 대표한다고 생각해보세요. 좋은 가정부인이 되어 남편을 위해 아름다운 자수를 놓는다면 얼마나 훌륭합니까. 조선 여성이 응당 몸에 익혀야 할 미학입니다." (p.25)


누군가를 위해 항상 희생하는 삶을 살아온 여성들에게는 공부마저도 누구를 위한 것이 된다. 하지만 희덕은 그런 교육에 고분고분하게 순종하지는 않는다. 자신의 의견을 말한다.



" 하지만 여성도 남편을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를 위해 배울 수도 있지 않나요?" (p.25)


어느 날 희덕은 새로 온 사감 선생님인 계월이 흡혈귀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계월은 어떤 계기로 흡혈귀가 되고, 우연히 만난 무당 백송과 기생 화란을 돕게 된다. 누군가의 밀고로 일제의 실험실에 끌려가 갖은 실험을 당하다 간신히 다시 도망쳐 나와 신분을 숨긴 채 사감 선생님으로 취업한다.




읽다 보면 이 둘에게 어떤 일이 생기게 되는지, 계월은 어쩌다 흡혈귀가 되었는지 등 스토리에 대해 궁금해진다. 흡혈귀에 대한 두려움에서 오는 긴장감과 함께 당시 시대적 상황이 주는 긴장감을 동시에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영 어덜트 문학답게(?) 무겁지 않게 그 상황들을 묘사한다.




더 역사적인 내용이 추가되고, 외부적인 갈등과 인물 간의 갈등과 히스토리가 붙으면 스토리가 풍성해지져 영화로도 나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K사감과 러브레터', '표본실의 청개구리' 등 각 챕터별 제목은 마치 한국 소설이나 시의 제목을 약간 비튼 것 같았다. 현실과 다른 흡혈귀가 존재하는 평행 세계이면서 동시에 현실 세계와는 약간 다름을 알려주려 한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책 소개를 찾아보니 "강경애의 『인간 문제』, 김명순의 「들리는 소리들」 「샘물과 같이」, 나혜석의 「노라를 놓아주게」 등 한국 근현대 여성 작가들의 작품에서 따온 각 장의 소제목에는 앞서간 여성들의 발자취를 기리고자 한 저자의 뜻이 담겨 있다"라고 한다.



최근 두 여성의 연대를 통한 성장에 대한 책 <<부디, 얼지 않게끔>>(강민영, 자음과 모음, 2020)을 봐서 그런가? 이 책도 두 여성의 연대와 성장이 두드러지게 보인다.




한 명이 A라는 면에서 강하면 다른 한 명은 B라는 면에서 강하다. 이 둘은 서로 만나 부족한 점을 보완하고 현재 자신의 모습을 더 나은 자신으로 만들어간다. 현실 속에 좌절하지 않고, 혹은 다른 남성의 사랑 또는 도움이 아니라 스스로 생각하고 선택하고 깨달아간다. (물론 이성간 사랑도 사람을 성장시킨다.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존 그레이, 동녘라이프, 2010)처럼 흡혈귀보다 낯선 존재가 이성일 지도 모른다.)




책에 나오는 인물 중 당시 시대 관점에서 보면 소외된 계층의 사람이 많다. 굿을 하다 못하게 된 무당, 기생, 가난한 집 딸, 일제 시대의 조선인, 독립군 등. 이들도 서로가 서로를 받아들이진 못한다.




희덕 또한 자신과 다른 존재에 대해 거부감을 느꼈다. 하지만 계월을 알아보고 도와주는 무당 백송과 이야기하면서 다름에 대해 이해하게 된다.




"그게 정말 사람이 아니고, 위험한 것들이라면....... 차라리 조선 땅에서 사라지는 게 낫지 않을까요?"

"그게 세상이 변해 간다는 증거일지도 몰라. 서로 다른 모습이 어울려 살기보다 배척해야 한다고 먼저 배워 버리는 게."

"요즘 사람 논리에 맞추어 설명되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과 함께 살아갈 가치가 없는 걸까? 그런 가치의 기준은 누가 정하고, 누구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 거니?" (p.144)



나와 다른 사람, 혹은 종족에 대한 몰이해와 거부감은 많은 생명체를 지구에서 사라지게 했다. 지금 이 세계가 끊임없는 전쟁과 고통 속에 있는 이유도 다름에 대한 공존을 못해서가 아닐까.




자신과 다른 존재에 대해 거부감이 있던 희덕은 계월과 함께 지내면서 그녀를 이해하며 그녀의 아픔에 공감할 수 있게 된다.




"훌쩍이는 소리에 계월은 뒤를 돌아보았다.

'참 이상한 아이야.'

계월은 소매로 얼굴을 훔치며 눈가를 닦는 희덕을 보며 생각했다.

'나도 오래되어 눈물이 말라 버린 일에 이리 울어 주다니. 저의 일도 아닌 것을......'' (p.224)

'공존하는 다름'을 상징화한 것이 흡혈귀이고, 이 존재를 인정하는 것은 서로가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에겐 희덕에게 새로운 시선을 주며, 낯선 계월을 품어주는 백송 같은 사람이 더 많이 필요하다.




"어쩌면 이런 게 나 같은 사람의 운명인지도 몰라. 쫓겨난 자들을 거두어 보호하고, 함께 어우러지도록 조율하는 것 말이야." (p.145)



책 결말 이후 이야기가 더 궁금해진다. 1931년의 계월은 지금 2020년 한국에도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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