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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at World Is This?: A Pandemic Phenomenology (Paperback) - 주디스 버틀러『지금은 대체 어떤 세계인가』원서
주디스 버틀러 / Columbia University Press / 2022년 11월
평점 :
세상이 왜 이럴까. 이것은 어떤 세상이 필요하고
주변화된 집단들이 살만한 삶을 살기 위해 세상은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
우리가 어떤 세상을 만들어야 하는지 묻는 것이기도 하다.
(세상은 만드는 것이다.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버틀러는 '살만한 삶(livable life)'를 말한다.
이 살만한 삶은 요주의 입지에 있는 역세권 '국민 평형' 아파트에서 사는 것도,
때때로 나에게 값비싼 '선물' 주는 것과 다르다.
글자 그대로 삶과 죽음의 사이에서, 삶이라고 부를 수 있을만한 삶을 어떻게
급진적으로 평등하게 누릴 수 있는가에 대한 물음이다.
그러기 위해서 '거주가능한/거주할만한(inhabitable) 세계'를 만들어야 한다고
버틀러는 이 책에서 주장한다. (한국어 번역으론 livable이나 inhabitable이나 살만한 이긴 하다)
숨 쉴 수 있는 공기,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건강보험과 같은 환경, 인프라, 자원의 불평등한 배분은 물질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거주가능하지 않은 세계를 만드는 과정이었다.
팬데믹이 초래한 초국가적인 보건 위기와 파멸적인 기후 위기는 국경과 범주를 비웃으며, 엮여있는 물질성을 보여주었다. 버틀러는 메를로-퐁티, 셸러, 후설 등의 현상학적 논의를 참조하여 몸적으로 엮여있는(스테이시 알라이모의 '횡단신체성trans-corporeality'이 생각난다) 관계를 이야기하며 자신에게 중요한 주제인 '상호의존성'을 이야기한다. '나'와 '너'는 분리된 무엇이 아니라는 상호의존성은 현상학에서도 도출할 수 있는 주제인데, 버틀러에 의하면 만진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선 만져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만지는 나 자신을 지각하는 것이다(메를로-퐁티). 그러므로 만지는 주체와 만져지는 객체 혹은 대상은 분명히 구분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현상학 논의가 펜데믹 시기의 혼란을 더 명료하게 설명한다. 나만 누군게에게 전염을 시키는 것이 아니라 남도 나를 전염시킨다. 내가 접촉하고 말을 걸고 보았더라도, 내가 감염되고 전염될 수 있다. 또한 이 과정을 이미지화 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뒤따르는 이미지화는 뒤늦다. 이 예상할 수 없는, 각본에 없는 영향의 주고받음, 몸적 주고 받음은 인간의 조건이며 몸들의 상호의존성을 보여준다.
그러면 이런 논의와 "세상이 왜 이래"란 질문을 어떻게 연결할 수 있을까? (몸적) 상호의존성이 인간의 조건이지만 모두가 고르게 인식하고 있진 있다. 즉, (주로) 1 세계의 백인 유산계급은 자신을 독립적인 주체로, 타인에게 영향받지 않는 존재로 상상하는 경향이 있다. 마스크 착용에 대한 시위들은 (물론 모든 참가자가 백인이며 유산 계급은 아닐 수 있지만) 마스크가 없다면 죽을 수 밖에 없는 면역 저하자, 양압기를 사용하는 장애 당사자, 건강 보험이 없는 취약한 사람들은 죽어도 괜찮다고 (암시적으로) 말하는 것은 아닐까? 또한 이런 이들과 엮여있는 자신과 자신의 네트워크도 위험할 수 있다는 것을 고려하지 않은 것은 아닐까?
일을 못 해서 죽거나, 일하다가 감염되어 죽거나를 선택해야 하는 사람들, 이제 경제의 '건강'을 위해 다시 펜데믹 이전처럼 경제활동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같은 '애도가능성'을 지닌 사람들일까? 영원히 경제가 멈춰야 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이런 불평등한 세상이 왜 이런지 묻는 것이다.
