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촌수필 문지클래식 1
이문구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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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生)은 고(苦)라던 불교의 가르침까지 굳이 들먹이지 않더라도 세속은 상처고 "문학은 한 민족이 그곳을 통해 그들의 아픔을 재확인하는, 언제나 터져 있는 상처와도 같은 것이다."(김윤식, 김현) 문학은 현실의 산물이기에 으레 그 안에 상처가 담기는 법인데, 아픈 상처를 굳이 드러내(야하)는 건, 그것이 반성과 치유라는 희망을 품기에 가능한 일이겠다.

이문구의 《관촌수필》은 그러한 상처의 풍경들을 모아놓은 연작소설집이다. 20세기는 세계 어느 곳이나 격동의 전환기였다. 이 땅의 민중들은 근대화와 산업화라는 과제를 떠안고 식민지 지배, 전쟁, 독재의 경험까지 견뎌야 했기에 모순은 짙고 상처는 깊었다. 《관촌수필》은 1941년 충청도 관촌 부락에서 태어나 자란 이문구가 1970년대 소설가가 되어 옛일을 회상하고 옛 친구들을 만나 전해 듣는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기에 그 모순의 중심부에 자리 잡고 있는 소설이라 할 수 있다.

첫 번째 소설인 <일락서산>(해가 서산에 지다)은 화자가 오랜만에 귀향하며 시작된다. 옛 마을에 도착해 처음 발견한 건, 마을의 오랜 터줏대감, "4백여 년에 걸친 그 허구헌 풍상을 다 부대껴내고도 어느 솔보다 푸르던, 십장생의 으뜸다운 풍모로 마을을 지켜온 왕소나무"의 부재였다. 이 장면은 소설이 시작하고 3쪽이 채 넘어가기 전에 펼쳐지는데, 이후 소설이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가 암시되어 있다. 화자는 구차스런 동네로 변모해버린 마을을 눈으로 확인하며 깊은 상실감에 잠긴다. '이젠 완전히 타락한 동네구나', '실향민, 나는 어느덧 실향민이 돼버리고 말았다는 느낌을 덜어버릴 수가 없었다', '이제는 어느 한 가지도 그전 그 모습대로 남아 있지 않았다', '진실로 서글픈 일이었다'

화자가 저리도 깊이 그리워했던 건 할아버지, "고색창연한 이조인이었던 할아버지"였다. 말하자면 구한말의 끝자락에 태어난 마지막 양반이었던 할아버지, 상대가 상놈이라면 나이가 많더라도 철저히 하대했던 할아버지, 아흔의 나이에 숨을 거두며 족보만은 잘 간수하라는 유언을 남긴 할아버지, 시대가 변하여 제대로 된 양반 노릇도 못해 본 할아버지, 손자에게 천자문을 가르치며 선비처럼 글만 보다 돌아가신 할아버지였다. 화자의 아버지는 일찌감치 사회주의 운동에 투신하여 일찍 세상을 떴기에, 화자의 어린 시절 애착과 경외는 고스란히 할아버지를 향해있다. 할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하는 대목은 깊은 서정적 울림을 자아내지만 그런 할아버지에게서 받은 유교적 영향은 한계로 작용하기도 한다. 그 한계는 소설 곳곳에 은밀히 숨겨져 있다.

이어지는 소설들, <화무십일>(열흘 가는 붉은 꽃은 없다)에서는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피난을 내려온 윤영감 일가 이야기를 통해 마을 사람들의 따뜻한 마음을 느낄 수 있고, <행운유수>(떠가는 구름과 흐르는 물)에는 유년시절 화자와 친밀하게 지내며 자랐던 부엌데기 옹점이의 가슴 아픈 인생 이야기가 담겨 있으며 <녹수청산>(푸른 산골짜기에 흐르는 맑은 물)에는 거의 유일했던 친구인 대복이의 순박한 삶이 타락해가는 과정이 그려지고 있다.

