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롱보다 몽롱 - 우리 여성 작가 12인의 이토록 사적인 술 이야기
허은실 외 지음 / 을유문화사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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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공도서

🥂
사울 레이터의 사진 위로 와인이 튄 자국인 듯한 표지가 강렬하게 시선을 끄는 이 책은, 여성 문인 12명이 쓴 '술'을 주제로 한 앤솔러지이다.

세상을 너무 깨끗하고 투명한 유리로만 들여다보면 너무 선명하고 날카롭게 보이니깐, 눈을 돌리고도 싶으니깐, 그 유리를 조금 뿌옇게 만들면 세상이 조금 부드럽게 보일까, 나에게 조금 다정할까 싶은 마음에 한 잔, 두 잔 술잔을 기울인다. 작가에겐 창작의 불씨를 던져 줄 수도 있고, 좋아하는 사람에게 용기를 내어보게도 한다. 그러나, 술은 깊은 후회의 나락으로도 떨어지게 만드는, 천사와 악마의 이중성을 가진 요물이다.

내가 술을 한창 마시던 시절에는 여자 혼자 혼술 하는 일은 쉽게 상상되지 않던 때다. 언젠가 딱 한 번 친구랑 기분 좋게 술을 마시고 헤어졌는데 너무 아쉬워서 좋아하는 바에 혼자 간 적이 있었다. 바에 앉아서 칵테일 한 잔을 시키는데 그 취한 와중에도 옆자리 사람들의 시선이 따갑게 느껴졌다. 사연 있는 여자처럼 보였나, 건드리면 쉽게 넘어올 여자처럼 보였나. 기분 좋게 들어 왔다가 기분 잡치고 나갔던. 그 이후론, 혼자 술마시러는 절대 가지 않았다.

나도, 술에 얽힌 일화가 참 많다. 말하기 부끄러운 일도 있고생각하면 슬퍼지는 일도 있고, 뱃속을 간질이며 웃음이 나는 일도 있고 얼굴이 붉어지며 화가 나는 일도 있다. 12편의 글을 읽으면서 나의 과거가 자꾸 떠올라 술 한잔 생각이 간절하게 났다. 특히, 결혼 전, 음악동호회 사람들과 카페를 빌려 밤새 재즈와 락을 들으며 술 마시고 떠들던 추억은 실로 오랜만에 꺼내본다. 술병 탑을 쌓으며 먹던 주량은 기나긴 임신과 육아로 인해 바닥으로 떨어져 지금은 맥주 한 잔이나 와인 한 잔이 딱이다. 술이 주는 기쁨과 슬픔은 누구든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도 든다. 혼술 하러 술집에 들어왔다가 12명 손님 (심지어 작가님들!!) 들과 각각 한 잔씩 주고 받으며 웃다가, 심각해졌다가, 슬프다, 흠뻑 취해 이야기를 나눈 기분이 든다.

여자 혼자 술 마시는 일이 아무렇지 않고, 술에 취해 혼자 밤거리를 걷는 일이 무섭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무엇보다, 술이 범죄의 감형 이유가 되거나, 폭행의 변명이 되지 않기를 진심으로. 🙏

🔖다시 고백하자면 나는 술이 좋다. 구체적으로는 술 마실 때의 기분이. 정확히는 연분홍 빛깔의 적당한 취기와 몽롱이... 영롱보다 몽롱. 또롱또롱보다 헤롱헤롱이 좋다. (29p)

🔖누구나 자유롭게 혼술을 즐겼으면 좋겠다. 나를 포함한 많은 여성이 그저 술을 좋아하고 즐길 뿐 어떤 의도가 있어서 취하는 게 아니라는 당연한 사실이, 정말 당연해졌으면 좋겠다. 집이 내 안식처이자 감옥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53p)

🔖인간의 역사는 술과 함께했고 모든 예술은 술에 빚지고 있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95p)

🔖한 잔의 와인이나 커피는 삶을 잠시 멈추게 한다. 그 시간이 주는 여유와 평화로움은 '해야만 하는' 인생의 숙제들 사이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또는 '하고 싶은' 게 있음을 느끼게 해 준다. (171p)

🔖돌아보면 애틋하지만, 애상도 오래되면 질척해진다. 폭음 뒤에 겪는 숙취처럼. (192p)

🔖취하면 그 순간만은 누구와든 둘도 없이 가까워지는 기분, 친밀감, 동질감, 바로 거기에 중독되었던 게 아닐까. (208p)

#에세이 #에세이추천 #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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