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핵 정국이 시작하고 밤에 잠을 잘 수 없었다. 불안했고 잠자리가 불편했다. 선잠을 자거나 악몽을 꾸었다. 물론 탄핵 때문만은 아니다. 원래도 그랬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화를 틀었다. 이병헌과 김윤석이 주연인 〈남한산성〉을 봤다. 두 번째 본 영화지만 현 정국과 겹쳐 보였다. 우리에게 길은 어디에 있는걸까.


 그래서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도 오랜만에 읽었다. 이 책도 두 번째 읽는다. 불쾌한 묘사는 여전했지만 김훈스러웠다. 남한산성에 갇혔는데 살기 위해 나아가는 길을 묻는 두 신하가 등장한다. 치욕을 당해도 삶이 죽음보다 낫다는 최명길과 아름다운 자리에서 삶을 도모해야지 아름다움이 없는 곳은 죽음이라는 김상헌이 등장한다. 나는 김훈이 최명길 입장에 서있다는 것을 안다. 김훈은 전두환을 '찬양'하는 기사를 스스로 쓰고자 했다. 밥 벌이는 숭고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말과 말이 겹치는 대신들의 말잔치를 김훈은 혐오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대통령의 계엄령 보도 영상을 조작이라고 생각했다. 계엄령이 그에게 삶의 길이었나? 결과적으로 죽음으로 내모는 길이 되었다. 계엄령에 분노하는 시민들은 온당하고 나도 그 대열에 있었고 여전히 있다. 응원봉은 없지만. 하지만 나는 소위 민주 진영이라는 사람들을 신뢰하지 않는다. 집회에 젊은 여성들이 많아 나오니까 젊은 남성들 보고 나가보라던 진보 지식인, 정파적으로 편협한 견해만 쓰던 역사학자, 시인이 각종 영상에 나와서 민주주의를 이야기하고 있다. 이야기로 떠도는 민주주의와 그들의 진지함에 남한산성 안 작은 묘당에서 대의를 말하던 신료들이 겹쳐 보였다. 말들은 모두 그럴싸했지만 말로 길을 열수는 없기 때문이다.


 나는 여전히 추운 거리에 있을테지만 여당의 길과 야당의 길, 대통령의 길과 민주 인사들의 길은 같으면서도 같지 않아 보였다. 야당 대표가 대통령 불출마 선언하면 탄핵에 성공한다는 여당 의원의 인터뷰가 있었다. 계엄령에 대한 탄핵에 뜬금없이 야당 대표를 끌어들이는 행태가 이미 탄핵 반대 표결 불참이 현직 대통령에게 책임을 묻는 일과 관련이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주로 군/정보 계통 출신 여당 인사들은 매일 중요하고 충격적인 첩보를 제공하며 12월 3일에 대해 상세히 알려주고 있다. 조직적인 내란에 맞설 강한 야당, 기득권 야당의 효능감을 느꼈다. 반면 결국 그들이 정치 권력을 차지할 것이라는 점도 알았다. 나는 87년 민주화 이후 엘리트 정치인들이 혁명의 단물을 빨아먹는 일을 다시 겪는 듯 했다. 물론 설레발은 맞다. 아직 탄핵 표결도 가결이 나지 않았으니.


 《남한산성》과 탄핵 정국이 무슨 관련이 있겠나 싶겠지만 나는 자신을 죽음으로 모는 길을 자신을 살리는 길이라 생각한 사람과 정치 권력을 획득하는 길을 창출해 내는 정치인들을 보며 삶의 길과 죽음의 길이 겹치는 묘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소추가 가결되고 직무가 정지되었을 때 노무현 전 대통령은 김훈의 《칼의 노래》를 읽었다고 했다. 내우외환인 전란 상황에서 삶을 건져내는 리더인 이순신을 묘사한 책이다. 나는 여전히 겹쳐있는 길을 떠올렸다. 스스로 물러나지 않겠다는 대통령, 또 다시 시작되는 탄핵 정국,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는 여당 중진 의원 등등 소설보다 더 소설같은 일들이 벌어지는 요즘 나는 나아갈 길을 찾지 못했다. 잘못을 했으면 책임을 진다는 기본적인 사회적 합의조차 경합이나 논의 대상 혹은 정쟁이 되는 대한민국에서 떨어졌다는 비트코인 가격과 코스피 지수는 우리에게 길을 알려줄까? 탄핵이 된다면 시민들은 기뻐해야 할까? 나는 나의 일만 하면 될까? 나는 새롭게 다가오는 하루를 살고 있지만 어떤 길로 나아가고 나아가지 말아야 하는지 여전히 모르겠고 두렵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음악가의 소리들 - 소리와 음악에 관한 10가지 대화 이매진의 시선 22
안상욱 지음 / 이매진 / 2024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음악을 듣는 일과 소리를 듣는 일은 얼마나 같고 다른지 생각했다. 읽고 나니 왠지 소리들이 더 잘 들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리는 언제나 타지에 있다 - 이주배경청년의 일, 배움, 성장에 관하여 점선면 시리즈 6
고예나 지음 / 위고 / 2024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글을 읽으며, 타국으로 와서 엄마가 된 사람이 어떤 마음일지 헤아려 보려 했지만 헤아릴 수 없었다. 그저 문장과 단어를 딛고 엄마를 상상해 보았다. 저자가 푸는 남과 다른 사람이라는 감각과 경험도 와닿았다. 대학교 기숙사, 여름 모기, 물 끓여 씻는 겨울 이야기는 내 이야기기도 해서 공감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누군가의 곁에 있기 - 취약함을 끌어안고 다른 삶을 상상하며 만들어낸 돌봄의 세계들
고선규 외 지음 / 동녘 / 2024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노래를 듣다가 '아무것도 아닌 건 아무것도 없었어'라는 가사를 들었다. 문명특급(유튜브 채널)에서 결성한 프로젝트 그룹 '재쓰비'의 노래 가사다. 많은 세상일에 적용할 수 있는 문장이라 생각했다. 나는 누군가의 곁에서 누군가를 돌보는 사람은 아니다. 하지만 돌보는 일이 지난하다는 것쯤은 안다. 매일 만나는 유자녀 중년 여성 동료들은 어떤 식사를 준비할지, 자녀가 아프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종종 이야기했다. 이들이 몸으로 통과하는 돌봄은 아무것도 아닌 일처럼 보이지만 누군가의 하루를 돌아가게 하는 아무것이 맞는 일이었다.