이 책에서 버틀러는 단순히 세상이 왜 이런지 묻는 것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펜데믹이 보여준 극명한 '애도가능성'의 불평등한 배분(어떤 이의 죽음은 죽음으로 여겨져 애도를 하지만, 어떤 이의 죽음은 애도하지 않거나 개별적인 애도만 가능한 배분)과 강제적 애도불가능의 상황(한국으로 치면 장례의 축소와 개인적인 애도에만 머물면서도 특정 '명망가'에게는 같은 시기에도 성대한 공적 애도를 진행되는 상황)은 애도에 대한 불평등한 분배가 정치적인 것임을 방증했다.
두 가지 지점이 흥미로웠는데, 첫 번째는 시장 '가치'가 아무개의 생명은 죽게 둔다는 푸코적 논의다. 시장 가치와 계산불가능한 삶의 가치를 대비하는 부분은 웬디 브라운의 《Undoing the Demos》가 떠올랐다. 웬디 브라운의 책의 '호모 이코노미쿠스'와 '호모 폴리티쿠스'의 대비가 생각났다. 경제적 인식 본위의 인간과 정치적 인식 본위의 인간. 물론 경제와 정치는 이분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시장 '가치'의 옹호자와 생명정치의 불평등에 저항하는 모습은 대비적이라 할 수 있겠다.
두 번째로 흥미로웠던 지점은 마지막 장 후기 부분의 프로이트의 〈애도와 우울증〉의 논의를 활용해 백인극단주의자의 상실을 인정하지 않는 판타지를 논한 부분이다. 물론, 이런 논의는 사라 아메드가 《행복의 약속》에서 영국인의 (애도하지 않은) 제국주의적인 판타지에 대해 한 분석을 떠오르게도 하지만 Black LIves Matter에 격분하는 백인들의 우울증적 상태에 대한 분석은 달성한 적 없었고 그런 적 없었지만 상상계에서나 존재했던 판타지를 회복하려는(애도하거나 상실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무수한 반동들을 생각하게 한다. 버틀러는 프로이트를 이야기할 때 번뜩인다는 느낌을 받는다.(프로이트의 인사이트 역시 매우 번뜩이기도 하지만)
이 책은 의외로 레비나스, 헤겔, 알튀세르에 대해 논하지 않는다(버틀러가 자주 논하는 학자들). 젠더의 수행성이나 언어의 수행성도 거의 논의하지 않는다. 물리적 모여듬만이 아니라 대안적 세계를 만들기 위한 온라인 모임이나 기타 인식론 전환을 위한 집단 행위들에 대한 논의는 《연대하는 신체들과 거리의 정치》를 떠오르게 하지만 이전의 저작을 아주 많이 참조하진 않는다. 하지만 여전히 버틀러 다운(상호의존성, 엮임, 몸적인 관계) 논의를 현상학 논의를 통해 전개하는데 '살만한 삶', '애도가능한 삶', '거주할만한 세계'에 대한 논의를 버틀러 특유의 윤리적, 정치적 입장을 대변하는 표현을 사용하여 진행한다.
특기할 만한 점은, 라투르를 포함한 신유물론적 논의에 한 층 더 가깝게 다가갔다는 인상을 준다는 것이다. 몸들과의 관계뿐 아니라 인프라(공기, 물, 환경 등)의 중요성을(행위성 까지는 아니더라도) 제기하는 부분이 그렇다. 또한, 세계시민적 윤리적 입장을 견지하는 부분은 국경 없는 펜데믹 이후 시야가 더 확장된 것은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사진을 보는 나도 사진에 포함된 것이듯. 분리된 '나'라는 환상이 아니라 엮여있는 '나'로서 실천은 중요하지만 물론 그것만으로 충분한 것은 아닐 것이다. 이 책은 지금-여기 한국에서 어떤 실천을 해야 이곳이 더 살만한 세상이 될 것인지 묻게 한다(물론 '세상'은 단일하지 않고 '세상들'일 것이다). 이 책이 제목처럼, 급진적 평등을 위한 질문은 세상은 왜 이런지 묻는 것부터 시작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