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숄 ㅣ 문지 스펙트럼
신시아 오직 지음, 오숙은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11월
평점 :
#도서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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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숄은 마법의 숄이었다.❞
유대인 수용소에서 굶주림에 허덕이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로사 루볼린은 자신의 15개월 된 딸 마그다를 남들 눈에 띄지 않게 숨겨 키우고 있다. 젖은 말라 나오지 않은 지 한참, 마그다는 낡디낡은 숄의 모서리를 빨아먹으며 배고픔을 달랜다. 마그다에게 있어 숄은 마르지 않는 양식이자 요람, 위안이었다. 로사의 열네 살 조카 스텔라는 마그다의 숄이 탐난다. 몸을 숄에 감싸 살인적인 추위를 조금이라도 피하고 싶다. 스텔라는 이기적인 질투심으로 마그다의 숄을 훔친다. 숄이 없어진 마그다는 엄마를 부르며 막사 밖을 나오다 병사에 발각돼 전기 울타리에 부딪혀 떨어져 죽는다.
멀리서 마그다가 병사에게 붙잡혀 가는 것을 지켜본 로사는 스텔라에게서 되찾은 숄을 들고 로사에게 달려가려 하지만, 그녀는 그러지 못한다. 터져 나오는 울음을 숄로 틀어막으며 제자리에 못 박힌 듯 서있다. 살기 위해서. 죽지 않기 위해서.
🔖지금 그녀의 뼈 사다리를 타고 올라오는 늑대의 울부짓음을 토해냈다가는 그들이 총을 쏠 테니까. 그래서 그녀는 마그다의 숄을 쥐고 입에 쑤셔 봉었다. 꾸역꾸역, 늑대의 울부짓음을 삼키게 될 때까지, 꾸역꾸역, 마그다의 침이 배어든 계피와 아몬드 맛이 느껴질 때까지. 그리고 로사는 그 울부짓음이 마를 때까지 마그다의 솔을
마셨다. (20p)
전쟁이 끝나고 난민이 되어 미국에 온 지 30년이 흘렀다. 로사는 스텔라가 주는 생활비로 버틴다. 자신의 딸을 죽음으로 몰고 간 원인이 된 스텔라는 수용소에서의 기억을 덮고 미국인으로 살아가려고 애쓴다.
그러나 로사의 인생은 죽은 마그다의 환영을 보며 고통으로만 점철된, 여전히 수용소의 삶을 살고 있다.
❝ 내 스스로를 가둔 이곳은 지옥이야.❞
로사의 시계는 수용소에서 마그다를 잃은 후 멈춰있지만, 사람들에게는 지나간 역사의 한 페이지일 뿐이다. 로사는 절대 잊지 못하는 기억을 사람들은 알지 못했다. 이해하지도 못 했다. 뉴욕에서 마이애미로 옮겨 와 묵고 있는 호텔에서의 삶은 지옥 그 자체다. 불구덩이 같은 뜨거운 날씨는 그녀의 몸을 달군다. 스스로 고행하는 삶, 삶이 없는 삶, 그녀는 생각 안에 똬리를 틀고 웅크린다.
🔖"삶이 없는 사람은," 로사가 대답했다. "자기가 살 수 있는 데서 사는 거죠. 가진 게 생각뿐이라면, 생각 속에서 사는거고요." (45p)
전쟁으로 삶을 빼앗긴 사람들의 삶, 홀로코스트 이후 과거의 올가미에서 벗어나지 못해 고통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사람들, 전쟁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답이 없는 질문.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이후의 로사는 홀로코스트의 생존자 연구를 위한 유용한 데이터를 위한 표본일 뿐이다. 그녀는 '인간'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번호로, 난민으로 생존자, 표본으로서 존재할 뿐이다.
❝ 무고한 사람을 철조망 뒤에 가두는 건 나치뿐이에요!❞
해변을 거닐다 사유지에서 나가지 못해 철조망 안에 갇혀 버린 로사, 그녀를 붙잡는 과거와, 그녀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철조망에 갇힌 로사 자신을 보여주는듯하다. 철조망에 갇힌 그녀를 아무도 알지 못한다.
로사와 스텔라가 장거리 전화 통화를 할 때, 스텔라가 말한 '장거리 (전화)'에 유령처럼 나타난 나비가 된 마그다, 30년 전 마그다가 철조망에 부딪힌 모습을 '먼 거리'에서 지켜보던 로사가 나비로 본 것처럼, 그렇게 나타났다. 로사는 마치 죽은 자를 위한 제문을 읽듯 그녀의 과거를, 역사를 마그다에게 들려준다.
세상은 그녀를 미쳤다고 하지만, 로사의 눈에는 그들이, 세상이 미쳤다. 그리하여 미치지 않고는 미친 세상을 살아갈 수 없는 것이다.
로사의 입을 틀어막아 꺽꺽거리는 울음소리가 들리는 듯, 작품을 관통하는 그녀의 독백은 억눌린 슬픔으로 가득 찼다.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듯한 철책이 그녀 주위를 둘러싼듯하다. 마그다와 함께 했던 수용소 생활과 현재의 로사의 삶은 나란히 간다. 작가가 홀로코스트 역사를 직접 격지 않고 이 작품을 썼다는데 놀라움을 금치 못하겠다. 그 정도로 감정의 밀도가 높아 장편을 읽은 듯한 기분이었다.
지금도 이어지는 전쟁과 제대로 마무리되지 못한 과거사, 그곳에서는 오직 평범한 사람들만이 지옥을 경험한다. 누구를 위한 전쟁이고, 홀로코스트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