<공산토월>(빈 산이 달을 토하다)은 가장 깊은 울림을 자아내는데, 자기희생을 무릅쓰고 남을 위해 살다가 젊은 나이에 요절한 석공 신씨를 통해 작가의 정신 속에 굳게 자리 잡고 있는 구원의 인간상을 그려낸다. 문학동네에서 몇 해 전에 펴낸 한국문학전집에 이문구의 중단편집이 《공산토월》이란 이름으로 출간되기도 했다. 작가의 《관촌수필》에서 4편과 그 외 《우리동네》, 《유자소전》, 《내 몸은 너무 오래 서 있거나 걸어 왔다》에서 추려서 만든 책이다. 작품들을 추리고 추린 중단편선에 이름을 걸고 나온 걸 보면 평론가들도 가장 인정하는 작품인가 보다. 관촌수필의 여덟 편의 글 중 분량도 제일 많고 가장 비극적이지만 현재의 나가 과거와 화해해가는 과정이 묘사되어 가장 인정받지 않았나 싶다.

이어지는 후반부의 소설들, <관산추정>(고향에서 꼴 베는 사람, 고향의 옛 친구)<여요주서>(그저 그런 이야기에 관한 해설), <월곡후야>(월곡 동네의 밤중부터 아침까지)에서는 회상보다는 현재의 화자가 바라본 농촌의 풍경을 그려낸다. 화자가 직접 찾아가 보거나 친구들을 통해 전해 듣는 농촌은 도시에서 밀려든 향락객들로 오염되어 가는 곳이고, 공권력의 횡포가 제멋대로 자행되는 곳이며 이전에는 없던 끔찍한 범죄들이 벌어지는 삭막한 곳이다.

이상향 같던 유년 시절의 평화가 산산조각 나는 건, 앞서 말했듯 근대화와 산업화, 도시화의 침탈 때문이었다. 평범하고 고요했던 마을에 전쟁과 함께 비극이 시작되고, 미군이 몰려들어 농촌민들의 자존심을 짓밟고, 자본의 깊숙한 침투로 땅이 오염되고, 각종 이권사업으로 관계들이 단절되고 공동체가 깨어지는 일들 앞에 사람들은 속수무책이었다. 전쟁통에 밥 한 그릇도 나눌 줄 알았던 인심은 서로 반목하고 의심하며 살아가야 하는 냉혹한 풍경으로 바뀌었다.

작가는 문명의 이기 앞에 갈가리 찢기는 공동체를 바라보며 철저한 무력감과 그리움에 사로잡히지만 그가 이상향처럼 그리워하던 풍경은 유교의 질서였고 극도의 가부장 사회였다. 물론 작가가 그 질서 자체를 옹호하는 건 아니다. 또한 부엌데기였던 옹점에게선 그 어떤 이한테서도 보지 못한(심지어 사회당원이던 아버지한테서도) 주체적인 인간상을 발견할 줄 알았을 만큼 감수성도 트여 있었다. 할아버지와의 긴밀했던 관계와 그 영향은 뿌리 깊지만 그가 이후에도 계속해서 농촌을 주목하며 민중의 목소리와 숨결을 채취해왔다는 점을 생각하면 일관성 있게 자기 자신을 넘어서려는 노력을 기울여온 것 아닌가 싶다.

이문구는 《이문구 소설어 사전》이 따로 나올 정도로 충청도 방언을 비롯한 토속어들을 거침없이 쓰는 것으로 유명한데, 정겹고 구성진 말들은《관촌수필》의 정서적 울림을 배가시킨다. 여러 판본을 거쳐 나온 2018년 문학과지성사 출간본에는 부록으로 낱말풀이가 딸려있다. 모르는 어휘는 뒷장을 참고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그만큼 흐름이 끊긴다는 단점이 있다. 문맥상으로는 해결이 안 되는 어휘들이 꽤 많아서 읽으려면 단단히 마음을 먹어야 한다. 귀찮을 수 있고, 그 과정이 힘겨운 탓에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처럼 읽다 포기하는 사람도 적지 않지만, 그만큼 풍요로운 언어의 숲을 만날 수 있다. 중간중간 다소 호흡이 긴 문장들도 돋보이는데, 작가의 입말이 고스란히 담겨 있어 리듬이 좋고 막힘 없이 읽힌다. 모국어의 아름다움을 찾는 이라면 꼭 읽어야 할 책이고, 두고두고 읽을 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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