 이 책에는 다양한 관계가 등장한다. 필진에는 청년 돌봄을 이야기하는 멋진 글을 쓰는 조기현 저자도 있고 국회의원으로 활동하기 전에 '생각많은 둘째언니'라는 유튜브로 채널에서 동생을 돌보는 이야기했던 장혜영 저자도 있다. 두 사람 외에도 장애-몸-질병이 있는 생명 곁에 있는 사람의 생각과 인식을 담았다.


 돌보면서 마주친 어긋남과 불화에 대한 이야기들일거라 상상했지만 전적으로 그런 건 아니었다. 나는 되레 '자기 돌봄'에 대한 이야기에 더 눈이 갔다. 돌봄의 가치가 발굴되고 인간의 취약성이 보편적이라는 이야기들이 최근 더 많이 공유되면서 마치 돌봄이 누구나 할 수 있는, 혹은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일로 묘사된다고 느꼈다. 의무적이거나 윤리적인 일로 묘사되고 있다고도 느꼈는데 이 책에서는 내 인상과 결이 다른, 실제로 돌보는 사람의 마음이 더 잘 보였다.


 조기현은 아버지를 돌보다 동생에게 돌봄을 요청했다. 조기현이 쓴 다른 글에서 동생과 자신은 경제적으로 의존하지 않는 관계라고 쓴 걸 본 기억이 있다. 나는 조기현의 글을 읽으며 나눠 하는 돌봄을 생각했다. 아빠의 인지 저하에 대한 가장 신속하고 정확한 돌봄자인 조기현이 아닌 요양보호사와 동생이 하는 돌봄은 다를 수 있다(심지어는 '더 못할' 수 있다). 하지만 돌봄을 더 잘하기 위해서, 더 오래 하기 위해서는 결국 자기를 돌볼 시간도 필요하다. 그래서 '성에 안 차는' 돌봄이라도 돌봄의 몫을 나누는 일이 결국 돌봄자를 살리는 일이기도 하다고 생각했다.


 장혜영의 동생 장혜정에게는 바다, 석류, 나율이라는 돌봄자들이 있다. 혜정은 돌봄자들과 소통하고 관계를 확장한다. 조기현의 아버지가 딸과 보드게임을 하고 혜정은 다른 활동지원사들과 관계를 맺는다. 돌보는 사람이 달라지니 돌봄도 달라진다. 그래서 다른 이야기가 시작된다고 생각했다. 더불어, 담백한 일상 이야기들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휠체어 이용자인 남성과 결혼한 백정연의 일상은 거창하지 않았다. 싱크대의 높이, 식탁의 의자 배치를 고려했고 화장실의 문을 떼어냈다는 대목을 보고 나도 내 방의 구조를 돌아봤다. 내 방은 휠체어 이용자에게 어떤 공간일까 되물었다. 내가 휠체어를 타면 내 방은 바뀐 게 없어도 다를 거라는 감각이 일었다.


 길고양이에게 밥을 주는 일을 거의 업으로 삼은 박소영의 글에서 자신을 알아보는 고양이에 대해 쓴 대목을 보며 동물과 인간이 맺는 관계를 생각했다. 정신질환자들이 갖는 특이하지만 더 애착을 갖는 관계에 대해 쓴 리단의 글은 '그렇지! 이거지!' 싶었다. '정병러'들 끼리 모이면 정병이 더블이지만 그 안에서 가능한 역동이 있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이다(반은 농담으로 말하자면 음수 곱하기 음수는 양수니까-당사자성 발언임). 자살 사별자 곁에 있는 사람에 대해 쓴 고선규의 글은 애도에 대한 이야기라 언제나 잘 떠나보내는 일이 어려웠던 나는 애도해야 하는 사람 곁에 있는 일의 무게를 생각했다. 이 이야기들 모두 내게 생소한 안쪽의 이야기들이다.


 안쪽의 이야기들을 읽다 보니 정말 '아무것도 아닌 건 아무것도 없었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되었다. 아무것도 아닌 일이라 상상했을 뿐이었다. 곁에서 지켜보고 함께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나는 못 할 일이라 글을 읽으며 되새겼다. 하지만 곁에 있는 사람들이 영웅이라는 말은 아니다. 곁에 있는 사람들은, 더 잘 곁에 있으려 하는 사람들은 그저 일상에 대해 말을 하고 있다고 느꼈다. 안전하고 자동으로 돌아가는 일상이 아닌 삐걱대며 돌아가는 거친 일상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누군가의 곁에 있기 - 취약함을 끌어안고 다른 삶을 상상하며 만들어낸 돌봄의 세계들
고선규 외 지음 / 동녘 / 2024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돌봄을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해 본 적 없다. 공저자들도 그랬다. 대단해서 하는 돌봄이 아니라 일상적이면서도 세상을 달리 보게 하는 경험으로 돌봄을 이해한다. ‘1인분의 삶‘이라는 안전한 상상으로는 담을 수 없는 한 사람의 취약성과 그 취약성을 마주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