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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 발언 - 너와 나를 격분시키는 말 그리고 수행성의 정치학
주디스 버틀러 지음, 유민석 옮김 / 알렙 / 2016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은 아주 좋은 책이고, 깊은 논의를 담고 있지만, 접근이 쉽지 않은 건 사실이다.
그 이유는 세 가지로 요약 가능하다.
첫째, 알튀세르의 호명 테제와 푸코의 권력 개념에 대한 선이해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둘째, 오스틴의 발언내 행위(언표내적 행위), 발언효과 행위(언향적 행위)가 와닿지 않기 때문이다.
셋째, 서술의 난해함 때문이다. 이 부분은 어쩔 수 없는 면이 있다. 버틀러가 원래 글을 '명료하게' 쓰는 편은 아니기 때문이다. 첫째는 관련 개념을 찾아보는 것으로 어느 정도 타협이 가능하고, 둘째는 뒷면에 주요 '개념/용어'란을 숙독하면 해결이 가능하다. 셋째는 그냥 읽을 수밖에 없는데, 번역이 영 마뜩지 않다면, 영어본을 찾아보는 것도 방법이다. 버틀러의 문장은 길고, 직관적인 이해를 피해가는 문장을 많이 쓰기에, 원래 문장을 찾아보는 것도 방안이 될 수 있다.
난관들을 해치면서까지 이 책을 읽어야 할 이유는 분명 있다. 버틀러는 이 책을 쓰기 전에(<젠더 트러블>과 <Bodies That Matter>를 통해) '섹스sex'('성性') 자체가 담론적으로 생산된 것임을, 섹스란 자연화된 '담론'(담론 이전이라는 '담론') 임을 밝혔다. 즉, 규범을 인용하고, 반복된 수행을 통해서 성(규범)은 유지 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버틀러의 주장은, 다른 방식으로 수행한다면 다른 의미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담론이란 자연이 아니라, 자연화된 질서로서, 반복과 수행으로 유지되는 만큼 그 안에 파열의(다른 수행이 가능하므로) 조짐도 있다는 것이다. 유사한 궤에서, 이 책은 버틀러가 말하는 전유와 재인용을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지를 통찰력 있게 제시한다. 언어, 표현의 수행성을 제시하면서 재전유의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게 한다.
뿐만 아니라, 버틀러는 이 책에서 성 전쟁(sex war로 부르는 80년대 미국의 포르노그래피 입법 논쟁) 시기의 주장들에 대해 독특한 견해를 피력한다. 일부 페미니스트들의 포르노그래피에 대한 반대가 단지, 성 보수주의와 연합한다는 통상적인 견해가 아닌, 국가를 판단하는 심급으로 취임시키는 것이 문제적임을, 혐오 발언(hate speech)을 하는 주체가 어떤 '주체'를 생산하는 권력적인 주체(신적인 주체)로 전제되는 것이 문제적임을 밝힌다. 알튀세르의 호명 테제를 비판하며, '행위 뒤에 행위자'가 없다는 버틀러 자신의 구성적 관점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계기를 제시한다.
실제 언어생활에 유용한 면도 있다. 단순히, 레토릭 차원이 아니라, 한 방 먹이는 말대답(캐서린 갤버의 <말대꾸>도 연결된다고 하는데 읽지는 않았다, 본 책 역자 유민석의 <혐오의 시대 철학의 응답>는 하나의 대항표현 매뉴얼로 읽을 수 있는 아주 흥미로운 책이다)은 하나의 담론적 프레임 전환을 가능케 한다. 물론, 모든 혐오 발언에 버틀러식으로 대응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그래서도 안 된다. 다만, 버틀러가 보여준 독창적인 공간은 충분히 생각해봄 직하다.
번역도 나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버틀러는 원래 글을 난해하게 쓰는 경향이 있다. 이 책의 번역-정확히는 서술-이 난해하게 느껴지는 이유(혹은, 번역이 안좋은 것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버틀러의 다른 작업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일 것으로 추정한다. 개론서나 관련 글을 읽어보는 것도 좋은 접근일 것 같다.
이 책은 버틀러의 저작들 중에서 독특한 위치에 있는 저작이라고 생각한다. <젠더 트러블>이나 <Bodies That Matter>와 같이 이성애 매트릭스와 규범을 다루는 책보다는 덜 이론적(?)이고, 살만한 삶, 규범의 폭력성, 타자성을 강조하는-보다 더 현실 개입적인- 이후의 버틀러 저서와도 조금은 다른 면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이후에 논한다고 말한 규범과 보편성은 초기작에서도 등장한다. 이 책에서도, 법과 보편성을 논의한다. 보편성에 해당하지 않는 것들의 틈입과 보편성의 관계를 탐구한다. '합의' 민주주의에 대한 이 같은 비평은 '몫 없는 자들의 민주주의'를 논한 랑시에르의 논의와 연결할 수 있다. 버틀러가 2004년에 저술한 <젠더 허물기>(본 책은 1997년에 저술함)는 젠더 규범의 보편성을 심문하는, 이 보편성과 규범이 포함하지 않는 퀴어한 존재들을 다룬다. 물론, 퀴어 주체를 그들의 일상생활보다, 규범을 허무는 존재로 서술하는 것에 대한 비판도 있다-Viviane Namaste <Invisible Lives> 참고- 법과 언어 수행의 정치성은 이 저작에서 특별히 집중적으로 다루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독특한 저작이라는 생각을 했다.
일상 언어와 혐오에 대해 직접적인 논평을 시도한다는 점, '수행성'과 '인용'을 통한 저항 방법을 탐구한다는 점, 법적 투쟁이 아닌 방식의 저항도 사유해볼 수 있다는 점, '보편성'과 민주주의를 사유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은 많은 미덕을 갖고 있다. 혐오 발언은 언제나 성공하며, 그들이 형사 처분을 받길 바라거나 그게 아니면 주술적 저주로 대리적 처벌을 가하는 게 시대의 '윤리'로 느껴지는데, 혐오 발언은 언제나 상처를 주는가? 꼭 그렇진 않다고 말하는 버틀러는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려 노력하고 있다. 언어로 쉽게 포착하긴 어렵지만, 일말의 새로운 가능성을 전달하고 있음은 충분히 알 수 있다.
p.s)
버틀러 저작의 제목은 중의적인 부분도 있어서 번역 자체가 어려운 편입니다. 아예, 초월 번역(?)을 하는 게 더 나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버틀러의 다른 저작인 <Bodies That Matter>는 <의미를 체현하는 육체>로 번역되었지만, matter는 물질이라는 뜻도 있고, 문제라는 뜻도 있습니다. 물질이자 문제인 몸들? 매우 어색합니다. 번역하기 난감합니다(해당 책에서 이 문장은 한가한 말장난이 아니라고 직접 언급합니다). 이 책도 그렇습니다. excitable은 '쉽게 흥분하는' 정도의 뜻이 있기도 하지만, citation(인용)과도 연결됩니다. citable은 인용할 수 있는, excitable은 인용할 수 있는 것 전에(?) 인용할 수 있는 것 밖에(?) 등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내용이 좋으면 상업적인 제목이든 뭐든 문제가 없다"라고 정희진 선생이 말했는데, 적극 공감합니다. 2016년의 상황을 고려하면(워마드 탄생, 강남역 사건, 메갈리아4, 성우 교체) 제목은 매우 '상업적인' 선택으로 보입니다. 이 어려운 번역을 했는데, 제목 정도는 양해 가능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