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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곁에 있기 - 취약함을 끌어안고 다른 삶을 상상하며 만들어낸 돌봄의 세계들
고선규 외 지음 / 동녘 / 2024년 11월
평점 :
노래를 듣다가 '아무것도 아닌 건 아무것도 없었어'라는 가사를 들었다. 문명특급(유튜브 채널)에서 결성한 프로젝트 그룹 '재쓰비'의 노래 가사다. 많은 세상일에 적용할 수 있는 문장이라 생각했다. 나는 누군가의 곁에서 누군가를 돌보는 사람은 아니다. 하지만 돌보는 일이 지난하다는 것쯤은 안다. 매일 만나는 유자녀 중년 여성 동료들은 어떤 식사를 준비할지, 자녀가 아프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종종 이야기했다. 이들이 몸으로 통과하는 돌봄은 아무것도 아닌 일처럼 보이지만 누군가의 하루를 돌아가게 하는 아무것이 맞는 일이었다.
이 책에는 다양한 관계가 등장한다. 필진에는 청년 돌봄을 이야기하는 멋진 글을 쓰는 조기현 저자도 있고 국회의원으로 활동하기 전에 '생각많은 둘째언니'라는 유튜브로 채널에서 동생을 돌보는 이야기했던 장혜영 저자도 있다. 두 사람 외에도 장애-몸-질병이 있는 생명 곁에 있는 사람의 생각과 인식을 담았다.
돌보면서 마주친 어긋남과 불화에 대한 이야기들일거라 상상했지만 전적으로 그런 건 아니었다. 나는 되레 '자기 돌봄'에 대한 이야기에 더 눈이 갔다. 돌봄의 가치가 발굴되고 인간의 취약성이 보편적이라는 이야기들이 최근 더 많이 공유되면서 마치 돌봄이 누구나 할 수 있는, 혹은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일로 묘사된다고 느꼈다. 의무적이거나 윤리적인 일로 묘사되고 있다고도 느꼈는데 이 책에서는 내 인상과 결이 다른, 실제로 돌보는 사람의 마음이 더 잘 보였다.
조기현은 아버지를 돌보다 동생에게 돌봄을 요청했다. 조기현이 쓴 다른 글에서 동생과 자신은 경제적으로 의존하지 않는 관계라고 쓴 걸 본 기억이 있다. 나는 조기현의 글을 읽으며 나눠 하는 돌봄을 생각했다. 아빠의 인지 저하에 대한 가장 신속하고 정확한 돌봄자인 조기현이 아닌 요양보호사와 동생이 하는 돌봄은 다를 수 있다(심지어는 '더 못할' 수 있다). 하지만 돌봄을 더 잘하기 위해서, 더 오래 하기 위해서는 결국 자기를 돌볼 시간도 필요하다. 그래서 '성에 안 차는' 돌봄이라도 돌봄의 몫을 나누는 일이 결국 돌봄자를 살리는 일이기도 하다고 생각했다.
장혜영의 동생 장혜정에게는 바다, 석류, 나율이라는 돌봄자들이 있다. 혜정은 돌봄자들과 소통하고 관계를 확장한다. 조기현의 아버지가 딸과 보드게임을 하고 혜정은 다른 활동지원사들과 관계를 맺는다. 돌보는 사람이 달라지니 돌봄도 달라진다. 그래서 다른 이야기가 시작된다고 생각했다. 더불어, 담백한 일상 이야기들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휠체어 이용자인 남성과 결혼한 백정연의 일상은 거창하지 않았다. 싱크대의 높이, 식탁의 의자 배치를 고려했고 화장실의 문을 떼어냈다는 대목을 보고 나도 내 방의 구조를 돌아봤다. 내 방은 휠체어 이용자에게 어떤 공간일까 되물었다. 내가 휠체어를 타면 내 방은 바뀐 게 없어도 다를 거라는 감각이 일었다.
길고양이에게 밥을 주는 일을 거의 업으로 삼은 박소영의 글에서 자신을 알아보는 고양이에 대해 쓴 대목을 보며 동물과 인간이 맺는 관계를 생각했다. 정신질환자들이 갖는 특이하지만 더 애착을 갖는 관계에 대해 쓴 리단의 글은 '그렇지! 이거지!' 싶었다. '정병러'들 끼리 모이면 정병이 더블이지만 그 안에서 가능한 역동이 있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이다(반은 농담으로 말하자면 음수 곱하기 음수는 양수니까-당사자성 발언임). 자살 사별자 곁에 있는 사람에 대해 쓴 고선규의 글은 애도에 대한 이야기라 언제나 잘 떠나보내는 일이 어려웠던 나는 애도해야 하는 사람 곁에 있는 일의 무게를 생각했다. 이 이야기들 모두 내게 생소한 안쪽의 이야기들이다.
안쪽의 이야기들을 읽다 보니 정말 '아무것도 아닌 건 아무것도 없었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되었다. 아무것도 아닌 일이라 상상했을 뿐이었다. 곁에서 지켜보고 함께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나는 못 할 일이라 글을 읽으며 되새겼다. 하지만 곁에 있는 사람들이 영웅이라는 말은 아니다. 곁에 있는 사람들은, 더 잘 곁에 있으려 하는 사람들은 그저 일상에 대해 말을 하고 있다고 느꼈다. 안전하고 자동으로 돌아가는 일상이 아닌 삐걱대며 돌아가는 거친 일상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