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생의 심장 가까이 암실문고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지음, 민승남 옮김 / 을유문화사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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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제공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의 'G.H.에 따른 수난'을 처음 읽었을 때의 충격이 떠오른다. 표지부터 강렬했던 그 책은 처음부터 무의식의 흐름을 언어로 엮은,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이지?를 수차례 되뇌며 앞부분만 여러 차례 다시 읽고 다시 읽었던 난해하기 그지없었던 책이었다. 그러나, 묘하게 나를 시험하려 드는 느낌에 책 읽는 것을 포기하기 싫었지만.

나에게 꽤나 강한 인상을 남겼던 클라리시 리스펙토르는 남미 브라질 작가이며, '야생의 심장 가까이'는 그녀의 데뷔작으로 을유문화사의 새로운 문고 시리즈인 암실문고판으로 국내 처음 출판됐다. 이 책은 그녀의 개성 강한 문체의 원류, 맨 처음을 볼 수 있는 작품이기에 반가웠다.

🔖나는 나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데, 왜냐하면 그것들이 태어난 원인을 미쳐 자각하지 못한 내가 나도 모르게 아주 중요한 것을 짓밟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나의 위대한 겸허함이다. (24p)

책을 읽는 큰 즐거움 중의 하나는 내 머리 속에 부유하는 감정들과 문장을 이루지 못한 단어들이, 독서를 통해 분명한 문장으로 완성될 때의 쾌감일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오히려 주아나가 무의식의 흐름대로 쏟아내는 많은 문장들과 단어들이 명징하게 다가오는 것이 아닌, 날 것 그대로 독자에게 마구 던져지는 느낌이다. 불가해한 문장들을 이성적으로 해독하려 할 때마다 나는 책 속에서 여러 번 길을 잃었다. 주아나 내면의 악과 순수, 잠재된 폭력, 그것들이 어지럽게 문장에 담겨있다. 아름다운 시를 짓는 어린 주아나에서 선생님과 오타비우와의 사랑의 감정을 겪으며 성장하는 여성 주아나의 시선으로 주변 인물들을 보다 보면 그녀가 왜 버지니아 울프의 영향을 받았을 거라고 추측하는지 아주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하다. '글을 쓰는 것이 타인에게 어떤 만족감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고 말한 클라리시, 독자에게 친절하지 않은 글은 반대로 어떤 독자들에게는 큰 매력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

눈으로 읽는 것보다 소리를 내 읽었을 때 오히려 더 좋기도 했던 (실제 이 책으로 낭독회를 하는 서점도 있다.) 이 책은 감상의 스펙트럼이 엄청 넓을 것 같아서 독서모임에서 같이 읽고 이야기해 보고 싶기도 한 책이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계속해서 기다리기만 하면, 늘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은 후의 시간 한 줌 속에 있게 되는거야, 알겠어? (13p)

🔖동물의 삶은 결국 이 쾌락의 추구로 귀결된단다. 인간의 삶은 그보다 복잡해. 쾌락의 추구와 그것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둘 사이의 시간을 잠식한 불만족으로 귀결되지. 내가 좀 지나치게 단순화시켜서 말하고 있긴 하지만, 지금은 그래도 상관없어. 무슨 뜻인지 이해하겠니? 모든 갈망은 쾌락의 추구야. 모든 참회, 연민, 자비는 그것에 대한 두려움이고. 모든 절망과 대안을 찾으려는 노력은 불만족이지. (78p)

🔖그래서 고통을 겪는 시인들의 시는 달콤하고 다정하죠. 반대로 불우한 삶을 산 적이 없는 시인들의 시는 고통으로 불타오르고, 저항적이죠. (181p)

🔖특정한 대상들을 보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눈이 멀 필요가 있다. 어쩌면 이것은 예술가의 특징일 수도 있다. 그 누구라도, 진실이 이끄는 바에 따라 안전하게 추론함으써 자기 자신을 넘어선 것들을 알 수 있다. 하지만 특정한 대상들은 불을 밝힌 상태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그것들은 어둠 속에서 인광을 발한다. (18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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